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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연방제=적화통일'? 편견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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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세현 "'연방제=적화통일'? 편견을 버려라!"

[정세현의 정세토크] 북한이 연방제 통일방안 다시 들고 나온 이유는

개성공단 재가동과 이산가족 상봉 연기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남북 양측은 상호 비방전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북한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박 대통령을 비롯해 남한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이 와중에 지난 11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연방제 통일이 가장 공명정대한 통일방안이라고 강조하는 글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원광대 총장)은 북한의 이번 주장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체제통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나온 입장"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7일(현지시각) 시작된 APEC회의를 비롯해 아세안(ASEAN) 관련 국가 정상들과 연쇄 회담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의 변화를 촉구해달라고 다른 나라 정상들에게 부탁한 것에 대한 북한의 반발이라는 분석이다.

정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의 이런 행동이 북한으로 하여금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변화를 촉진시켜서 남한 주도의 체제통일을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북한이 박근혜 정부가 대북 정책으로 내세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본심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반박 또는 대안으로 연방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한반도 통일의 목표와 방향은 분명 체제 통일이 되어야 하지만 굳이 그것을 드러내서 북한의 반발을 초래할 필요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체제변화라는 것은 제3자가 권고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환경은 북·미 간 수교, 그리고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이 담긴 평화협정이다.

한편 정 전 장관은 북한이 말하고 있는 연방제가 꼭 공산화 통일 방안은 아니라면서, 시대의 흐름과 정세에 따라 연방제의 내용은 달라져 왔다고 설명했다. 지금 북한에서 말하는 연방제는 연방제가 처음 제기됐던 1960년대와는 달리 '느슨한' 연방제를 주장하고 있는데, 남한에 흡수통일 될 것을 두려워한 북한이 사전에 이를 막기 위한 포석을 깔아놓은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면서 정 전 장관은 "요즘처럼 종북몰이가 시대적 추세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여당에서 연방제는 무조건 공산화 통일 방안으로 인식하고 반북 정서를 조성하는 움직임이 있을까 우려스럽다"면서 지금 당장이야 답보상태인 현 정부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반북 정서가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남북관계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며 남북관계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음은 지난 12일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진행한 정 전 장관과의 인터뷰 전문이다.<편집자>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원광대 총장)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북한 <로동신문>이 11일 '연방제는 가장 공명정대한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이라는 정세론해설에서 연방제가 가장 합리적인 통일 방안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북한이 이러한 주장을 지금 들고 나온 배경은 무엇인가요?

정세현 : 일단 겉으로 보면 33년 전, 198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에서 내놓았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발표를 기념하는 글로 보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박근혜 정부가 체제통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나온 입장을 드러낸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되풀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한이 이런 얘기를 하게 만든 계기는 우리 쪽에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에 참가해서 다른 나라 정상과 회담을 할 때마다 "북한의 변화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중국에 북한의 변화 설득을 주문한 지는 오래 됐고, 심지어 인도네시아 정상에게도 그런 부탁을 했습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좀 난데없는 주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이 지구 상에서 남의 말을 가장 잘 안 듣는 나라 아닙니까?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고 여러 가지로 도움도 많이 주는 중국말도 잘 안 듣는데, 하물며 인도네시아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 사람들 말을 듣겠습니까? 결국 박 대통령의 그런 행동은 북한으로 하여금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변화를 촉진시켜서 남한 주도의 체제통일을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바꿔 말해서 박근혜 정부가 대북정책으로 표방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말은 좋지만 본심은 그런 데에 있다고 규정하고, 거기에 대한 나름의 반박 내지 대안으로 연방통일을 주장하고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8월 21일인가 통일부 장관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공식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한 후 나간 정세토크에서(☞관련기사 : "北이 한국 정부 '원칙'에 굴복? 국제정세를 봐야") '한반도신뢰프로세스'가 정부의 설명대로라면 햇볕정책 1.0까지는 아니어도 0.9 내지 0.8 정도의 수준까지는 되는 것 같다고 했었습니다. 정책논리나 표현 등으로 보면 그 정도는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이후 실제 행동 면에서 정책의 대상이랄까 객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반발이 심하게 나올 수 있는 발언이 이어지니까 북한이 그걸 정면으로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앞으로 '신뢰프로세스'는 대상이 없는 정책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현 정부가 북한 당국과 직접 만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기회 있을 때마다 성명이나 정책 백그라운드 브리핑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진정성을 북한에 전달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대신 다른 국가들에게 "북한의 변화를 설득해달라, 변화를 유도해 달라"고 했으니 의심 많고 자존심 강한 북한이 반발하는 건 정해진 순서였다고 봅니다. 북한 체질이 원래 그래요.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면 통일은 체제까지 통일이 되어야만 완성되는 겁니다. 체제통일하면 안되고 연방까지만 해야 한다고 하는 북한이 틀린 겁니다. 한반도처럼 땅덩어리도 작고 다민족국가도 아닌 곳에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가 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통일국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홍콩처럼 1국 2체제를 실행할 정도의 규모도 안 되고 남북 간에 문화전통이 크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미국처럼 다인종, 다문화전통 때문에 연방을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의 통일은 궁극적으로는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로 가는 것이 우리 형편과 필요에 맞습니다.

