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IMF졸업을 서두르던 지난 1999년 발발한 '옷로비 사건'은 '초등대응 실패'로 김대중 정권의 도덕성과 신뢰에 큰 타격을 주면서 김대중 레임덕의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마찬가지로 집권 3권차를 맞아 '선진한국'을 새로운 국정목표로 제시하며 국면전환을 시도하려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도 이기준 부총리 임명 3일만에 거센 반발 여론으로 사퇴하면서 큰 시련에 직면하게 됐다. 급기야 9일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을 포함해 박정규 민정수석,정찬용 인사수석 등 청와대 수뇌부 6명이 동반사퇴 의사를 밝히기에 이르렀다.
이기준 파문은 '초등대응 실패'라는 점에서는 옷로비 사건과 동일하나, 신속히 잘못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상대적으로 개선됐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그러나 문제는 '포스트(post) 이기준 파문' 즉 이기문 파문 사후대응의 성패에 달려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포스트 옷로비 파문'의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된다는 지적이다.
***김대중의 격노, "옷로비 사건은 마녀사냥"**
재벌총수 부인과 장관급 부인들 사이에 벌어진 '옷 로비 의혹사건'은 1999년 5월 언론을 통해 폭로되기 시작해 검찰 수사와 국회청문회에 이어 헌정사상 첫 특검을 치루고 그해 11월 김태정 전법무장관이 구속되면서 일단락됐다.
김 장관의 부인 연정희씨가 라스포사를 비롯한 서울 강남 일대 고급 의상실을 드나든 행적과 관련해 청와대 사직동팀의 내사를 받은 자료 등 대통령에게만 보고되는 청와대 내사 보고서를 박주선 법무비서관이 축소조작하거나 빼돌린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연정희씨, 이형자(최순형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씨 등 연루된 여성 4명이 펼친 추한 '진실게임'은 급기에 법무장관과 검찰, 청와대 법무비서관 등 권부 핵심의 '진실게임'으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 정권의 도덕성과 신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던 김 전대통령은 옷로비 의혹이 처음 불거졌을 때 당시 러시아 방문중이였는데 "마녀사냥"이라고 주장하며 격노했었다. 부인 이희호 여사가 연루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서히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봇물 터졌고 김 대통령은 할 말을 잊었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은 잘못된 인사였다. '대전 수임비리 사건' 파동 등 하자가 있었던 인물인 김태정씨가 검찰총장에서 법무장관으로 승진, 기용됐다. 이어 김 전장관은 광주고 후배이면서 중견 검사 시절부터 '실과 바늘'처럼 친밀한 관계인 박주선씨를 법무비서관으로 추천했다.
옷로비 사건은 대통령 친인척 및 권력실세들의 비리를 견제해야 할 핵심요직에 '정실인사'를 한 데 따른 필연적 귀결이었다.
***DJ, 비판여론 일자 재야출신 김성재 민정수석 기용**
옷로비 사건후 김대중 정부는 외형상 국민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했다.
옷로비 사건 발발 다음달인 그해 6월말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 들어 없앴던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키고, 그 자리에 재야출신이자 김 전대통령의 복지.교육 정책 자문 역할을 했던 김성재 한신대 교수를 앉혔다. 김 교수는 민주교육실천협의회 대표, 경실련 교육개혁위원장, 한국장애인총연맹 대표 등을 맡아온 올곧은 인사로, 김 교수 기용은 청와대 비서실이 김대중 대통령 측근들로 가득 차 있어 올바른 견제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여론을 수용한 결과였다.
김 전대통령은 또 민정수석 휘하에 민정1, 민정2, 민원 등 3명의 비서관을 두게 했다. 박주선 전 법무비서관이 하던 사정 및 공직인사를 민정1비서관이 담당하게 하면서 이 자리에 민변 출신의 김주원 변호사(현 대한변협 사무총장)를 임명했다. 또 기존에 없던 재야.시민단체의 여론 취합 업무를 신설하면서 민정2 비서관이 맡도록 하고, 민원비서관은 청와대로 들어오는 진정서 등 민원 처리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업무를 맡게 했다.
이같은 민정수석실 부활 및 기능 강화는 비판여론을 수용하는 것인 동시에, 당시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집중됐던 권한을 분산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김성재 수석의 기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간 동맥경화 현상을 빚은 청와대 민심 전달 기능을 회복시되기를 기대했고, 김 수석은 그해 8월15일에 김영삼 전대통령 아들 김현철씨가 특별 사면될 때 '반대 의견'을 내는 등 청와대 내에서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일정부분 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6개월만에 민정수석 교체, '3홍 비리' 발발의 단초 제공**
김 전대통령은 다시 6개월만인 2000년 1월 청와대 비서실 인사를 단행, 대검중수부장 출신인 신광옥씨를 민정수석으로 기용했다. 김성재 수석은 총선 출마로 물러나는 김한길 정책기획수석 후임으로 옮겨 앉혔다. 외형상으로는 김한길 수석의 총선 출마가 이유가 됐지만, 실제 이유는 권력 내부의 김 수석에 대한 견제였다.
