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난 8월 포스코 청암재단이 후원한 해외 연수생들이 미국으로 출발할 무렵 포항건설노조 노동자들이 포스코 본사를 점거했다.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에게 경찰이 폭력을 휘둘러 남성노동자가 사망하고 임신한 여성노동자는 유산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업이 노동자들의 인권을 외면하면서 얻은 이윤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애쓰는 활동가들을 후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양면적인 모습은 사회단체 활동가들로 하여금 많은 고민을 하게 한다. 기업이나 정부의 재정 지원에 대해 어떤 원칙을 견지해야 하는가하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인권운동사랑방은 사회 단체 활동가들이 자유롭게 '수다'를 떠는 자리를 마련했다. 다음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에 실린 활동가들의 대화 내용 전문이다. 〈편집자〉
사회 : 박석진(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 편집인)
참가자 : 이묘랑(인권재단 사람), 이성우(공공연맹), 정경훈(아름다운 재단), 조양호(함께하는 시민행동), 최은아(인권운동사랑방)
포스코 청암재단 '시민운동가 해외연수'를 보는 눈
박석진 : 활동하다보면 재충전이 필요할 때도 있고 공부해야 할 필요도 많이 느끼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시민운동가 해외연수'와 같은 프로그램을 제안받으면 무척 고민될 것 같아요.
처음 이 프로그램에 지원할 당시는 그렇지 않았지만 얼마 뒤 건설 노동자들이 포스코 본사를 점거하고 그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돌아가신 분이 생기기도 했잖아요.
그런 것을 보면서 '기업한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큰 돈을 받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하는 시민행동 활동가 한 분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더라구요. 내부적으로 고민이 있으실 것 같아요.
조양호 : 공식적인 운영위원회 차원에서 논의를 거치지 않았죠. 사무처 내에서 이야기할 때는 재단에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았어요. (프로그램을 제안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까요. 단체로 돈이 들어오지도 않았고 개인 활동가 차원으로 생각 한거죠.
물론 엄격하게 따지면 기업 돈이기는 하죠. 그러나 어쨌든 재단을 통해서 지원이 되었고, 재단에 심사를 하고 하는 분들이 시민사회 인사들로 구성되었고, 지원 프로그램을 처음 제안했던 분들도 제가 알기로는 시민사회 분들이고. 그런 지점에서 고민이 생기기는 거죠.
정경훈 : 기업이 시민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사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기업 활동의 발전으로 생각합니다.
최은아 : 노동자가 죽어나가고 그 사건이 잘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연수생으로 선발된 분들이 '모두 거절'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어요.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상 수상을 거부하는 진보적인 다큐멘타리 감독들처럼.
재정 지원은 족쇄, 한번 받으면 끊기 힘들어
이성우 : 과거 노조를 통해서 기업의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면서 노조도 커지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 대해서 상층부로 포섭하려는 전략들이 계속 시도되었고, 그런 방법 중 하나가 돈이었던 겁니다.
현재 시민단체가 기업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질 수 있죠. 활동가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시민단체까지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 기업의 입장에서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죠.
그런 측면에서 기업 재단이 제공하는 연수의 기회가 기업의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장치들을 하나하나 제압해 나가는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대단히 엄격한 기준을 노동조합이든 시민사회단체든 들이대지 않으면서 사례 중심으로 풀어갈 때 활동의 독립성이나 자주성이 어느 순간 허물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죠.
최은아 : 구체적인 사례를 좀 얘기해 주시면 좋겠어요.
이성우 : 민주노총이 합법화 되고 나서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죠. '건물은 받는다. 단 운영비나 이런 건 받지 않는다'는 등의 재정 원칙을 두고 논쟁을 벌였어요.
현재 영등포에 있는 민주노총은 정부가 지원한 돈으로 세 들어 있는 것이죠. 건물을 준 것은 아니죠. 건물을 얻을 수 있는 보증금을 준 거예요. 한 20억 정도….
한국노총의 경우 한해 80억 정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상대적으로 한국노총은 맘껏 받고 민주노총은 제한되어 있지만 받기는 받는 것이죠.
공공연맹의 경우 조합비로 건물에 세를 들어 있어요. 공공연맹은 건물도 받아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강하게 있는 거죠.
작년 충주에서 김태환 동지가 파업 과정에서 용역들을 막다가 레미콘 차에 깔려서 돌아가셨죠. 한국노총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해 김대환 장관 퇴진을 내걸고 강력한 대정부투쟁을 선언했었죠.
그때 노동부에서 나왔던 게 '재정지원을 일체 다 끊어버리겠다'는 것이었어요.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이 관행화되고 그 안에서 문제의식이 없던 상태에서 그걸 끊어버린다고 하면 즉각 압박이 되는 것이지요.