한반도 통일의 목표와 방향은 분명히 그쪽으로 설정되어야 하지만, 그건 임기가 5년 밖에 안 되는 남한 정부가 임기 내에 달성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로 갈 수 있는 정책을 임기 동안 조용히, 그리고 북한의 반발을 자초하지 않는 슬기를 발휘하면서 추진해나가면 되는 겁니다. 상대방의 체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미리부터 내놓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건 속셈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체제변화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식으로'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되면 어느 날엔가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기 때문에 중간에 내릴 수 없는 기호지세(騎虎之勢)의 형국으로 개방개혁, 그리고 변화가 자동적으로 일어날 겁니다.

체제 변화라고 하는 것은 제3자가 권고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가도 체제위협이 별로 없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우선 만들어줘야 합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북한은 체제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절대 개혁개방을 하지 않을 겁니다. 개방개혁을 하면서 외부의 간접 침략방식으로 체제가 전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체제를 국제적으로 인정하고 과거 정치·군사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나라들도 북한에 안보상의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고 보장이 있어야 북한이 개방개혁을 할 겁니다.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개방 모두 그러한 국제정치적 여건이 조성된 후에 시작됐습니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정상화가 중요합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과 수교가 필요합니다. 또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이 담긴 평화협정도 필요합니다. 그 두 가지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북한의 개혁개방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개혁개방의 연장선상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법인데, 개혁개방의 여건도 조성되지 않았는데 제3국더러 북한이 변화하도록 설득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입니다.

북한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하려면 개방개혁으로 나갈 수 있는 여건을 경제적 차원에서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가 개혁개방하는 목표는 경제 여건을 좋게 하기 위함인데, 내부자원이 풍부한 중국과 달리 북한의 경우에는 외부투자가 안 들어오면 개혁개방이 무의미해집니다. 그런데 북한에 투자가 들어오려면 아시아개발은행(ADB)이나 세계은행(IBRD)의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과 관계개선이 중요합니다. ADB나 IBRD에서 북한에 차관이 들어갈 수 있도록 미국이 허용해줘야 합니다. 그런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에 개혁개방해라, 변화하라고 말하는 것은 북한 체제의 특성 내지는 북한 체제가 안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없이 그냥 하는 말입니다. 이는 '통일정책' 이라기보다는 통일 문제와 관련된 대국민 정책입니다. 국민에 대해 홍보하는 정책에 불과한 것이죠. 상대가 전혀 호응할 수 없는 내용으로 대통령을 비롯해서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발언이 계속 나온다면 북한은 더 방어적으로 대응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중국과 베트남이 개혁개방으로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프레시안 : 이미 개혁개방을 이룬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국가들은 개혁개방을 하기 전에 국제정치적인 여건이 조성됐다고 했는데, 이들 국가들은 어떻게 개혁개방으로 나아가게 된 건가요?

