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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명 사망했는데 전경련은 여전히 '규제 완화'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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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명 사망했는데 전경련은 여전히 '규제 완화' 타령

[화평법 논란] 여당·정부, 기업 손 들어주나

"최근 논의되는 통상임금 범위 확대와 화평법 등은 기업 현실에 맞지 않고 투자나 일자리 창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9월 12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전경련은 관계 부처와 이해 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만든 법을 흔들기에 앞서, 어떻게 하면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예방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 국민 앞에 '전경련 식 화학물질 안전관리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9월 16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 등이 전경련에 보낸 항의서한 중)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이하 화평법)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거세다. 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지를 중심으로 연일 '화평법은 기업 도산으로 직결된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반면 환경단체와 환경 사고 피해자들은 화평법을 더욱 강화해야 환경 사고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습기 살균제 등 유례없는 환경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산업계가 여전히 제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터지자…화학물질 관리·규제에 관심 모여

지난 2011년부터 환경부는 정부입법으로 화평법을 추진했다. EU가 2006년부터 REACH(신 화학물질관리제도)를 발효하고 일본이 '화학물질 제조 및 심사 등의 규제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 등 세계 각국이 국민의 안전을 위해 화학물질 관리·규제 기준을 강화하자 한국도 이에 발을 맞춘 것.

환경부 화학물질과 서해엽 사무관의 보고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주요 방향 및 향후 추진 계획>(2011년 8월 작성)을 보면 화평법 추진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국내 유통되거나 유통된 적이 있는 화학물질은 약 4만 3000여 종에 이르며 매년3~400여 종에 이르는 화학물질이 새로 시장에 진입하고 있음에도 국내 유통 화학물질의 85% 이상이 아직 그 안전성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았다. (중략) 우리나라 유해법상 취급 제한·금지 물질제도는 (중략) 국제적인 금지물질이나 외국의 금지물질, 유독물 중에서도 독성이 높아 사용을 금지해야 하는 물질을 지정하는 수준으로 선진국의 제도에 비하면 여러 개선 사항이 있다."

당시 화평법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지면서 화학물질의 관리·규제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습기 살균제는 말 그대로 가습기를 살균해주는 용품이다. 가습기 살균제를 가습기 물통에 몇 방울 떨어뜨리면 저절로 살균 작용을 한다고 해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13년 동안 무려 874만 명이 사용한 것으로 집계된다.

문제는 가습기 살균제의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와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 CMIT/MIT 성분이었다. 원래 이것들은 살균제나 방부제 용도로 화장품에 미량 첨가되어 널리 쓰이던 물질이다. 그러나 물에 섞어 코로 흡입할 경우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폐 섬유화를 일으킨다. 보건복지부의 역학 조사를 통해 2011년에야 가습기 살균제의 이러한 독성이 드러났다. 이미 영유아(1~3세) 56명을 포함해 127명의 사망자 (2013년 5월 13일 기준. 환경보건시민센터,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 접수)가 발생한 뒤였다.

애초에 가습기 살균제 원료의 흡입 독성 실험만 제대로 했어도 막을 수 있는 참사였다. 용도를 변경했음에도 기존에 널리 쓰이던 물질이라는 이유로 방만하게 사용한 탓에, 사상 최악의 환경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사망자뿐 아니라 생존자도 1억 원에 달하는 폐 이식 수술 비용과 한 달에 200~300만 원의 약값을 감당하느라 삶이 파탄 났다.

▲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 회관 앞에서 '화학물질 안전관리 발목 잡는 전경련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참가자가 허창수 전경련 회장(GS회장)의 가면을 쓰고 석고대죄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 입법으로 화평법 추진…모든 신규 화학물질 등록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 등 10명은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막자'며 화평법을 국회입법으로 추진했다. 2010년 말부터 정부와 산업계는 17회의 간담회를 거쳐 합의안을 작성한 바 있다. 국회입법으로 추진된 화평법은 이 기존안보다 더욱 엄격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에 따르면 모든 신규 화학물질이나 연간 1t 이상 제조·수입·사용·판매하는 기존 화학물질을 매년 당국에 보고하거나 그 전에 미리 등록해야 한다. 기업은 등록 시에 물질의 용도, 특성, 유해성 등에 대한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현행법은 연간 100kg 미만의 화학물질과 조사, 연구 개발(R&D)을 목적으로 하는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등록을 면제해주고 있다.

