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다. 집권 여당이 전국 단위 선거에서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열린우리당은 이번 선거에서 16개 시.도지사 선거 중 전북 한 지역을 건지는 데에 그쳤다. 기초 자치단체장 선거 결과도 신통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역대 최악의 성적이었다던 2002년 지방선거 결과도 이보다는 좋았다. 당시 16개 시.도지사 선거 중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4곳을 차지한 반면 한나라당은 11곳을 휩쓸었다.
집권 여당이 당명을 바꿀 정도로 참패한 선거로 기록된 1995년 지방선거 결과 역시 이번 선거와 비교하면 양호했던 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중반기에 치러진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자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는 재창당 작업을 했다. 당시 15개 시.도지사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민자당은 5곳을 차지했다. 민주당과 자민련이 각각 호남과 충청을 중심으로 4곳씩을 차지했고, 나머지 2곳은 무소속이 당선됐다.
'전국 정당'을 목표로 내세우며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분당 과정을 거쳐 탄생한 열린우리당으로서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남지사와 광주시장을 민주당에 내주면서 허공에 뜬 정당이 되어버리고만 셈이다.
"선거 패배 책임은 노 대통령의 실정" 50%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번 선거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은 노 대통령에게 있다고 보고 있다.
MBC가 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열린우리당의 선거 패배의 일차적 책임이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실패에 있다"는 응답이 50%에 달했다. 반면 열린우리당에 책임을 물은 응답자는 33%에 그쳤다. 이에 앞서 문화일보와 YTN, 한국리서치가 공동실시해 지난 26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선거 패배의 책임이 노 대통령에게 있다"는 응답이 31.4%로 가장 많았다.
유권자들은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중 어느 쪽이 더 책임이 큰가를 따지기에 앞서 현 집권 세력의 실정과 무능력에 대한 '심판'의 의미로 이번 지방선거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각종 성 추문, 공천비리 등 한나라당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연달아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다급해진 여당이 "싹쓸이만은 막아달라"며 읍소를 하고, 더 나아가 '정계개편론', '개헌론' 등 지방선거 후의 '카드'까지 꺼내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을 두고 "5.31 지방선거는 집권 여당에 대한 탄핵"이라고 규정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대연정 2탄'?…노대통령의 선택은?
물론 지방선거는 지방선거일 뿐 중앙정치가 자동적으로 그 결과에 연동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지방의원의 총합이 국회의원이 아니고, 시도지사의 선출 메커니즘이 곧바로 대통령 선출에 적용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민심의 향배가, 그것도 폭발적인 양상으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한나라당과의 협조 체제 구축이 노 대통령에게는 향후 1년 8개월 남은 임기 기간 동안의 국정 운영에 대단히 중요한 과제가 됐다. 그것이 민심에 순응하는 길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기세등등한 야당과 사실상 사분오열 상황의 여당으로 구성된 불균형 정국구도를 돌파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여소야대 시절과 같은 야당 연합이 아니라 단일 야당으로서 여당보다 훨씬 큰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은 과거 어떤 야당보다 막강한 발언권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지방선거로 민심이 현 집권 세력에 등을 돌린 게 확인된 만큼 이번 지방선거는 기존의 국회 의석수 분포와는 무관하게 한나라당이 정부의 국정 운영에 개입할 여지를 활짝 열어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앞으로 1년 반 이상 남은 임기를 무사히, 그리고 나름의 구상을 실현해 가면서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에 지속적으로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된 셈이다. 이렇게 발언권이 갑자기 커진 한나라당에 국정운영과 관련된 책임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대연정 제2탄'이라도 내놓아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난해 여름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이 다시 '대연정 카드'를 꺼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의 협조를 구하는 방식이 여야 지도부와 회동을 정례화 하는 수준이 될지,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거국 중립 내각의 구성으로까지 나아갈지는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만 6월 월드컵, 7월 재보선 등의 일정을 감안할 때, 한나라당을 향한 노 대통령의 '제안'은 조만간 윤곽이 드러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이번 선거 압승으로 국정운영과 관련된 책임감이 커진 만큼 노 대통령의 제안을 무작정 거부할 수 만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노대통령, 열린우리당은 되도록 '멀리'
이와 동시에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 열린우리당과의 '거리 두기' 전략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박근혜 대표의 피습 사건 이후 검.경 합동수사팀을 꾸릴 것을 지시한 것 말고는 완전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또 노 대통령은 지난 2월 취임 3주년을 맞아 출입기자들과 북악산 등반을 하면서 임기 중에 있는 총선, 지방선거와 관련해 "형식적, 논리적으로는 중간평가이지만 제대로 된 업적평가가 아니라 이미지 평가일 수밖에 없다"며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심판은 (대통령선거로) 한꺼번에 모아서 딱 진퇴를 결정하는 게 적절하다"고 일찌감치 '선거 책임론'에 대비해 선을 긋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문재인 전 민정수석도 지난 15일 "이번 선거가 참여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거듭 밝혔다.
청와대는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31일 "내일 새벽이나 돼야 개표가 완료된다"며 "오늘 중으로 청와대 입장 발표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내일 청와대 입장을 발표한다 하더라도 이기고 진 선거 결과에 대해서가 아니라 선거 과정과 관련된 입장이 나갈 것"고 덧붙였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이같은 '거리두기'와 관련해 당정분리 원칙을 강조하면서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있다.
노 대통령, 자신의 책임 도외시 하면 완전한 레임덕 맞을 수도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주당이 패배하자 "국민의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며 선거 패배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지방선거 약 한달 전쯤에 아들들의 비리 의혹 사건과 관련해 민주당을 탈당한 상태였다.
지금 청와대와 여당의 관계가 어떤 것이건, 또 노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이번 선거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건 간에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번 선거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대통령이 어떤 방식으로건 자신의 책임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여권 내부의 권력구도에 앞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만약 노 대통령이 선거 패배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에 돌리며 자신의 책임론에 짐짓 눈을 감는 자세를 취할 경우 당 안팎과 여론으로부터 또다른 역품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권력 운용 양상이 완전한 레임덕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노 대통령의 허심탄회한 책임 표명과 그에 바탕을 둔 여야 정치권과의 교감만이 남은 임기의 안정적 운영을 보장하는 길이라는 데에 정치권 안팎의 전망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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