정세현 : 우선 중국의 개혁개방을 살펴보면요. 1972년 2월 초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다녀갔습니다. 이후 미·중 양국은 1979년 1월 수교했습니다. 중국은 미국과 수교 전 7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서 정식 수교 전인 1978년 12월에 4개 현대화 방침이라는 것을 당의 공식 노선으로 채택하면서 개혁개방에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중국은 미국과 수교가 되고, 또 미국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연후에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오쩌둥(왼쪽) 전 중국 국가 주석과 닉슨 전 미국 대통령 ⓒ프레시안 자료사진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쇄신'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미-베트남 간 공식 수교는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미국의 대(對)베트남정책이 상당한 정도로 우호적으로 바뀌면서 베트남 판 개혁개방정책을 펼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을 했던 나라입니다. 6.25 전쟁 못지않게 처절한 전쟁을 6~7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베트남도 미국이 언제 자기들을 군사적으로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는 필요가 있었는데, 개방했을 때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의 투자가 들어올지, 즉 친미 서방 국가들이 베트남에 투자하는 것을 두고 미국의 허락이 떨어질지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개혁개방을 못한 것입니다. 양국의 수교는 비록 1995년에 이루어졌지만 이미 실질적으로 미국의 대 베트남 정책이 우호적으로 바뀐 상황에서, 즉 미국이 베트남을 공격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베트남의 개혁개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군사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지금도 정전협정으로 인해 사실상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이 자신들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 아닙니까? 또 수교가 될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북한에 개혁개방을 하라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셈입니다. 아무리 선의의 충고라고 할지라도 북한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충고입니다. 하물며 제3국으로부터 변화 내지 개혁개방의 권고를 받아서 북한이 변화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최근의 박 대통령의 주문이나 발언들을 두고 북한은 '이것은 우리 체제를 빠른 시간 내에 변화시켜서 어떻게 강제로 흡수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 거라고 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프레시안 : 북한이 이렇게까지 박 대통령의 발언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면서 연방제를 강조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정세현 : 북한이 체제통일의 대안으로 연방통일을 말한 것은 요즘 북한주민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류가 중국을 통해서 북한에도 들어가면서 북한주민들의 남한체제에 대한 동경이나 호기심이 늘어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정은 시대 북한의 경제 형편이 김정일 시대보다는, 평양 중심으로 보자면, 좀 나아진 것 같습니다. 변두리 사정도 좀 나아졌다고 합니다. 작년에 북·중 국경 답사를 해보니까 건너다보이는 마을의 풍경이 이전보다 좋아진 것은 분명한데, 사람의 심리가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북한 내부적으로 경제 여건 개선에 대한 요구가 상당히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정은 정권이 받는 부담이 클 겁니다. 주민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 발전 또는 개선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가 높아지다 보면 주민들을 중심으로 남쪽에 대한 동경이나 선망이 커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북한 체제가 안고 있는 고민이라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에서는 '남쪽체제에 흡수되는 통일 꿈꾸지 마라, 우리 끼리 잘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대안이 연방통일입니다.

연방통일론이 처음 나온 것은 1960년 8월 14일, 해방 15주년 경축사 형식으로 등장했습니다. 당시는 북한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살 때입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87달러, 북한이 148달러였습니다. 물론 인구가 우리가 2천만이었고 북한이 1천만 정도였기 때문에 GDP(국내총생산) 총액은 우리가 더 크지만 1인당 국민소득에서는 북한이 우리보다 약 1.7배 정도 앞섰으니 상대적으로 윤택했습니다. 그때 남한보다 우위에 있는 경제력을 무기로 남한을 정치적으로 흡수통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 연방통일론입니다. 남한이 북한을 앞설 만큼 잘살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인데 이때까지 북한은 연방통일론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북한이 당시에 쥐고 있던 연방통일론은 분명히 공산화 통일 방안이었습니다.

이후 8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한국 내부의 정치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면서 신군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는 한편 영·호남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보고, 북한은 남한을 두 쪽 낼 수 있고 그 한쪽과 손잡고 북한주도의 통일을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북한의 전통적인 '2대1' 전략입니다. 그래서 1980년 10월 10일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내놓았는데, 이 방안을 보면 2개의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용납하고 그 토대 위에서 공존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연방국가가 해야 할 10대 과제를 열거했는데, 이는 통일이 된 후에나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말은 멋있지만, 사상과 제도가 다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실행할 수 없는 정책과제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죠.

