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회는 북미대화를 촉구하는 결의안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한심한 수준이다. 부시 미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이후 한미-북미 긴장이 문제인줄 알았더니 정작 우리 내부의 여야 갈등이 더 문제다.
14일 여야는 결의안 채택을 위한 총무회담을 열었지만 시기와 내용에서 입장이 달라 결렬됐다. 민주당은 북미대화 촉구와 햇볕정책 지속 추진의 내용으로 부시 방한 전에 채택하자는 입장인 반면, 한나라당은 정부의 대북정책 재검토 필요성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하고 채택 시기는 미국의 진의를 파악한 후에 하자는 입장으로 맞섰다.
***여야, 한반도문제를 대선전략에 악용**
각자 나름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속뜻은 간단하다. 연초부터 조성된 한반도 이상기류를 대선전략에 최대한 활용하려는 것이다.
민주당은 부시 발언에 대한 반대여론이 고조되는 상황을 이용, 이회창 총재의 방미행각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외신보도를 들먹이면서 이 총재가 '악의 축' 발언을 지지하는지 여부를 밝히라고 맹공이다. 국회에서 방미면담록 제출을 요구하고, 대정부질문에서도 따질 계획이라 한다.
'이회창 = 부시'의 등식을 만들어 한나라당을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시켜 집권을 꾀하는 '매국노적 정당'으로 공격하겠다는 의도다.
한나라당은 이번 기회에 '대북 퍼주기' 비난 여론을 최대한 증폭시키려는 자세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문제의 근원이고, 이로 인해 미국의 입장이 확연히 바뀌고 있는데도 현 정부가 햇볕정책만 고집하는 것은 대북정책, 대미정책의 완전한 실패라며 공세를 퍼붓고 있다.
DJ와 민주당을 국제정세의 변화도 모른 채 북한에만 매달리는 '구걸외교'의 상징으로 전락시키겠다는 뜻이다.
대선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모든 정치쟁점이 대선전략에 활용되는 걸 뭐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여야의 상호 공격은 금도를 넘어섰다. 이들의 말대로라면 우리 국민은 '구걸외교' 정부와 '매국노적' 야당에게 우리 정치를 맡겨두고 있는 셈인데, 둘 중 어느 쪽이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금도 넘어선 여야 공방 중단해야**
흔히들 남북관계를 다차원방정식에 비유한다. 우리 정부와 북한 당국 사이의 관계만으론 풀 수 없는 복잡한 문제라는 뜻이다. 미·중·일·러의 주변 4강, 유럽과 국제여론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 내부에 분명 존재하는 대북 관련 남남갈등, 또 북한 내부의 강온 양론도 동시에 고려해야 할 문제다.
이처럼 복잡한 도식을 풀어가자면 '지혜'가 있어야 한다. 말 한마디에도 신중하고 주변의 모든 변수를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여야가 치고 받는 모습은 지혜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완전히 벌거벗고 서로를 물어 뜯는 식이다. 이들에게선 남북문제 해결을 위한 고뇌, 즉 민족적 비전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과 정부 관리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 모두가 휘둘릴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기초해서 나름대로는 전략적 어휘구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이 '악의 축' 연설문을 읽은 당일에도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북한과의 대화의지를 말했다. 국무장관은 하루는 강하게, 다음 날은 약하게 혼자서도 밀고 당기기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다.
부시 발언 이후 우리 정부의 공식입장은 줄곳 "한미간 견해차이는 없다,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야당은 "한미간 갈등이 심각한데 어쩔 것이냐, 정부 정책을 빨리 바꾸라"고 연일 공격해 댄다. 상식 이하다.
야당 총재가 미국 가서 파격적 환대를 받았고, 대북문제에 대한 '의견일치'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북한이 문제의 근본이지만 전쟁은 안 되니 대화로 풀자"는 것이라 한다. 정부여당으로선 기분 나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 가서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고 왔는지 모두 밝히라"며 공개적으로 촉구한다는 것 역시 상식 밖이다.
서로 감춰줘야 할 부분만 꼭 꼬집어서 어떻게든 발가벗기려고 물고 늘어지는 꼴이다.
***영수회담 열고, 국회 결의안 채택해야**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야당 총재가 미국 부통령, 국무장관 등을 만나고 왔다면 청와대에서 전화 걸어 물어 보고, 야당 총재는 찾아가서 설명해 주어야 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별 일이 없었더라도 이렇게 했어야 마땅하다. 게다가 마침 그 직후 미국의 대북 강경발언이 돌출돼 심각한 변화가 발생했다면 열일 제쳐두고 대통령과 야당 총재가 만났어야 한다. 만나서 서로가 느낀 미국의 속셈을 털어 놓고 얘기하고, 우린 어떻게 대응할지 함께 고민해야 할 일이다. 정부와 야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더라도 이번 상황에선 이런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교환 만큼은 반드시 있었어야 할 일이다.
이게 외교의 기본이요, 여야 모두 그리도 좋아하는 단어인 '초당적 협력'의 진짜 모습 아닐까?
지금이라도 영수회담을 개최하라. 국회 결의안도 한시바삐 다시 만나 채택하라. 오만방자하게 세계 위에 군림하려 드는 부시를 탓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수준 이하의 여야 정당과 함께라면 정말 남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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