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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남자들의 '수절(守節)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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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남자들의 '수절(守節) 타령'

유시민의 시사카페 <14>

우여곡절 끝에 열린 제4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도 눈물겨운 사연들이 줄을 이었다. 독자들께서는 신문과 방송에서 50년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 노부부들을 보셨을 것이다. 다음은 5월 2일 어느 신문의 보도 요지다.

"기자 출신인 북의 김강현씨(76)가 50여년 수절해온 아내 안정순씨(74)를 만났다. 당시 근무했던 신문사가 진보적이라는 이유로 네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김씨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를 취재한 뒤 평양에 눌러앉았다. 북에서 재혼해 네 딸을 둔 김씨는 아내 안씨에게 월북 경위를 해명하고 아들 재성씨(55)에게 미안함을 표현했다."

안씨가 남편과 함께 지낸 기간은 불과 5년. 그보다 10배나 긴 헤어짐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을 먹은 뒤 자취도 없이 사라졌던, 그 무책임한 남편에 대한 정은 변함없이 뜨겁고 애틋했다. 그 어떤 소설도 보는 이의 가슴 밑바닥을 이보다 더 촉촉한 감동으로 적시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개운치 못한 느낌이 남는다. 다름 아닌 '50여년의 수절' 때문이다. 방송과 신문을 가릴 것 없다. 현장 분위기를 보도한 기자들은 스스럼없이 안정순씨의 이름 앞에 '50여년 수절해 온'을 갖다 붙였다. 그 기자들은 다 남자들이다. 여기자가 그랬다고 해도 문제가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수절'(守節)은 남성권력이 힘없는 여성들에게 강요한 성차별 이데올로기이며, 곰팡내 풀풀 나는 조선시대 관념이다. '50년 수절해 온 남편 아무개씨'라는 표현을 본 일이 있는가. 아내를 잃은 남자가 다시 짝을 구하는 건 당연하지만, 남편을 '잡아먹은' 여자는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남편을 따라 죽거나 평생 외기러기로 살면서 시집 식구 종살이를 하는 것이 '수절'의 내용이다. '수절'하지 못하는 여자는 죽은 남편은 물론이요, 시집과 친정 모두에게 '가문의 수치'가 된다.

만약 '수절'이 남녀 구분 없이 배우자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다른 이성과 혼인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지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6.15 정상회담 이후 열린 네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을 눈여겨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북측 상봉단은 선발된 사람들이라 '출세한 남자'가 많다. 남측 상봉단은 추첨으로 선정했기 때문에 사는 형편이 제각각이고 여성도 많다. 부부가 만나는 경우 남의 아내는 대부분 혼자 자식 키우며 '수절'했고 북의 남편은 새장가 들어 '훼절(毁節)'한 이들이다. 남이건 북이건 남자들은 이런 의미의 '수절'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안정순씨는 스무 살 젊은 나이부터 지금까지 혼자 힘으로 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참혹한 전쟁과 끔찍한 빈곤의 시대를 견뎌냈다. 보통 여자로서도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는 '월북자'의 아내였다. 광신적 반공주의자들이 모든 권력을 농단해 온 반세기를 살면서 안씨 모자가 얼마나 모진 물질적 정신적 고초와 서러움을 겪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안씨는 그 모든 시련을 이기고 살아남아 마침내 중년의 아들과 함께 남편을 다시 만났다. 그가 겪어야 했던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세월 앞에 먼저 경의를 표하는 것이 바른 순서다. '수절'이라는 냄새 고약한 이데올로기는 당치도 않다.

안정순씨에게는 그토록 그리던 남편이 북에서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아 새로운 가족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상봉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단편적인 보도이기는 하지만 그 짧았던 신혼기에 남편과 나누었던 사랑을 지금까지 그대로 마음에 보듬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안씨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그가 지킨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었다고 믿는다. 50년 세월에도 빛이 바래지 않은 그 아름다운 마음 앞에 붉은 꽃 한 송이를 바치고 싶다.

기자들에게 바란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안정순씨가 당신의 어머니라면 당신은 '50년 수절'을 자랑으로 삼을텐가. 앞으로는 제발 그런 고약한 말을 쓰지 말자. 상봉하는 부부가 각자 남과 북에 새로운 가족이 있건 없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굳이 필요하다면 '50년간 혼자 살아왔던 아무개'라 하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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