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 집권한 80년 당시 학생운동 주역들 가운데 검거되었다가 석방되거나 6개월 정도의 단기형을 살고 출옥한 사람들은 군대로 보내졌다. 이들은 대체로 A, B, C 세 등급으로 나뉘어 A급은 감옥으로 가고 B급과 C급은 군대에 강제입영 됐다.'
전두환 정권 집권 초 민주화 운동세력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이른바 '녹화사업' 1기 대상자였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술회다.
'녹화사업'은 80년대 초 신군부세력이 강제징집된 학생운동 출신 대학생들을 '특별정훈교육'으로 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마련한 계획이다. 이 사업에 따라 강제징집된 사병들에 대한 강압적인 사상개조 작업이 진행됐고, 학생운동 사건 관련자들에게는 불법연행과 수사,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가혹행위가 정당화됐다. 이때 강제 입영된 사람들 중에는 소아마비 장애인 등 도저히 군대에 갈만한 상황이 아닌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특히 녹화사업 집행의 중심에 있던 보안사령부는 강제 입영된 사람들에게 함께 활동한 동료, 선후배의 행적과 동향을 파악해 보고토록 '프락치 공작'을 강요, 군 복무중인 사병을 공작정치의 도구로 사용한 인간성 파괴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全, "법규에 따라 시행한 적법한 정부시책"**
최근 '녹화사업'에 대한 조사를 진행중인 의문사진상규명위는 4일, 전두환·노태우씨에 대한 동행명령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진상규명위의 이 같은 결정은 자체 조사결과 '녹화사업'이 권력 핵심자의 지시에 의해 입안·진행됐다고 판단, 전·노씨에 대한 출석을 요구했으나 이들이 거부한 데 따른 것이다.
지난달 11일 전씨가 변호사를 통해 밝힌 출석거부 사유는 이렇다.
"대학생 징집조치는 부처가 법규에 따라 입안, 시행한 국가시책이므로 필요하면 해당 부처에 자료를 요청하라."
한마디 덧붙였다.
"규명위가 진상규명이란 명분으로 적법한 정부시책까지 조사하는 것은 월권행위다. 다만 대학생 사망에 대해서는 유감이고 진상이 밝혀지길 바란다."
노씨는 출석 요구에는 불응하면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이에 대해 3일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 거들고 나섰다.
"녹화사업을 포함한 지난 정권의 공과에 대해 역사적·사법적 검증을 받았는데 전직 대통령들을 소환하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전직 대통령들을 또다시 증언대에 세우겠다는 것은 사실상 전직 대통령들의 명예를 폄하하고 정치적 모욕을 가하겠다는 정치보복의 의도가 아닌지 우려된다."
***녹화사업은 체계적 공권력이 자행한 국가범죄**
현재 대학생 강제징집과 녹화사업과 관련해 진상규명위에 접수된 의문사 사건은 정성희, 한희철, 이윤성, 김두황, 한영현, 최온순씨 등 6건으로 모두 녹화사업이 강도 높게 진행되던 82년 7월부터 83년 12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외에도 88년 국방부 국정감사에 따르면 이 기간동안 강제징집으로 억지로 군대에 끌려간 대학생은 4백47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 통계조차 축소된 것으로, 81년 11월 이전에 입대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1천여명이 넘는다는 게 정설이다. 국가기관들의 조직적 공조 없이는 수행될 수 없는 규모다.
결국 이 사건들은 단지 개별적 사건 모음이 아니라 당시 국가권력의 핵심부의 지시에 의해 관련기관이 총동원돼 자행된 체계적 국가범죄다. 일부 보안사 장교들에게서는 "녹화사업은 통수권자의 요청이었다"는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 엄청난 범죄의 정점에 있던 전씨가 모든 책임을 해당부처의 탓으로 돌리고 나선 것은 상식적으로 온당치 않다. 게다가 씻을 수 없는 국가권력의 폭력을 '적법한 정부시책'이라고 정당화한 대목은 군사정권 시절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다시 한번 자아내게 한다.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규명해 과거를 청산하자는데 '전직 대통령의 명예'를 들어 진상규명위의 활동에 딴지를 걸고 나선 김용갑 의원의 발언 역시 그가 지향한다는 '보수'와도 개념적으로 거리가 멀어 보인다.
현재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전·노씨에 대해 '의문사위 동행명령에 응해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에 협조하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사건의 핵심 인사인 이들의 소환이 무산될 경우 진상규명위의 '녹화사업' 조사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위는 4일 동행명령장을 들고 전·노씨를 찾아간다고 하나 이들이 진상규명위의 동행명령을 순순히 따를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위원회의 동행명령에 불응할 경우 진상규명위는 의문사특별법 제37조 등에 따라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지만 형사상 처벌권은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1천만원은 과거사에 대한 '액땜' 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노릇이다.
***기무사·국정원 '자료없음' 버티기**
진상규명위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진상규명위측은 기무사령부의 전신인 보안사 녹화사업 담당자로부터 "당시 녹화사업 심사자 1천여명과 전체관련자 5천여명의 존안자료를 생산해 인수인계했으며, 이는 영구문서로 보존돼 기무사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기무사에 대한 실지조사를 시행키로 했으나 "녹화사업 관련자료를 지난 92년 모두 폐기해 자료가 없으며 문서규정집은 기밀사항이라 공개하기 어렵다"는 기무사의 버티기 앞에 무력화됐다. 실지조사는 해당기관에 통보만 하면 되지만 해당기관에서 거부할 경우 조사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국정원 역시 진상규명위의 자료협조 요청에 '문서실 확인 불가', '별도자료 없음' 등의 회신만 되풀이할 뿐이고, 경찰청은 '국정원의 보안감독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자료협조를 거부하고 있다.
***실질적 권한강화 뒷받침 돼야**
이처럼 '이빨없는 호랑이' 격인 진상규명위는 활동시한이 16일로 마감됨에 따라 진상규명위의 활동기한 연장과 조사권한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의문사 특별법 개정 요구가 거세다.
시민단체들은 ▲모든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진상규명위의 기한제한 폐지 ▲위증을 하거나 소환에 불응한 자는 3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나 5년 이하의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 신설 등의 내용을 담은 발의안을 마련한 상태다.
이들은 이같은 개정안을 몇몇 국회의원들을 통해 이번주 중 정기국회에 발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촉박한 기간과 이해기관들의 갈등관계 등으로 볼 때 개정안 통과를 낙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통과가 되더라도 실질적인 처벌권이 강화되지 않은 채 단순한 기간 연장에 불과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권력의 야만적 폭력이 저지른 살인행위에 대한 국가적 책임과 진실규명에 대한 국민적 요구 앞에 이제는 정치권이 화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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