노동조합의 경우 자주성을 생명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재정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 사실 끝장이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
기업, 재정 후원 빌미로 운동에 영향력 행사…독립적 재정운용이 관건
조양호 : 포털 사이트 다음(Daum)에서 만든 '다음세대 재단'이 그동안 정보인권운동, 문화운동을 지원해 왔어요.'이 경우 이해관계자로 볼 것이냐? 지원을 받지 말 것인가?' 고민입니다. 환경재단도 마찬가지죠.
환경재단도 환경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했는데 그 돈의 상당부분은 기업체에서 들어옵니다. 환경에 문제가 있는 기업의 돈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그 지점들이 고민됩니다.
그렇더라도 직접적으로 기업이 통제하는 돈은 받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는 거니까. 그 외 지점들은 케이스 별로 판단을 하는 거죠.
이성우 : 기업과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돈을 집행하는 권한이 누구한테 있으냐가 핵심이죠. 권한이 노동자에게 넘어오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어쨌든 지금은 주체가 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주는 돈을 받아서 용도에 맞게 움직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사회단체를 지원하는) 돈에 대해 '국민의 세금'이나 '기업의 사회환원' 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벌과 정부처럼 '경제적 권력'과 '권력화 된 돈'의 경우에는 성격이 좀 다르다고 봅니다.
정경훈 : 최근 대기업들의 경우 사회공헌팀을 만들거나 아니면 독자적인 재단을 만들어서 기업의 어떤 대내외적인 측면에서 이익이 되는 활동을 꾸려가려는 욕구가 강해지고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도 저희한테 들어오는 기부 제안들이 예전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박석진 : 어떤 권한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어요?
정경훈 : 예를 들면 기부금의 배분 결정이나 과정은 기부된 이상 재단이 이해관계자에 흔들리지 않고 독립으로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에 기업이 참여해 기업이 직접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처럼 배분을 결정하고자 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층위들이 있는 것 같아서, 아직까지는 사례별로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사회적 책임 외면한 기업이 시민단체 후원은 적극적?
최은아 : 기업들이 이미지 광고 많이 하잖아요. 포스코의 경우도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 그 컨셉을 가지고 광고하고. 그러면서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과 이미지를 공동체적인 가치로 환원시키는데, 그것이 한편으로 기업의 가치를 올려주면서 기업이 굉장한 공익을 이 사회에 제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기업의 사회환원도 비슷한데, 실제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사회환원은 기업이 이윤을 내면서 자행한 인권침해를 가려주는 것 같아요.
8000억 원 기부하는 삼성을 보면, 어느새 검찰 떡값은 가려지고 8000억 원 기부의 명예만 남잖아요.
조양호 : 소비자, 주주, 지역사회, 환경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고려할 때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이윤을 사회로 환원하라고 하는 요구는 정당합니다.
그런데 기업들이 자꾸 시혜적인 차원에서 베풀려 하니까 본연의 책임을 소홀히 하죠.
예를 들어 삼성의 경우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노조에 대한 책임인데, 노조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고 나서 남는 이익을 사회로 환원하면 충분히 칭찬받을 일인데, 그런 것을 자꾸 무마시키니까 문제죠. 환경과 관련해서는 정유업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이묘랑 :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있어서 한국 기업은 매우 불성실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역할을 하려는 것은 반가운 일이죠.
그런데 사실 순수한 사회 공헌이라기 보다는 경영전략 차원에서의 이미지 메이킹인 경우가 많잖아요. 기업의 지원 속에는 기업마인드와 마케팅이 스며들어서 순수한 공익활동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면도 있고요.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지우면서 어떻게 시민단체, 운동단체의 건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관계맺음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기업에 종속되지 않는 재정 후원, 가능할까?
최은아 : 기업이 도덕적 책무를 얼마나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사회공헌은 분명 마케팅에 도움이 되죠.
기업은 이미지전략의 일환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데, 사회운동은 관계맺기에 있어서 기업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권력관계에 있어서 어쨌건 사회운동이 열세인건 맞잖아요.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과 전략이 우리에게 부족한 상황에서 역으로 먹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와 걱정이 있어요.
관계가 동등해져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생길 때, 그 관계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포스코 청암재단 케이스를 포함해 대개 프로젝트가 지원서 내고, 선발하고, 보고서 작성 하는 등 일련의 과정은 상향식이어서 연구자나 활동가들이 자기가 공부하는 내용들을 그 재단이나 기업을 변화시키기 위한 내용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사회운동이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아 왔다고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우리가 기업에게 운동원칙(인권이나 환경기준)을 반영시키려는 쌍방향의 소통이 있었는지 되묻고 싶어요.
