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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외면하는 노조, 운동할 자격 없다"

<인터뷰>70년대 여성노조 선구자 3인의 '삶'과 '운동'

"나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연을 맺고 함께 일하며 친구가 되었지만, 우리 여성노동자들만큼 어려운 고비에 부닥칠 때마다 내게 힘을 주고 내 삶을 정화시켜주었던 이들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했던 공부와 투쟁의 모든 시간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나에게는 교만을 버리고 인간평등에 대한 감수성과 역사에 대한 낙관을 가지게 된 소중한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만남은 매우 고단했지만 축복이었습니다." (<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 이대 신인령 총장 추천사 중)

<출판 기념회 사진>

최순영 전 YH무역 노동조합 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 위원장, 박순희 전 원풍모방 노조 부위원장.

YH 무역 신민당사 점거 사건,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 등 70년대 노동운동에 큰획을 그었던 사건들을 주도했던 이들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삶을 운동으로, 운동을 삶으로 여기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민주노동당 부대표인 최순영씨(52)는 4월 총선에 민노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 당내 경선을 앞두고 있다. 명사 출신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는 여성 '국회의원'이 아니라 진정 소외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낼, 부정 부패를 잘라낼 '여성'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포부다.

인천에서 자활후견기관인 '청솔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총각씨(57)는 가난한 이웃들과 부대끼며 사는 게 요즘 새록새록 재미있고 신난다고 한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대표인 박순희씨(57)는 재작년 'F-15K 도입 반대 투쟁' 당시 청와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다 경찰차에 치여 다친 허리가 아직 완쾌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인권 운동 단체들이 벌이는 각종 집회와 시위에 나가면 여전히 그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서로를 언니, 동생으로 여기며 고단했지만 축복이었던 30여년을 쌓아왔다. 80년대 '노동운동 전성기'를 지나면서 70년대 여성노조 이야기는 격렬했던 남성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에 가려졌다. 또 한국 여성운동 역사 속에서도 이들의 경험은 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다. 최근 70년대 여성노동운동 지도자 5명의 구술사를 담은 <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박수정 지음. 아름다운사람들)란 책이 나왔고, 반가운 마음에 이들을 만났다.

***"예수처럼 서른셋까지만 살겠다고 결심했어"**

1970년대 한국의 여성노동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70년대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시작돼 1979년 YH 무역 신민당사 점거로 마감했다.

당시 유신정권은 '근대화'를 내세우며 저임금에 기초한 저가 상품의 수출을 통한 자본축적을 경제발전 전략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섬유, 봉제, 가발 등 여성 노동 집약적 산업이 주를 이뤘고, 60년대 말부터 급속히 진행된 이농 현상으로 여성 노동력은 넘쳐 났다. 때문에 주당 53시간 이상이라는 세계 최장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이 가능했다. 70년대 제조업 종사자들은 전기, 가스, 수도 사업 종사자나 금융, 보험 및 서비스업 종사자 평균 임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았다.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임금은 더 낮아 남성 평균 임금의 45.4%에 불과했다. 1971년 제조업 평균 임금은 1만6천6백원이었으나, 여성 평균 임금은 9천원에 불과했다.

"정말 지지리도 가난했지. 동일방직에 들어갈 때 직원이 1천4백명이었는데,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이름도 특이했지만 다 나를 기억했어. 노동조합을 알기 전까지는 내가 인간답게 사는 게 정말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사는 거다. 그래서 하루에 12시간, 13시간, 16시간 이렇게 일하고 살았지. 우린 그때 식사 시간도 없었잖아. 새벽 6시에 시작하는 조면 5시에 아침밥 먹고 들어가고, 낮 2시조면 1시에 먹고 들어가고, 밤 10시조면 9시에 저녁을 먹고 들어갔어. 그러면 다음날 새벽 6시 교대하기 전까지 일하는 거야. 밥도 못 먹고. 그래도 그게 내 살길인 줄 알았지."(이총각)

