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난 지 일주일이 채 못 된 23일, ‘2002 대선 교수 네트워크’는 정치학자들과 정치인, 정당 관계자들과 함께 이번 대선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참가자들은 이번 대선을‘제2의 민주화’로 규정하면서도 ‘개혁의 방향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우려를 표했고, 해결해야 할 과제도 다수 제기했다.
‘2002 대선 교수네트워크’는 정치에 냉소적인 대학의 분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민교협·교수노조 등 교수 7단체가 참여해 지난 달 발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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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당선은 ‘제2의 민주화·포스트兩金시대’ 단계로의 진입**
발표자로 나선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이번 선거의 역사적 의미를 “양김정권이라는 민주화 1기의 마무리, 포스트 양김시대라는 2기로의 진입”으로 규정했다. 정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도 ‘구민주화그룹’이 아닌 ‘신민주화그룹’에 의한 것으로, 이번 선거가 “김대중정권의 승리나 민주당의 승리가 아님”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낡은 정치방식을 버리는 데에는 여야의 구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역시 이번 대선을 ‘제2기 민주화로의 전환’이라고 평했는데, “한나라당은 양김식 정치에 편승하고 증폭시켜서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양김식 민주화에 실망해 구 집권 세력이 다시 집권하는 ‘신 보수화’가 가능했던 상황”을 “새로운 정치질서를 바라는 열망이 압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 교수는 특히 시민운동의 변화를 강조했다. 그는 과거 1기 민주화 시대의 시민·민중운동은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목표 때문에 의정감시운동이나 공명선거캠페인에 머물렀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결과는 “시민사회의 역동성이 노사모와 인터넷을 통한 특정 후보의 지지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는 주장이다.
토론자로 나선 송영길 민주당 의원은 정치 현장에서의 변화를 소개했다. 그는 “노사모라는 ‘진짜 자원봉사자’가 생겼다”며 “이것으로 돈이 무한대로 들어가는 과거의 정치활동 구도가 깨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송 의원은 “노사모는 노무현이 ‘소유’한 대중이 아니다. 90년 3당 합당 때는 JP·YS를 따라서 의원과 대중이 같이 갔는데 그건 일종의 소유였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통한 빠른 정보 유통, “DJ의 음모?”**
이날 토론회에서는 인터넷 환경의 발달이 선거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의가 특히 활발했다. 참가자들은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빠른 유통이 선거 운동의 개념과 형태를 바꿨다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송영길 의원은 “과거에는 신문기자가 정치인의 ‘생사여탈권’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인이 홈페이지나 인터넷을 통해 평가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18일 정몽준씨의 노무현 지지 철회가 있자마자 네티즌들이 벌인 노무현 지지 호소 활동을 언급하며 “‘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는 조선일보 사설이 아침에 배달되기 전, 인터넷에서는 이미 상황정리가 다 끝났다”고 전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한 정치혁명은 DJ의 음모”라는 농담을 소개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의 이재영 정책국장은 “정몽준의 지지 철회 후 민노당 홈페이지 게시판에 주민등록번호까지 써가며 노무현 지지를 호소하더라”며 “그래서 40만 표가 노무현으로 갔는데, 그게 다 인터넷으로 모은 표”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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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방향이 불명확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표출된 ‘개혁과 변화’의 내용이 뚜렷하지 않은 점은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사회를 맡은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방향성’이 없음을 지적하며 “재벌인 정몽준이 20대 지지율에서 줄곳 1위를 한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도 “이회창 지지자는 중졸 이하, 저소득층, 최고 소득층이었고 노무현 지지자는 중산층, 고학력자였다는 점”을 들면서 ‘유럽식 계급정치’로 갈 조건은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강 교수는 또 호남지역의 몰표는 “DJ에 맞서왔던 이회창에 대한 반감”으로 ‘소극적 지역정치’가 여전히 작용했음을 지적하며 “선거의 긍정적 요소만을 확대 해석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이재영 정책국장은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비판하려고 미 블룸버그통신의 노골적인 노무현 지지 칼럼을 민노당에서 퍼뜨렸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거봐라 블룸버그도 노무현 지지한다’는 식으로 둔갑하더라”며 “정책 방향에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도 변화의 욕구가 뚜렷한 정치적 지향이 없음을 지적하며 “지지율에 좌우되는 가장 취약한 정권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민주노동당 약진의 의미**
토론 참가자들은 또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민노당의 약진을 높게 평가했다.
중앙대 신광영 교수는 “자민련이라는 극우세력의 몰락과 민노당의 등장이 한국 정당체계의 구도를 변화시켰다”며 이를 ‘좌파 정당의 시민권 확보’로 규정했다.
이재영 정책국장은 “정책 발표하고 일주일만 지나면 민노당의 정책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베끼더라. 그러니까 국민들이 딱히 권영길을 찍어야 할 이유를 못 찾았다”고 자평했다. 그는 “그러나 민노당이 정치문화에 충격을 준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는 대선을 통해 나타난 국민적인 에너지와 열망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수렴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끝을 맺었다. 공통된 의견은 개혁이 ‘數의 정치, 정치공학적 접근’이라는 구식 방법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권력투쟁으로 비춰질 뿐이며 역효과가 오히려 더 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민주당 해체’를 주장하며 먼저 ‘치고 나온’ 민주당 개혁파 의원들의 행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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