이묘랑 : 기업 돈을 받으면 현재 상황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에요.
경험적으로 그런 것들을 많이 보아 왔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기업이나 정부에 종속되지 않는 그런 독립적인 재단을 만들겠다는 것이 '인권재단 사람'의 취지입니다.
박석진 : 그렇다면 사회운동의 힘이 커지면 기업과 관계 맺기를 고려해볼 수 있나요?
이묘랑 : (모두 웃음) 과거의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대정부투쟁이었으나 지금은 대자본투쟁이라고 봅니다. 이때 자본이 뭐고 이를 어떻게 제어할지 관계설정이 중요합니다.
재정에 관한 사회단체들의 속사정…바람직한 원칙은?
박석진 : 다들 공식적인 얘길 많이 하신 것 같은데, 공식적인 얘기 이면에 고민이 있을 것 같아요.
조양호 : 공식적으로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돈을 안 받겠다고 했는데….
개인정보 침해 관련해서 국가인권위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그걸 받고 나서 중앙선관위와도 함께 할 일이 있었는데 내부적으로 논란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논의 끝에 현재는 국가인권위 돈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희들은 재정 지원받는 것에 논쟁이 붙으면 일단 안 받는 것으로 결정해요. 하지만 그걸 소문내지는 않아요. (웃음) 아무튼 큰 원칙은 재정에 관한 공개라고 생각해요. 어떤 어떤 원칙이 있고, 어떤 후원자에게 돈을 받았고, 그 돈이 어떻게 쓰였고 등등. 그런 정보를 공개해 시민이나 후원인이 우리 단체를 감시하도록 하는 거죠.
정경훈 : 법이나 사회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면 기업에게 돈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이슈가 되는 것은 내부적으로 논의합니다.
저희 고민은 일반기부금에서 5%를 운영비로 공제하고 있는데, 그것 가지고는 자체 운영비를 충당할 수 없어 운영비 모금을 별도로 하고 있습니다. 그 중 기업협찬금이나 후원금이 많이 차지합니다.
그러면서도 투명하게 공개를 하고, 직접적으로 기업의 부당한 영향을 받지 않고 활동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박석진 :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인권영화제는 영화진흥위로부터 500여만 원의 돈을 지원받고 있어요. 그걸 한계선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올해 논쟁이 된 것은 사회복지 시설조사 사례에서 조사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니까 돈이 들고, 사랑방은 최소한 활동비가 주어지지만 다른 단체 활동가는 활동비가 없는 상황에서 국가인권위 프로젝트 돈을 받아 그 돈을 사용했거든요.
이때 사랑방만 빠질 것이냐 기존의 원칙을 깨느냐에 있어서, 여러 논의 끝에 원칙을 깨는 것으로 결론 났어요. 다양한 사례를 보면서 점차 어렵고 복잡한 지점이 생겨요.
이성우 : 공공연맹은 일체 정부로부터 돈을 받지 않지만, 다른 노조는 너무나 다양한 입장이 있어요.
민주노총 안에서 어떤 경우 파업 2년 안하고 사업주로부터 재정자립기금을 확실하게 달라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는 조직도 있답니다.
공공연맹은 논의를 통해 하나하나 입장을 결정하지 않으면 어쨌건 돈을 받지 않는 것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조합원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투명하지 않으면 굉장히 견뎌내기 힘들고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활동가의 희생 vs 재정의 독립성
조양호 : 재정원칙은 간단하면서도 상식적이어야 합니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이 문제죠. 재정원칙의 있고 없고를 떠나 핵심은 재정에 대해 긴장감을 놓치는 순간 흔들리게 된다는 거죠.
저희도 창립 7년째이지만 순간순간 어려운 시기가 있었고 그 시기를 지나고 보면서 원칙과 긴장을 놓치면 힘들다는 것을 경험에서 알게 됐죠.
최은아 : 그런 관점은 활동가의 희생을 강조하는 것 아닙니까?
조양호 : 힘들겠지만 자임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 아닌가요. 지원 안받고 일하는 게 제일 속 편합니다.
최은아 : 한 사회단체 활동가로부터 이런 고충을 들었어요. 정부 프로젝트를 받아 사업하다보니 지원이 없을 때 과연 그 사업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생기더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업과 정부로부터 오는 돈이 단체나 개인의 자생성을 좀먹는 게 가장 문제인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회운동이 기업과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독립을 유지하는 것 가운데에서도 지속가능한 자생성 확립이 중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훌륭한 재정원칙이 있어도 그것이 활동가들이 감내하기 어려운 조건이라면, 다양한 개인의 정체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교조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합니다.
성찰과 긴장의 끈을 계속 잡고 나아가는 게 핵심이겠죠.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제21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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