<이총각씨 사진>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과정에서 착취·억압당하는 노동자의 가장 끄트머리에 여성 노동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일상적 억압 상태에 놓여져 있던 이들은 노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또 거기에 빠져들게 되는 것에 대해 아주 자연스런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돈 벌려고 왔으니까 난 완전히 범생이었어. 더군다가 도급이었으니까, 내가 일하는 만큼 내 수입이니까 열심히 일해서 돈 벌면 된다고 생각했지. 눈 뜨면 가서 일하고 15분 동안 밥 먹고 가서 또 일하고, 그렇게 열심히 해서 우리 부서에서 내가 봉급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노동조합을 알고 부터는 가난이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걸 알게 됐지."(최순영)

"맨 처음에는 주면 주는대로, 시키면 시키는대로 노예처럼 일하다가 의식이란 게 전깃불이 탁 들어오는 것처럼 오면서 자기 결단을 하게 되지. 노동이 천한 게 아니고 노동을 통해 세상이 움직여지고 창조되고 그걸 변화 발전시켜 나가는 게 노동자의 힘인데 왜 무시를 당해야 하나...이게 진짜 삶이구나 싶었지. 그러면서 자기 결단을 하며 순간순간을 산 거죠. 자기 결단이 없으면 그 모진 고통을 어떻게 견뎠겠어. 난 진짜 예수처럼 서른 세 살까지만 살겠다는 결단으로 시작했어.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가 서른 세살이더라구."(박순희)

1972년 동일방직에서 최초로 여성 노조 지부장이 탄생하면서 여성노동자들은 당시 어용화 됐던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에 파열구를 냈다. 72년 10월 유신 지지를 선포한 한국노총은 정부, 기업과 함께 독립 노조운동을 파괴하는데 나서기도 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78년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이다.

"여성 지도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노동조합이 단지 조합비만 가져간다고들 생각했지. 노조는 당연히 회사와 싸우지도 않고. 그런데 여성 지도부가 들어서니까 달라지는 거야. 제일 먼저 한 게 식사시간을 찾는 거였지. 그렇게 여자들이 똘똘 뭉쳐서 하나씩 하나씩 제 권리를 찾아가니까 회사가 남성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노조를 깨려고...그때가 노조투표일이었거든. 남자들이 분명히 폭력 행위를 할거라고 생각해서 동네 파출소에다 보호 신청을 했었어. 근데 새벽에 남자 대여섯 명이 들이닥치더니 고무통에 똥을 담아오는 거야. 투표하려고 오는 얘들한테 똥을 뿌리고...거기에는 담당 형사가 두명, 파출소에서 나온 경찰 두명, 관리자가 있었는데 다들 멀찌감치 구경만 하더라고."(이총각)

이같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중반 한국의 노동운동은 여성 사업장을 중심으로 활성화 됐다. 특히 1979년 YH 노조 파업과 신민당사 점거는 70년대말 전환기적인 정치적 사건으로 귀결되어 유신체제 몰락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신민당사에서 쫓겨날 때 우리가 4층 강당에 1백80명이 있었는데 경찰 2천명이 동원됐거든. 또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청와대에서 무술을 배웠다는 머리도 똑같이 스포츠 머리하고 옷도 블루진 한벌 입고 하얀 장갑 끼고, 그런 경호원들이 1백여명이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 얼굴이 지금도 섬찟섬찟하게 떠오르죠. 한 사람에 경찰 네 사람씩 달려 들어 끌려나왔지."(최순영)

<YH 노조 진압장면. 흑백사진>

1979년 8월11일 경찰의 폭력 진압이 끝나고 노조원 김경숙씨가 4층 강당 아래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됐고 이 사건은 유신체제의 도덕성과 정당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줬다. 개별 사업장의 임금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을 주요 이슈로 내세워 '비정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들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아니러니하게도 유신체제를 끝장내는 게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빵계, 작업복 입고 남자 만나기, 영화 골라보기**

"그때는 먹을 게 귀했어. 밤 10시까지 야식을 하면 빵을 하나씩 줬어. 보름달 빵. 근데 안 먹고 ‘빵계’를 했지. 빵계를 타서 시골 동생들 먹으라고 부쳐주는 거지. 자기거 하나씩 모아 보내려면 그동안 썩어버리니까 계를 해서 한번에 모아 소포로 부치는 거야. 지금도 그 생각하면 참 가슴이 짠해."(최순영)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힘이자 무기는 '단결'이란 교과서적 얘기를 그들의 경험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78년 동일방직에서 마지막에 노조원들 해고될 때 1백24명이 잘렸는데, 절반 이상이 견습공인 '양성'이었어. 그 친구들한테 왜 투쟁에 참가했냐고 물어보니까 대부분 언니들이 자기네들한테 너무 잘해줬다는 거야. 인간적으로. 그래서 언니들이 지금 저렇게 하는데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는 거야. 겁도 나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언니들을 배신할 수 없어서 했다고 하더군."(이총각)

이런 '의리'는 단위 사업장에서 수십개의 소그룹을 조직해 자발적인 운영이 가능토록 하는 노조의 치밀한 일상 사업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이들은 회고했다.

