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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갑(甲)', 박정희-박근혜 부녀는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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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갑(甲)', 박정희-박근혜 부녀는 통했다

[편집국에서]<21> 을의 눈물과 갑의 기원

# 을의 눈물

"사장님 철밥통이요? 공무원이요? 내 분명히 이야기 드렸지요. 능력이 안 되고 성장하지 못하면 가야지 어째 하려고 (…) 니 잘못했지 XX놈아. 니 잘한 게 뭐 있노? 10년 동안 뭐 하는 거야? 아, 열 받제? (…) XX, 접어라 알았제? (…) 기준이 어딨노. 가라면 가는 거지."

아모레퍼시픽의 영업팀장이 대리점주에게 운영권 포기를 종용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의 일부다. 민주당 이학영 의원이 13일 공개한 이 녹취록에 따르면, 아모레퍼시픽 측이 그동안 부인해왔고 공정거래위원회도 지난 2009년 눈 감아 준 '대리점 쪼개기'(강탈)의 전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업계 1위 기업이다. 며칠 전 재벌닷컴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웬만한 대기업 총수들을 제치고 주식부자 순위 4위에 이름을 올렸다. 2조3020억 원 규모라고 한다.

서 회장의 천문학적 보유 주식과 죽지 않으려면 버텨야 하는 대리점주의 비루한 밥벌이 사이의 이격 거리는 1억 광년쯤 될까? 남양유업 사태를 정점으로, 라면 상무(라면을 제대로 끓이지 못했다며 여승무원을 폭행한 대기업 임원), 빵 회장(반말을 했다며 호텔 종업원을 폭행한 중소기업 제빵회사 회장) 사건 등을 허다하게 보아왔지만 '갑을 사회'가 만들어낸 일상의 단면들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 지난5월 9일 오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센터에서 남양유업 김웅 대표(오른쪽 네 번째) 등 임직원들이 '영업 직원 막말 음성 파일'로 불거진 강압적 영업 행위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 갑의 기원

"8.3 조치는 재벌의 탄생 과정임과 동시에 한국 금융위기의 탄생 과정이었다. 8.3 조치는 기업에 면죄부를 주고 그 부담을 국민에게 넘긴 상황에서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준 조치였다."(서울대 박태균 교수)

1972년 8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소위 '8.3 조치'(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 15호)를 통해 고리사채에 허덕이던 기업들에 대한 구제 조치에 나섰다. 한마디로 기업들이 끌어 쓴 사채 상환을 동결한 것으로, 위기에 빠진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앞장서 비정상적인 특혜를 부여한 조치다. 기업들에 특혜를 준 부담이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재벌 경제 체제의 시금석이 된 8.3 조치의 현재적 효과는 동양그룹 사태에서 확인된다. 42년 전, 방만한 기업 경영으로 회사정리 신청을 하고 잠적까지 했던 동양그룹의 창업주 이양구 회장을 구원해 준 게 바로 박정희의 8.3 조치였다. 당시 "기업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기업은 쓰러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제2, 제3의 동양 사건이 또 나타날 것"이라고 한 언론의 경고는 42년 뒤인 오늘의 사정과 다를 바가 없다.

동양그룹 사태는 재벌 중심 성장의 '흑역사'와 그 부작용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기업가의 모럴 해저드, 특혜를 부여하고 부실을 눈감아 준 정부, 그로 인한 국민들의 피해까지. 재벌을 위해 국가와 국민이 치뤄온 막대한 비용은 성장을 위해 '슈퍼갑'들의 일탈을 언제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 경제민주화

사흘 뒤면 10월 유신이 단행된 지 41년 되는 날이다. 국정감사가 한창 진행되던 그날,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 시키겠다"며 국회를 해산했다. 연이어 제정된 유신헌법을 통해 국정감사 제도까지 폐지해버렸다.

오늘 시작되는 박근혜 정부의 첫 국정감사를 맞는 감회가 새로운 건, 그의 아버지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국정감사 제도의 역사적 부침 때문만은 아니다. 국회의 감시권을 틀어막으면서까지 한국 경제를 왜곡시킨 박정희의 유전자가 경제민주화 후퇴라는 박근혜의 '거대한 우회전'으로 발현되는 가운데 도래한 국감이기 때문이다. 지난 8월 10대그룹 총수를 만나 사실상 경제민주화 종료를 선언한 박 대통령의 행보는 10월 유신에 앞서 8.3 조치를 단행한 '아버지 박통'을 연상하게끔 한다.

"국정감사는 지난 유신독재 시절에 사라졌다가 민주화 시대 이후에 다시 부활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여당이 앞서서 국정감사의 본래 기능을 축소하고 마비시키려는 모습을 보며 과거 국회가 무력화됐던 유신독재 시절의 씁쓸한 추억이 다시금 떠오를 따름입니다. 새누리당은 재벌대기업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자신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국회의 권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제 발등 찍기를 중단해야 합니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의 경고는 "박 대통령의 재벌 편들기를 지원사격하기 위해 재벌총수들이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새누리당"의 행태에 대한 지적이다. 그 중 한 명,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도 국감 증인 채택에 실패, 손영철 사장이 대신 채택됐다.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은 증인으로 채택됐으나 그가 실제로 국감장에 나올지는 알 수 없다. 40여년을 이어온 '갑의 연합체'는 여전히 진격의 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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