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2월 18일/ 아버지는 네 살에/ 독립군 아버지 어머니 품에 안겨/ 어머니는 다섯 살에/ 동학군 아버지 어머니 등에 업혀/ 하루에 두만강 얼음판을 건너셨는데/ 이제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시고/ 반장님 반귀머거리로/ 환갑 진갑 다 지난 아들 며느리에게 업혀 사시면서도/ 마음만은 더욱 푸르러 더욱 뜨거워/ 갈라져 피 흘리는 조국 생각하는 마음/ 이대로는 눈감을 수 없어/ 이젠 우리더러 통일꾼이 되라신다
원산 함흥 회령을 거쳐/ 눈보라 휘몰아치는 북간도 용정 새장 거리에 서서/ 조선 독립 만세/ 조선 통일 만세/ 목이 터지게 부르다가 쓰러지는 게 마지막 소원이시란다
- 문익환 '통일꾼의 노래 1' 중에서
모든 부모에게는 자식이 있다. 모든 자식에게도 부모가 있다. 그러나 육체적 생명을 만들어준 이를 일컬어 부모라 부르지만 자식에게 정신적 생명까지 불어넣어준 부모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달랐다.
예순 일곱 아들에게 "통일꾼이 되라"고 새해 덕담을 건네던 부모. 그 덕분에 아들 익환과 동환은 감옥을 오가며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문재린과 김신묵의 삶 역시 아들들의 삶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감옥을 오가는 세월을 지나 노인이 된 아들에게 '더 고생하라'고 서슴치 않고 얘기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경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는 "가장 모범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고 그 아버지에 이어 자신도 목사인 문익환이 왜 '좌경 정치 목사'라는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민주·통일 운동에 목숨을 내걸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부모 문재린과 김신묵의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문영금·문영미 엮음, 삼인 펴냄)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이 귀중한 회고록은 특정 집안의 문중 역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곧 함북과 만주 간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생생한 한민족의 이야기다. (…) 그 가족 이야기를 통하여 20세기 한민족이 겪은 '도전과 응전', 빛과 그림자를 파노라마처럼 보게 되는 데 있다."
더욱이 이 책은 두 사람의 삶의 역사를 넘어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인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북간도 독립운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으며 두 사람의 삶을 지탱한 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가 한반도의 근현대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독교 운동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손녀인 문영금과 문영미가 조부모가 생전에 남긴 글과 기록, 구술 테이프를 정리해 엮어낸 이 책에서 우리는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문익환을 볼 수 있으며 또한 '문익환의 부모'를 넘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았던 두 사람의 삶이 전해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기린갑이 이야기
사람의 삶은 역사 속에 흐른다. 한 인간의 삶은 반드시 그가 살았던 그 시대의 배경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개인의 삶의 기록은 또한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한 방송사에서 방영되고 있는 해방정국을 다룬 드라마를 보더라도 사람의 사랑과 운명 역시 철저하게 그 시대에 의해 휘둘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바로 인간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기린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문재린 목사의 90년 삶 역시 1946년 해방 정국에 남하하기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문재린의 삶의 전반 50년은 북간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며 그 뒤 40여 년 동안은 대한민국과 캐나다를 그 공간으로 한다. 그러나 공간이 달라졌을 뿐, 독립운동을 했던 북간도에서 내려온 뒤에도 약자와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삶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1965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한일조약이 체결되던 당시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구국기도회와 강연회를 쫓아다니고 금식기도를 하며 조약 체결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국내 여론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이 조약의 국회 통과를 강행하려 하자 그는 국회 마당에서 분신할 계획을 하고 가족들과 신도들, 그리고 겨레 앞으로 각각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에서 그는 "7차 죽음에서 살려주신 하느님의 경륜을 나는 이제 발견했다. 이 때를 위하여 세 번 사지에서 건져주신 줄 안다"며 자신의 생명이 아깝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또 그는 "이 겨레들이 다시 왜놈의 종됨을 볼 수 없어 나는 간다. 삼천만이여 깨라. 이제도 늦지 않다. 나라 없는 개인이 살 수 없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결심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는 남은 여생 역시 온전히 나라와 겨레를 향한 것이었다.
민주화 운동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목사로서의 삶은 그에게 결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북간도의 명동촌에서부터 배운 '기독교 신앙이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그를 위해 목사로서 '평신도 운동'에 주목했다.