"공식적인 조직이 살려면 비공식 조직이 튼튼해야지. 비공식 조직이 진짜 끈끈한 인간 관계로, 한사람 한사람 그 집 환경이 어떤지, 숟가락 젓가락이 몇갠지 알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또 우린 노동조합에서 신협, 미장원, 이발소, 목욕탕 다 있었지. 10시에 한 교대가 끝나는데 그때 하루하루 바꿔가며 목욕탕에서 사람들 만나고. 목욕하면서 의식화하는게 얼마나 빠른데."(박순희)

"우리 같은 경우 개인적인 상담을 다했지. 큰 언니처럼 늘 생각하고. 어쩌다 연휴가 있으면 같이 수련회도 가고. 그런 일상 활동을 많이 했지."(최순영)

<최순영씨 사진>

무엇보다 당시 여성노동운동은 조합원들로 하여금 '여성'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70년대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들이 중심이 됐던 아카데미즘적 여성학.여성운동과는 그 뿌리는 다르지만, 여성 노조 지도자들은 이미 '자생적 페미니스트'였다. 당시 일부 지도자들은 76년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우린 그런 것도 했거든. 작업복 입고 출근하기. 작업복 입고 남자 만나기. 그때 당시에는 가짜 여대생이 그렇게 많았어. 청바지가 되게 비쌌는데 한달 월급을 줘야 사 입었는데, 그거 사입고 가짜 대학생으로 남자 사귀어서 그 남자가 경비실로 찾아오는 일도 있었고. 그래서 노조에서 그런 걸 가르쳤지. 청바지가 뭐냐. 미국 노동자들 작업복이다. 미국 노동자들 작업복을 왜 우리가 빚 내서 사 입냐.

또 가짜 남자 사귀어서 결혼한다 해도 가짜 부인되고 가짜 형수 되고 가짜 며느리 되는 거다. 그건 가짜 인생을 사는 거다. 노조 내에서 '어떤 남자와 결혼해야 하나' 이런 문제도 많이 토론하고 교육하고 그랬지. 또 소그룹 하면서 좋은 영화 골라보기, 골라볼 수 있는 식별력 키우기, 그리고 유행가 들으며 질질 짜지 않기..."(박순희)

***"비정규직 외면하는 노조는 운동할 자격도 없어"**

노동운동의 중심이 70년대 여성노동자에서 80년대 남성노동자로 옮겨오는 과정은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산업구조가 변화하는 과정과 맥을 같이 한다. 또 기독교, 천주교 등 종교단체 대신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위장 취업자로 노동현장에 진출하고, 직업적인 노동운동가 집단이 형성되면서 여성노조 지도자들은 조금씩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남성 중심의 노동 운동 역사가 쓰여지게 됐고, 어쩌면 이들에 의해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성과는 깎아 내려졌다고도 할 수 있다. 학생출신 노동자들은 70년대 노동운동이 조합주의, 경제주의, 경험주의였다고 비판했다.

"70년대 노동운동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박살이 난 건데, 마치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기본 정신이 잘못된 것처럼 지탄을 했지. 근데 얘네들 보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법도 제대로 몰라. 그래서 나한테 참 많이 야단 맞았지. 아는 것은 아는 걸로 끝나야지. 배운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눠가져야지. 그걸 '너희들 보다 우리가 위다'라고 해서 끌어가려고 하면 안되지. 또 노동자들을 주체로 세우고 자기들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으로 해야하는데 그런 부분이 미흡했지. 우리가 반성할 부분도 많이 있지만 주어진 시대적 몫이 그거뿐인 걸 인정해야지. 전체적인 사회구조나 상황을 알고 얘기해야 하는데..."(박순희)