당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외부에서 들어온 김성재 민정수석과 김주원 민정1비서관 등은 청와대내의 미운 오리새끼들이었다"고 전했다. 사사건건 권력실세들과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김성재 팀'의 한 관계자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을 비롯해 동교동계 등과 부단히 충돌했고 민정수석실에도 이들 인맥이 넘쳐 흘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만약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민정수석실에 확실하게 힘을 실어주었다면, 김대통령 말년의 최대비극인 '3홍 비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김 수석은 그로부터 두달뒤인 2001년 3월 김 전대통령의 '오른 팔'인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정책기획수석 자리를 물려주고 청와대를 나왔다.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던 김주원 민정1비서관 등도 김 수석과 함께 미련없이 청와대를 떠났다.
광주 출신인 신광옥 수석은 이어 2000년 9월 법무차관으로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2001년 12월 신 전차관은 민정수석 재직시 '진승현 게이트'와 관련, 1천8백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신 전차관은 또 해양수산부 국장 등의 인사청탁 명목으로 1천6백만원을 받기도 했다. 신 전차관은 처음 의혹이 불거졌을 때 "한푼이라도 받았으면 할복자살을 하겠다"고 완강히 부인했다가 금품수수 사실이 밝혀져 빈축을 샀다.
급기야 김 전대통령은 김 전차관의 뇌물 수수와 관련 "매우 유감스럽고 국민에게 송구하다"며 대국민 사과를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발표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됐다. 당시 김 전대통령 장남인 김홍일 민주당 의원 연루 의혹도 제기됐던 '진승현 게이트'는 정권 말기 터져 나온 '3홍 비리'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말년을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당시 지근거리에서 김대통령을 보필했던 한 고위관계자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김영삼 전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일년동안 김현철 사건으로 '언제 대통령임기가 끝나냐'며 손가락으로 날자를 헤아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마지막 임기 일년은 피를 말리는 고통의 나날이었다"고 전했다.
***'포스트 이기문 파문'이 관건**
김영삼-김대중 정권 등 과거 정권의 정실인사는 이처럼 결국 정권 붕괴를 초래한 근원으로 작용했다.
이번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 사태와 관련해 국민들은 청와대의 인사 검증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민정수석실 오정희 공직기강비서관은 9일 이기준 전부총리 검증과정과 관련, "서울대총장 시절 각종 의혹이 많아 임용에 부담이 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며 "보고서에는 이 전부총리 장남의 연세대 특례 입학도 포함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청와대 인사추천위에서는 이런 실무자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혹의 핵심에는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 전부총리의 '40년간의 끈끈한 우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민정수석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로 민정수석실 인적 구성에 대한 문제도 있다. 참여정부 들어 첫번째 민정수석은 문재인 현 시민사회수석이었다. 노 대통령의 부산 인맥의 핵심이다. 현 박정규 민정수석은 노 대통령 함께 고시공부를 했던 고향(김해) 후배다.
초대 민정비서관은 노 대통령이 초선 의원이었을 때 보좌관을 했던, 역시 부산 인맥의 핵심인 이호철씨였다. 현 전해철 비서관은 노 대통령 최측근 안희정씨 변호사를 맡았었다. 최근 임명된 김진국 법무비서관도 안희정씨의 변호를 맡았었다. 오정희 공직기강비서관은 노 대통령 부산상고 후배다. 이처럼 대통령 측근, 혹은 측근의 주변 인물로 민정수석실이 꽉 차게 되니 온정주의에 빠져 엄정한 조사와 검증 기능이 제대로 작용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든 상태라고 비난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옷로비 사건'은 이처럼 노무현 정권에게 여러 모로 '반면교사'의 귀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옷로비 사건'의 귀한 가르침은 눈앞의 비난여론을 피하고 보자는 식의 '미봉책'은 더 큰 화를 부를 뿐이라는 사실이다. 다행히 노무현대통령은 장관들에 대해서도 '상임위별 인사청문회' 도입 등 제도적으로 문제의 재발을 막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옷로비 사건은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청와대 '민정' 파트에 권력 실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무섭게 감시할 수 있는 인물을 기용, 그에게 무소불위의 사정권을 줄 것인지 여부가 이기문 파문으로 치명적 상처를 입은 참여정부의 회생 여부를 가름할 잣대가 될 전망이다. 노대통령의 청와대 개편인사가 그 어느 때보다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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