특히 핵심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5대 선결 조건인데, 국가보안법 철폐, 반공정책 포기, 주한미군 철수, 반공법 철폐, 민주인사의 집권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인사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인사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용공 내지 연공할 수 있는 인사가 집권을 해야만 연방제를 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결 조건이 다 이루어지면 굳이 연방제를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북한의 진짜 전략은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에 내놓은 창립방안은 외형은 사상과 제도 그대로 두자고 하면서 투 코리아로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통합된 공산주의 1체제 1국가 1정부를 머릿속에 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 역시 공산화 통일방안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 경제가 80년대에 국제정세의 변화로 휘청거리게 됩니다. 중국이 70년대 말 개혁개방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북한에 대한 원조를 줄였습니다. 또 80년대 중반부터는 소련도 개혁개방 노선을 취하면서 소련으로부터 들어오는 원조도 줄었습니다. 이 때문에 80년대 북한 경제는 '제로 성장' 상태에 있었습니다. 북한이 60년대 한국보다 잘살았고 70년대에도 그럭저럭 한국과 어깨를 견줄 수 있었던 것은 외부원조가 많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말로는 자립경제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대외 의존성이 컸었던 것이죠. 결국 남북 간 체제 경쟁은 사실상 80년대에 끝난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한국은 80년대 두 자리 숫자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고속 성장 중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 80년대 말 동구권이 완전히 해체가 돼버렸습니다. 소련도 해체됐고. 혈맹이었던 중국은 경제원리에 따라 북한과 거래하려는 나라가 돼버렸습니다. 결국 북한은 이미 남한과 경제 격차가 많이 벌어져서 '공산혁명기지'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남쪽은 경제발전을 하면서 체제 만족도가 높아지는 바람에 이른바 '남조선 내부의 혁명 역량 강화'도 기대할 수 없게 됐습니다. 또 탈냉전 시대가 되면서 '국제 혁명 역량과의 연대 강화'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산화 통일이 물 건너가면서 북한은 결국 투 코리아를 지향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그것이 1989년 김일성 신년사에 '이제 통일은 어느 누가 누구를 먹거나 먹히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표현으로 발현된 것이죠. 즉 흡수 통일될 우려를 표현한 것인데, 북한이 이런 표현을 80년대 말에 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1990년 10월 3일 동·서독이 흡수통일 된 이후 나온 1991년 신년사에는 '이제 연방제도 느슨한 형태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느슨한 형태'라는 것은 새롭게 나온 말입니다. 북한이 60년대, 80년대에 언급했던 연방제는 느슨한 형태가 아니라 남북을 묶어두는 긴밀한 연방제였습니다. 긴밀한 연방제를 주장하던 북한이 스스로 느슨한 형태로 풀어버린 것입니다. 이전의 연방제 방안을 남한이 덜컥 받아버리면 오히려 거꾸로 자신들이 먹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느슨한 것으로 풀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건 노태우 정부가 내놓았던 남북연합(국가연합) 개념을 사실상 받아들인 것입니다. 국가연합은 투 코리아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2000년에 김정일에 의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표현으로 나온 것입니다.

연방의 내용은 이렇게 바뀌어 나왔지만, 북한은 연방이라는 단어를 계속 씁니다. 60년대, 80년대에도 나왔고 91년에는 '느슨한 형태의 연방', 2000년 정상회담 6.15 공동선언 2항에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쓰였습니다. 즉 북한이 연방이라는 단어는 계속 사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시대와 국제정세 변화, 내부 역량, 남북 역량을 비교해 보고 그 차이에 따라 내용은 바뀌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1년 이후 지금까지 나오는 연방제는 공산화 통일이 아니라 투 코리아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91년 연말에 남북의 상호체제 인정·존중, 내정불간섭 등을 골자로 하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또 통일 이후 고려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단일의석으로 유엔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북한이 91년 9월에 남한보다 먼저 유엔 가입 신청서를 냄으로써 유엔에 투 코리아를 기정사실화시켰습니다. 이것은 투 코리아를 국제적으로 공식화하자는 것입니다. 북한은 그때부터 '조선은 하나다' 라는 말도 잘 안 썼습니다.