게다가 당시 70년대 노동운동을 비난하던 학생 출신 노동자들은 상급노조를 거쳐 대거 정치권에 진출해있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 중에 노동운동 빙자해서 정치권에 들어간 사람 많지. 나는 의식이 좀 모자라는 건 용서해도 멀쩡한 사람이 자기 자리 탐욕 때문에 노동자를 디딤돌로 쓰는 사람은 용서가 안 돼."(박순희)

노동 운동은 철저히 약자 중심의 운동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지금의 노동운동에선 '사람' 냄새가 부족하다고 이들은 충고한다. 조합원들 사이의 끈끈한 정을 우선시했던 70년대 여성노조 지도자들의 운동 방향은 조합주의, 경험주의라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정규직, 비정규직간 차별 문제로 노동자간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는 현 상황에서 과거 여성노조의 전략과 기본 정신이 던져주는 시사점이 분명 존재하는 듯 했다.

"당시 여성노조 활동에 대한 비판이 많은 건 알지만 노조에서 일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건 바로 노-노간 갈등의 위험성 때문이었거든. 자본은 노-노간 갈등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선 인간적 애정과 신뢰가 중요했죠."(최순영)

"지금 대공장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 차별 문제가 심각하잖아. 노동자들 스스로 짓밟잖아. 그건 운동할 자격도 없는 거지. 자기 사업장에서 같이 일하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운동을 하면서 자기걸 개선해야지 자기 것만 끌어올리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끌어올리지 않으면 서로 망해."(박순희)

<박순희씨 사진>

노동자를 이른바 자기 출세의 도구로 삼았던 이들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 그렇다면 제일 동생뻘인 최순영 부대표가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는 것에 대해서 두 언니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70년대 노동운동했던 사람들이 '70민주노동운동동지회'라고 아직도 만나고 있다. YH, 동일방직,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고려피혁 등 당시 노조 지도부들이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순영이는 70년대 노동운동을 했던 우리들 대표로 나가는 거지. 순영이가 자리 욕심이 있었다면 부천 시의원할 때 이미 여러차례 기존 정당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고, 그때 했겠지. 또 우리들이 버팀목으로 있으면서 잘 하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할테니까."(박순희)

이총각씨도 "똑같은 마음"이라며 웃는다.

***"내가 생각해도 참 멋지게 살아왔다"**

"생각해보면 참 멋지게 살아왔구나..나한테 흐뭇하다. 나는 사람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살아왔고,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 만나왔다. 현장에서 박박 기면서 더 열심히 살려고 한다."(이총각)

"어떤 사람이 노후 걱정 안 되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왜 되냐. 노인 되면 또 노인된 만큼 운동하면 되지. 그때는 정부를 대상으로 노인복지 예산 늘리라고 투쟁해야지."(박순희)

"진짜 아무 걱정도 안 돼. 삼십대 후반부터 노후대책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나한테 충고한 사람들이 있는데...우리가 언제 물질적인 거 가지고 살아왔냐 이거야. 그래서 가진 거 없어도 오히려 마음은 더 편하고 더 자유롭지."(이총각)

"내 삶의 가치를 어디다 세울거냐...생각해보면 평화다. 평화에 가치를 두면서 사랑과 나눔이 중요하다. 또 나하고 다른 걸 인정하면서 살기. 요즘은 어떻게 하면 타인과 나누고 섬기면서 살까 고민하고 노력 중이다."(최순영)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이들은 이렇게 소박하게 답한다. 셋 중 유일하게 결혼해 아들과 남편을 둔 최순영씨는 자신이 가장 '부자'라면서 경기도 송추에 짓고 있는 집에 조만간 박순희씨가 이사와 함께 살 것이라고 말한다. 또 최씨는 이총각씨에게도 "언니도 더 늙으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자"고 한다.

"우리가 살 날이 살아온 날만큼도 안 될텐데, 전에 언니들하고 공동체 하자고 했거든. 이 노인네들 와서 다 같이 살아도 재미있겠다. 내가 요즘 신인령 선생님 집에서 살고 있거든. 총장이 되고 총장 공관에 들어가면서 선뜻 집을 내주셨다. 그게 쉬운일이 아니지. 모든 걸 다 내놓고 가는 게.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갈 때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그러지."(최순영)

이들은 지난 30여년간 그랬듯 또 긴긴 세월을 언니, 동생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게 너무도 분명해 순간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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