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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억울함 알리기 위해 저항"…법원 '경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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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억울함 알리기 위해 저항"…법원 '경악'

10여 년 억울함이 '판사 테러'로

15일 저녁 현직 부장판사(서울고법 박홍우 부장판사. 55)가 판결에 불만을 품은 소송 당사자로부터 피습을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법정 안에서 소송 관련자들이 난동을 피우는 사례는 간혹 있었지만, 지난 97년 수원지법 최정수 성남지원장이 집무실에서 피습을 당한 이후 판사가 직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처음이다.

특히 소송당사자가 아닌 정신이상자의 '사회적 불만' 성격이었던 97년 사건과는 달리 소송당사자에게 직접 피습을 당했다는 점, 집무실 등 공적인 공간이 아니라 자택 앞에서 피습을 당했다는 점, 피의자인 김명호(50) 전 성균관대 교수가 그동안 집요하게 법원을 비난해 왔다는 점, 피의자가 '지식인' 층에 속하는 학자였다는 점 등이 이 번 사건의 특징으로 요약된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16일 김 전 교수에 대해 살인미수 혐의로 이날 중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기로 했다.

■ 법원, 경악·충격

소송당사자가 소송 담당 판사에게 테러를 가한 것은 사실상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50년대 좌우이념 갈등에 따라, 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시절 재판부에 대한 항거 차원에서 법원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은 있었지만 판사를 직접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1997년 이완용 후손의 재산권소송 승소 및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면 소식에 불만을 품은 정신병력자가 수원지법 성남지원장실에 난입해 지원장을 흉기로 다섯번이나 찌른 일이 발생했다. 당시 충격에 휩싸인 법원은 법원 경비를 강화하고 판사 집무실의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 김명호 전 교수 시위일지 中

그 이후 판결 시비로 인해 법정에서 소송 관련자들이 판사를 협박하거나 자해 또는 상대편 소송 관계자에게 테러를 가하는 행위는 있었지만, 이렇게 판사가 직접 공격을 당한 것은 처음이다.

법원은 당장 큰 충격에 휩싸였다. 법원은 사건 직후 장윤기 법원행정처장의 주재로 회의를 열고 이번 사건을 '테러'로 규정했다. 법원 측은 "재판을 받는 당사자가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재판장 집까지 찾아와 퇴근시간을 기다렸다가 잘못하면 생명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흉기를 사용해 테러를 감행했다는 사태의 심각성에 충격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조만간 판사 개인의 신변 안전을 위한 구체적 조치들을 취할 계획이다. 이번 사건으로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검찰도 '철저 수사'를 다짐했다. 한편 법원과 검찰은 이번 사건으로 판결에 불만을 품은 소송 당사자들의 '모방 범죄'가 늘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 "살해할 생각은 없었다"

법원이 발칵 뒤집어졌으나 공격을 가한 김 전 교수는 당당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 전 교수는 경찰서에 잡혀 온 뒤 "처음부터 살해할 생각은 없었다"며 "석궁은 박 판사와 실랑이 중에 실수로 발사가 된 것 뿐"이라고 말했다.

김 전 교수는 이날 서울 잠실 박 부장판사의 아파트 2층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박 부장판사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아파트로 걸어들어오자 석궁을 들고 박 부장판사에게 "항소가 기각된 이유가 뭐냐"며 따지면서 다가갔으며, 위협을 느끼고 제지하는 박 부장판사와의 실랑이 과정에서 석궁이 발사된 것으로 전해졌다.

석궁은 멧돼지를 잡을 정도로 치명적인 무기이지만, 발사거리가 짧아 활이 탄력을 받지 않은 상태였고 박 부장판사가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어 상처가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상 부위도 장기 등을 피해나가 박 부장판사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 12년 전 '교수 지위 소송'이 지금까지

김 전 교수는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경비들에게는 유명 인사로 통한다. 2005년 8월부터 대법원을 '서민착취주식회사'로, 대법관을 '강자의 개'로, 박홍우 부장판사를 '성균관대의 소송대리인'이라 스스로 명하고 법원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1988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 전 교수는 1991년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그러나 "1995년 1월 본고사 수학문제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가 윗선에 찍혀 부교수 승진에서 탈락했다"며 그 해 10월 '부교수 직위 확인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5개월만인 1996년 2월 '해교 행위', '논문 부적격'이라는 이유로 재임용이 거부됐고, 97년엔 재판에서도 패하고 말았다. 김 전 교수는 그 뒤 미국과 뉴질랜드에서 무보수 연구교수로 활동하며 지내다 2005년 귀국해 법원에 다시 '복직'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소송을 제기한 지 6개월만인 2005년 9월 1심에서 패소한 데 이어 지난 12일 항소심에서도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앙심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 법원과 끊임없이 갈등
▲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명호 전 교수.

김 전 교수의 법원을 상대로 한 싸움은 끈질겼다. 2005년 8월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 이후 그 해 12월부터 사건 전날인 14일까지 1년이 넘게 시위 일지를 작성해 인터넷에 공개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이용훈 대법원장이 관공서 5부제와 요일제를 피하기 위해 차를 바꿔타고 다니며 출근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할 정도였다.

그는 또 재판 과정에서 제출한 증거자료 등을 모두 인터넷에 공개했을 뿐만 아니라, 판사와 자신의 대화를 기록하며 "내가 불리한 재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법원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은 199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던 판사는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였던 양승태 대법관이었다.

김 전 교수는 이밖에 이광범 사법정책실장, 이상훈 부장판사, 이혁우, 홍성무 부장판사를 직무유기, 직원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것은 물론, 해직 교수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입장을 듣겠다며 이용훈 대법원장을 증인으로 신청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법원과 갈등을 겪어 왔다.

김 전 교수는 사건 직후 경찰에서 "법문을 무시하는 판사에게 국민의 마지막 권리로써 국민저항권을 활용한 것뿐"이라며 "내 억울함을 알리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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