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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인가, ‘모략’인가?

<기자의 눈> 정치권 ‘검증론’에 대한 회의

며칠 전, 획기적 트랜지스터를 개발해 노벨상 후보로까지 꼽히던 미국의 젊은 과학자의 연구결과가 조작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하루아침에 몸담고 있던 연구소에서 쫓겨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더욱이 다른 과학자들의 충분한 검증을 거쳐야 하는 절차를 무시하고 그의 조작된 논문을 그대로 발표한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는 그간 쌓아온 세계적 권위에 큰 손상을 입게 됐다고 한다. '검증'이란 말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 하는 일화다.

'검증'은 과학적인 용어다. 과학에만 해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빈틈없고 객관적인 증빙을 요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통용되는 '검증'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대개의 경우, 구체적 근거보다는 모략에 가까운 의혹과 감정이 앞서기에 '흠집내기', '비방' 따위의 막말로 바꿔도 의미 전달에 큰 차질이 없다. 무언가 불안한 쪽에서 먼저 들고 나오고 당사자는 끝까지 부인하며 사실 여부는 결국 미궁에 빠진다는 특징도 있다.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검증'은 한층 무게를 상실한 말이 돼 가는 느낌이다. 어느 누구도 절대 우위를 단언하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비난에 다름 아닌 검증의 족쇄를 채우려든다.

***'서자론'부터 '밀지원설'까지, 夢 공격 여념없는 한나라당**

'노풍'이 식자 '정풍'이 닥친 꼴인 한나라당은 연일 '정몽준 검증'에 날을 세우고 있다.

서청원 대표는 현 정권과 현대그룹의 유착의혹을 제기하며 "현대 가문은 이 정권에서는 대통령 후보를 낼 자격이 없다"고 공격했다. 이규택 총무는 재산 형성과정에서의 세금 탈루의혹, 현대중공업 부실경영, 현대그룹 노동자 테러사건 총지휘 의혹, 현대 직원들의 후원회 강제가입 의혹 등 이른바 '정몽준 4대 의혹'을 제기했다.

당력을 총 집결시켜 사활을 건 듯 제기하는 '현대그룹의 대북 자금 밀지원설'은 DJ와 정 의원을 동시에 겨냥한 양수겹장이다.

개인 신상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정 후보의 대선 출마 전부터 김영일 사무총장은 '서자론'을 제기하며 출생 의혹에 불을 지핀 데 이어 이 총무는 정 후보의 박사학위 취득과정에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친일론'에서 '병풍'으로, 민주당의 昌 공격

내우와 외환을 동시에 겪고 있는 민주당도 물불 안 가리기는 덜하지 않다. 이회창, 정몽준 후보를 모두 잡아야 하나 연대 가능성이 조금은 남아있는 정 후보보다는 이 후보에게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이 후보 부친의 친일 의혹은 고전이다. 당 전체가 총동원돼 검찰 수사와는 별개로 연일 병풍 공세에 여념이 없다.

노무현 후보도 직접 나서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구시대적 인물"이라며 이 후보를 겨냥한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 부었고 TV 토론회에 대한 이 후보측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이번엔 '검증 회피자'로 내몰았다.

노 후보는 또 '이회창=고관집 자제분', '정몽준=부잣집 자제분'이라며 "이 분들 사고와 행동방법은 우리 서민들과는 아주 다르다"고 자질론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한나라당 공격엔 일일이 맞대응하는 정몽준**

출마가 거론된 이후 줄곧 상승세를 이어왔으나 정 후보측도 현 상황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네가티브는 하지 않겠다"며 노 후보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 전략으로 일관하는 한편 이 후보 측과는 사안마다 충돌이다.

한나라당의 '4대 의혹' 공세에 정 의원은 "국민은 (월드컵) 대표팀이 선전하기를 기대했는데 한나라당은 빨리 지기를 바란 것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현대그룹에 대한 공적자금 24조원 손실 책임론을 주장하며 자신을 비판한 김만제 의원에 대해서는 "김 의원은 어디에 가서 '어떻게 잘못되면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말도 했다"고 비난했다.

아직 정 후보 측이 이회창이나 노무현 후보를 직접 겨냥한 공격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어쩌면 아직 당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회창, 노무현 후보 모두 상대방 공격은 당에 맡기고 자신들은 민생투어 내지 정책순방에 주력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데, 정몽준 의원 역시 창당 이후 그런 역할분담을 모색하지 말란 법이 없다.

***'검증된' 정책과 비전 승부, 정말 안되나?**

각 세력이 상대 후보의 자질과 도덕성 검증의 미명으로 제기한 의혹의 실체는 이처럼 네가티브 캠페인에 다름 아니다. 어느 사안하나 면밀한 검토와 객관적 증거로 뒷받침되는 경우가 없다. '일단 터뜨려놓고 보자'는 인신공격이 여기서 유용한 방법론이다. 선명도에서 뒤지는 정책 검증은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내몰린다.

그렇더라도 국민의 올바른 선택을 위해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다고들 한다. 원칙적으로 이를 부정하는 이는 보지 못했다. 반면 네가티브 공세와 폭로로 얼룩진 선거판에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도 보지 못했다. 결국 '검증'이 본래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상대 후보의 장점에 대한 아낌없는 칭찬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인정할 건 인정해 주는 여유있는 자세가 아쉽다.

지금의 대선국면은 사상 최악의 네가티브 공방으로 치달을 위험이 커 보인다. 이때 누구라도 먼저 "상대방의 이러저러한 장점은 분명 인정한다"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렇게 인정해준 사람의 지지율이 올라가면 올라갔지 결코 떨어지지는 않으리란 예상, 이건 착각일까?

또 대통령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성과 자질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면 최소한의 타당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 제기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도 아니라면 싸우더라도 상대방과 대비되는 자신의 구체적인 정책을 가지고 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치권의 검증론을 검증해야 할 언론의 책임도 없다 할 수 없으니 이 글을 쓰는 기자도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세력이 집권하느냐에 따라서 향후 5년간 사회와 개인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까를 곰곰이 그려볼 수 있도록 정치권이 '검증된' 정책과 비전을 가지고 승부해 주기를 요구한다면 순진한 정치부 '초짜' 기자의 현실정치에 대한 몰이해가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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