화평법은 지난 4월 30일 국회를 통과해 오는 2015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산업계 집단 반발…여당 정치권, 정부, 달래기 나서

산업계는 '기업 죽이기'라고 즉각 반발하며 화평을 저지하고자 총력을 다하고 있다. EU·중국·미국 등 경쟁국들은 산업계를 지원하기 위해 화학물질 관리·규제 기준을 완화하고 있는데 한국만 이런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경제관련단체(대한상의,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중견기업연합회)들은 공동으로 화평법 개정 건의문을 국회와 정부에 보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 회장은 지난 8월 한 달간 수시로 국회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대기업 2320개 사, 중소기업 13만 개 사가 회원으로 있는 대한상의 수장으로서 화평법을 저지해달라고 정치권에 요청하기 위해서다. 그는 강창희 국회의장 등 국회의장단,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최경환 원내대표,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 등 여야 의원들을 만나 "대한상의도 일자리 창출과 경제 민주화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테니 정치권도 화평법 등 규제 입법의 완급을 조절해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달라"고 요구했다.

여당 정치권과 정부도 이에 화답하는 모양새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8일 "환경 분야의 불합리한 규제가 기업 활동에 애로를 초래해선 안 된다. 이 부분을 시행령 단계에서 반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청와대와 국회에 화평법의 내용 완화를 요구하는 건의서를 보냈다고 12일 밝혔다.

화평법 논란
① 127명 사망했는데 전경련은 여전히 '규제 완화' 타령
② '화평법 흔들기'에 성난 의원들 "국회로 가져와!"
③ "화평법이 경기회복 복병?"…재계 나팔수된 경제지들

개정된 화평법, 원안보다 크게 후퇴

그러나 화평법은 국회입법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외려 후퇴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환경노동위원회의 원안이, 산업계의 주장을 수용한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치며 약화됐다는 것.

원안보다 후퇴한 부분은 크게 세 항목이다. 우선 화학물질 제조 등 보고 의무자는 제조·수입·사용·판매자였지만 사용자가 빠져 제조·수입·판매자로 변화했다. 제품을 제조할 때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산업체의 보고 의무가 없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이런 식으로 하면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가 '원료를 수입할 때는 몰랐다'고 하면 그만 아니냐. 이렇게 엉망인 법이 어디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또 '화학물질 사용자의 제조, 수입자에 대한 용도 등 정보 제공'은 의무제공에서 '요청받은 경우에만 제공'으로 바뀌었다. 불성실 보고 업체 등에 대한 과징금 조항은 아예 삭제돼 보고에 소홀한 업체들이 빠져나갈 통로가 생겼다.

유해화학물질 함유 제품 제조 사전 신고는 △제품에 유해화학물질이 중량 비율 0.1%를 초과하는 경우 △제품에 유해화학물질이 제조자 또는 수입자별 총량으로 연간 1t 이상 사용된 경우였지만 화학물질이 사용 과정에서 유출되지 않고 고체 형태로 기능을 발휘하는 제품은 제외하기로 했다.

뻔뻔한 기업에 피해자들 분노

그럼에도 화평법을 완화하라는 산업계의 요구가 계속되자 환경 사고 피해자들은 허탈한 심정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16일 오전 3개 단체('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환경운동연합)는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경련은 화평법 무력화 시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508개 대기업을 회원사로 거느리고 있는 전경련에는 SK케미칼(가습기 살균제 원료 생산), 롯데마트('와이즐렉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이마트('이플러스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애경산업('애경 가습기 메이트' 제조·판매), GS리테일('함박웃음 가습기 세정제' 제조) 등이 소속돼있다.

이들은 "대한민국 기업계를 대표하는 전경련이 가습기 살균제 사고에 대해 가장 먼저 유감을 표명하고 소비자와 국민에게 사죄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수백 명의 억울한 희생자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고 사고 예방 대책을 제시해 국민과 소비자들의 용서와 동의를 구한 후에 현재의 화평법을 지적하는 것이 순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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