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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 왜 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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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 왜 졌나

유시민의 시사카페 <12>

서울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민주당 국민경선은 어제 경기도에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결과는 여론조사 '만년2등'이던 노무현 후보의 예기치 못한 대역전승이었다. 대세론을 자랑했던 이인제 후보는 제주 첫 라운드에서부터 삐끗하더니 3라운드 광주에서 결정타를 맞았고, 결국은 게임이 끝나기도 전에 링을 내려오고 말았다.

스포트라이트는 역시 승자의 몫인가. 언론은 노무현 후보의 승인에 대해 갖가지 분석을 홍수처럼 쏟아낸다. 그러나 이인제 후보의 패인에 대해서는 한두 마디가 고작이다. 너나없이 지적하는 패인은 1997년 대선 당시의 경선불복 전력이다. 제주와 울산, 그리고 광주의 초반전에서 노후보가 이것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정통성 논쟁을 통해 기선을 제압한 것이 승패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선불복의 원죄'라는 표현도 흔히 등장한다.

하지만 그리 단순하게 볼 문제는 아니다. 이인제 씨의 경선불복 전력은 과거의 일이며 그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이것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결격사유라면 이인제 후보가 일반국민과 민주당 대의원들 사이에서 지지도 1위를 달렸을 리가 없다. 나는 이인제씨의 패인을 경선불복 전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잘못된 대응에서 찾는 쪽이 타당하다고 본다.

민주당 선거인단은 경선불복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선불복은 분명 옳지 않은 행동이지만 두 아들 병역기피 때문에 지지도가 바닥을 친 이회창씨를 떠받들고 그대로 대선을 치르는 것이 꼭 옳은 처사였다고 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이인제씨가 따로 출마를 했기 때문에 김대중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래서 경선불복의 동기야 어떠했든 신세를 갚는 것도 좋겠다는 '보은론'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이인제씨는 경선불복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했다는 노무현씨의 비판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경선불복을 한 것이 아니라 '사정 변경에 따라' 독자출마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만약 여론조사 2위 노무현씨와의 본선경쟁력 격차가 매우 컸다면 선거인단이 이런 주장을 마지못해서라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에 이인제씨를 찍자니 뭔가 좀 찜찜했던 유권자들 가운데 일부가 뚜렷한 명분을 가지고 나선 노무현씨 쪽으로 쏠렸다. 이런 경향이 초반전에 드러나자 상황은 그걸로 끝이었다.

만약 이인제씨가 '사정변경에 따른 독자출마론'이라는 정면돌파 대신 '정상참작론'이라는 우회전략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예컨대 이런 논리다.

"그렇다. 나는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했다. 잘못된 일이다. 미안하다. 그런데 정상참작을 좀 해 달라. 두 아들 병역기피 의혹을 받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내가 욕을 먹더라도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물론 내가 당선되리라 믿고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서 정권교체를 이루었지 않느냐. 나의 경선불복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는지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보자. 만약 국민들이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경선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럴 경우 당선된 후보가 허락해주기만 한다면 내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서 그분이 승리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나는 이인제씨가 이렇게 대응했다면 그렇게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기지 못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서울 선거인단 표를 열어보기 전에는 승패를 알 수 없는 게임은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노무현씨는 정책이나 조직으로 표를 얻은 것이 아니다. 믿어도 될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으로 선거인단의 마음에 다가섰을 뿐이다. 져도 특별히 잃을 것이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눈치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 것이 그 비결이었다. 반면 이인제씨는 지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작은 감점조차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정상참작론'이 아니라 '사정변경론'으로 정면 돌파하려 한 것은 바로 그런 경직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실상부한 백의종군을 통한 그의 정치적 재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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