"한국 신자들은 예수를 구주로 안다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을 신앙생활의 전부로 여기고 있었다. (…) 좋은 목사를 모시고 많은 신도를 모아서 예배를 성대히 드리면 다인 줄 안다. 구원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복음주의의 잘못된 교리 탓이 크다. (…)
예수님이 공생활에서 하신 그대로 행함이 우리의 책임이요 참신앙이라는 생각은 자리 잡을 데가 없다. 나는 남은 삶을 한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평신도가 올바른 신앙 자세로 살도록 깨우치고 권면하는 일, 곧 평신도 운동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를 위해 '천국 시민의 실천 생활'이라는 7가지 항목의 실천 사항을 만들어내는데, 그 중 특이한 것은 7항이다. 7항은 "민주 운동은 주님이 시작한 것이니 나도 이에 참여하기로 한다"고 돼 있다. 아들 문익환은 아버지의 '평신도 운동'에 대해 "이것은 교회의 민중성에 대한 깨달음이었다"고 말한다.
"아버님의 '천국 시민의 실천 생활'에서 특이한 것은 7항입니다. 아버님이 믿으신 천국은 철저한 민주 사회였습니다. 거기는 명령과 복종의 질서가 완전히 청산된 곳이었습니다. 만인이 다 제 세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이 예수의 가르침에서 찾으신 민주성은 동시에 민중성이었습니다. (…) 아버님의 믿음은 이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같은 고민은 아들의 방북으로 이어졌다. 아들 문익환은 1989년 방북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분단된 민족의 통일 방안을 논의했으며 이는 남한 통일운동의 큰 전환점이 됐다.
고만녜 이야기
"익환 목사나 동환 목사를 위해 기도 안 해도 돼. 걔들은 유명해서 고문도 받지 않아. 그렇지만 학생 애들이 불쌍해. 고문 받으며 고생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해."
고만녜 김신묵의 손녀 문영미는 할머니의 철학을 '섬김 철학'이라고 표현했다. 기억력이 유달리 좋아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던 김신묵은 독재 정권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는 그 많은 학생들의 이름과 전공, 학교까지 다 기억했다.
마찬가지로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아들들보다 알져진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할지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던 김신묵. 그는 가장 약한 자, 억눌린 자들과 함께 살아 왔다.
"할머니는 당파성이 뚜렷한 분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사고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할머니는 철저하게 약자의 처지에서 같이 아파하고 분노하셨다. 남편에게 매 맞는 여성과 같이 고통스러워 했으며 죽어 간 자식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70년대부터 독재에 항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이들의 이름을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 놓고 항상 기억하셨다.
한 번은 한빛교회에서 청년들이 마당극을 했는데 군인들이 학생들을 짓밟고 몽둥이로 때리는 장면이 나왔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는 그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슴이 아파 그 장면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무대로 나와 군인들을 뜯어말리면서 항의하여 교인들을 놀라게 했다."
심지어는 경상도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아무 잘못이 없더라도 전라도 사람들을 오랫동안 차별했다는 이유로 크게 야단치기도 했으며, 길을 가다 아이를 때리는 엄마를 만나 "맞는 아이가 얼마나 아픈지 아냐"며 엄마의 등을 한 대 때리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남편 문재린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신앙이란 약한 자들을 위해 실천하는 데 있었다. 두 아들이 감옥에 갖혀 있던 1976년 4월 당시 캐나다에 있던 김신묵은 아들을 위해, 그리고 함께 민주화를 외치다 감옥에 끌려간 사람들을 위해 '어머니의 기도'를 적어 고국으로 보냈다. 그는 이 기도에서 분단과 독재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느냐고 하느님에게 호소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신 이 한반도, 삼천리 강산 오천만 민족이 국토가 양단이 되어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 친척 친구가 갈가리 찢어져서 슬픈 가슴을 안고 눈물을 흘린 지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오, 하느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오천만 민족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하는 기도를 안 들으시렵니까? 양단된 한반도에서 아우성을 치는 오천만 민족을 하느님은 그냥 보시고만 계시려는 것입니까? 이 민족이 일제 지배 36년간 흘린 피, 4·19 학생들이 거리에서 흘린 피, 인혁당 8인이 흘린 피, 서울 농대 학생이 흘린 피, 그 밖에도 숨어서 흘린 피들이 하느님께 호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남편과 아들이 역사의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뒷받침해 준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남편에 못지 않게 정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정의는 늘 개인의 차원을 넘어섰으며 그의 기도 역시 이처럼 가족을 넘어 민족과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감옥에 수감돼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아들 문익환은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어머니 앞에 이렇게 다짐한다.
"앞으로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새날을 향해서 온 몸으로 밀어붙이며 전진하고,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의 얼굴에서 저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 겁니다. 그들을 어머니로 알고 부둥켜안고 같이 몸부림치며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머니와 함께 천국의 복락을 누릴 겁니다."
평생의 삶을 통해 추구했으며 또 자식들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들이 꿈꿔 왔던 세상'은 어느 만큼 온 것일까? 그 대답은 살아 있는 이들의 몫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