북한이 이번에 연방통일을 이야기한 것은 박 대통령이 외국 정상들에게 북한의 변화를 설득해달라고 했고 남한 정부는 신뢰프로세스에서 북한의 변화를 촉진하겠다고 하니까 큰일 났다는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북한 경제가 조금 좋아지면서 북한 인민들이 남한을 동경하게 되는데 이것을 막기 위한 선제조치일수도 있습니다. 북한은 개성공단은 열어놨지만, 상당 기간 동안 일종의 남북관계 긴장을 조성하면서 북한 주민들이 남한에 대한 환상을 갖지 못하도록 끌고 가려는 정책적 판단이나 설계가 서 있고, 그 토대 위에서 연방 통일이 가장 공명정대하고 합리적이라는 말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연방통일과 '3년 내 무력통일' 연결시킨 종북몰이 우려스럽다

프레시안 : 그런데 남한 내부에서는 연방통일이라고 하면 공산화 통일방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정세현 :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연말에 예·결산 심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당시 국회에서 일문일답식으로 질의할 때 이야기입니다. 그때 야당의 모 중진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합의하고 온 6.15 공동선언의 2항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유는 연방제에 동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연방이라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의 연방제가 60∼80년대까지만 해도 공산화 통일방안이었으니까 우리가 받을 수 없었지만, 90년대 이후에는 북한이 사실상 투 코리아로 가고 있고, 연방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연합을 지향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길게 이야기하지 말고 간단하게 답해라, 연방이라는 것이 공산화 통일방안이지 별거냐"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용이 실질적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연방제가 무조건 공산화 통일방안만은 아니다, 미국도 연방이고 스위스도 연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의원이 삿대질을 하면서 "미국이 무슨 연방이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미국도 연방이고 서독도 통일 전에 연방이었고 통일 독일도 연방입니다. 연방이라고 해서 꼭 공산화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좋은 연방도 있고 나쁜 연방도 있는 겁니다"라고 말했더니 옆에 있던 국회의원을 툭툭 건드리면서 저 말이 맞느냐고 물어보고 나서 나가버리더군요.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현 원광대 총장) ⓒ프레시안(최형락)
10년 전 이맘 때 국민의 대표인 중진 국회의원이 연방제는 무조건 공산화 통일 방안으로 알고 있었던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습니다. 10년 전에도 그랬는데 요즘처럼 종북몰이가 시대적 추세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걸 갖고 여당에서 다시 한 번 반북 정서를 조성하는 움직임이 일어날까 봐 우려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북한이 말하는 연방통일의 개념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북한에서 말하는 연방은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둬야 한다는 60년대, 80년대의 내용과 함의가 다릅니다.

최근 출처와 시기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 김정은이 "3년 내 무력통일 하겠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김정은의 발언이 언제 어떤 계기로 나오게 된 것인지 분명히 하면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고 우리가 거기에 대해 철저히 대비해야 하지만, 그것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언론에 대서특필 돼버리기만 했습니다. 그러면 "상당히 일리 있다. 저 사람들 요즘 하는 것 보니까" 이러면서 출처 불명의 '3년내 무력 통일론'과 '연방통일론'이 연계되면 한층 더 강한 반북적인 정서가 조성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야당의 역할이 중요한데 아쉽게도 야당이 이런 데에 관심도, 식견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당이 이런 사항들을 국내 정치에 악용하지 말라고 선제적으로 치고 나가야 합니다. '3년 내 무력통일론'과 '연방통일론'을 연계해서 여당이나 집권세력이 반북 몰이 내지는 종북몰이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현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지거나 답보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현 집권세력으로서는 기존 지지층을 규합하고 끌어안고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손쉬운 것이 반북 정서를 조성해서 남북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국내 보수결집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남북관계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면 남북관계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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