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에는 대화를 나눌 대상자가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을 거의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그를 왜 `할 말 안 할 말`의 대상으로 삼았는가. 그가 빼앗긴 자리를 되돌려 주고 싶어서다. 딱히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을 위해서다. 애당초 그를 만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가능하겠지만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위험하겠기 때문이다. 그녀를 둘러 싼 환경이 너무 소란스러우므로, 만남의 내용 자체가 훼손될 수 있다.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얘기도 되겠다. 그러니 우선 이름만이라도, 나와라 뚝딱, 황수정. 인기인이므로 반말로 가능하다면, 나와라 뚝딱, 오 수정.
나는 `정치`라는 말에 아직 상당한 매력을 느낀다. 인간이 인간 복지의 질을 높이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암울을 지나 잠시 희망을 주다가 갑갑함과 짜증으로 그리고 분노를 유발하는 수준으로 치달아온 게 최근 10년 간 정치 `현실`의 `개판` 궤적이고, 그것이 상당량 씨니시즘의 씨앗을 내안에 심어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정치`현실`과 정치`이상`을 혼동하지 않기 위하여 더욱 `정치`라는 말의 매력을 붙들고 있는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른바 `선거`에 관한 한 나는 일찍부터, 아니 애당초부터 심각한 노이로제가 있다. 이 노이로제에는 전사와 후사가 있다. 선거권을 획득하고 마주친 첫 선거는 박정희 유신 이후 치러진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되는 선거였지만, `청와대 출신` 아버지는 애원 반 강제 반으로 나를 투표소까지 끌고 갔었다. 그때 내 기분의 께림직함, 그리고 투표소 전체를 짓누르는 `전망 자체의 어두운 불안과 불쾌한 음습`….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혹은 숱하게 부침한 `개혁` 정당 관계자들이 들으면 욕하겠지만, 나는 그 이후 단 한번도 선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선거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듯하지만, 요번에도 하지 않을 작정이고 지금으로서는 평생 선거를 하지 않을 것 같다.
노이로제 후사는 87년 대선과 연관된다. 민통연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문익환 목사 고희 기념 문집 일을 `전담`하게 되었는데 비중있는 논문 몇 개를 싣느니, 5-6매 짜리 원고를 많은, 숱한 사람들이 써내는 것이 더 `문목사 답다`는 의견에 맞추어 준비를 하다보니 잡무가 엄청 늘었고 나는 그 일에 6개월을 꼬박 매달렸다가 지상으로 나왔다. 그런데, 웬걸, 아주 친했던 친구 둘이 하나는 `비판적 지지파`로 하나는 `민중후보파`로 갈라섰는데, 정말 `원수지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당시 둘 중 한 파를 지지하거나 `견해 차이`를 이해할 정도의 운동권 상식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잡무를 맡고 어려운 게 있으면 그 `친구 둘` 한테 물어보고 따르리라고 결심한지 오래였다. 그런데, `견해 차이`는 이해하기 힘들망정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20년 가까이 같은 길 같은 뜻으로 `동지`였던 두 사람이 `고작` 견해 차이 때문에 `원수지간`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충격이고 경악이고, `이해 못함`과 `견디지 못함`의 구분을 무너트리는 공황이었다. 우리가 정말 같은 길을 오기는 왔던 것일까. 우리가 동지이기는 했던 것일까…. 그런 의문들이 밀어 닥치기 시작했던 것. 나는 주제도 소재도 없는 고민을 머리 싸매고 하기 시작했는데, 주제-소재 없는 고민이 더 힘든 건지 모종의 용량을 초과, 아이큐가 `다운`되는 경험을 했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이름 하나는 그만인 광명시 광복아파트.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리고 또 머리를 싸맸던 모양인데, 내릴 때쯤 나는 그냥 머리 속이 텅 비어 환할 뿐(시커먼 게 아니다. 시커먼 건 그나마 무슨 건건이가 있다는 뜻이다) 아무 정보도 맥락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멍하니 고민`하다가 나는 아파트 정문 담당 관리인(아파트가 소규모고 이 사람이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가)에게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아저씨 혹시 제가 가는 데가 어딘지 아세요…? 머리 속만 `지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얼굴도 `의학적`으로 맛이 한참 간 상태였는지 관리인은 황당하기는 커녕 아파트 호수보다 119(가 물론 그때는 없었지만)를 부를 태세였다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었다.
그 두 친구 중 한명은 `선거판` 뒤치닥거리의 격무를 견디지 못하고 비명횡사했고 또 한명은 `선거의 귀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국회의원은 물론 일찌감치 장관까지 치르고 집권당의 중역이 되었다. `출세한 자`를 들어 `죽은 자`를 비아냥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죽은 자`를 들어 `출세한 자`를 탓할 생각 또한 없다. 정치`판`은 그 `판`에 어울리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성질의 `능력과 기질`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고 또 살아남아야 정치의 이상을 펼칠 수 있겠으므로, 너무 순진한 탓에 정치`판`에서 그냥 노력봉사만 하다가 세상을 뜬 친구에게 `쓸데없는 짓` 쯤의 핀잔을 젯상 술 한잔 쯤으로 건네고 싶은 심정이라고, 당장은 죽은 놈보다 산 놈 쪽으로 좀 기운다고 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고, 그 두 사람의 판이한 행로 또한 `선거`에 대한 나의 노이로제를 `일상의 운명`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왜냐면, `선거판`에 관한 한, 나는 뒤치닥거리를 할 `겸손함의 능력`이 턱없이 모자라고, 헤집고 다닐 `귀재` 능력은 내 기질과 원체 다르다는 걸 그 `두 친구`로 하여 뼈저리게 느꼈다. 둘을 종합하면, 선거운동이란 내게 1% 쯤 좋은 일 해볼 생각으로 99% 쓸데없는 일을 `치러`야 하는 `짓거리`에 해당된다. 물론 시민참여 선거운동은 다르다. 그것은, 비유를 계속하자면, 양의 1%를 숱하게 모아 질의 50% 이상을 도모하고 잘하면 개혁하자는 괜찮은 집단 행위니까. 그건 그렇고….
`선거 기운`이 감지되면 나는 대체로 연락을 끊고, 요즈음 언론개혁운동의 주적으로 떠오른 한 일간지 속에 나를 흡사 구속시킬 듯 샅샅이 읽으면서 소설을 쓰곤 했다. 좋다, 씨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가보자. 니 예상이 맞나 내 예상이 맞나…. 그런 심정으로 그 신문은 이 나라 지배계급의 희망과 갈 길과 미래를 너무도 명확하게 또 명석하게, 화려할 뿐 아니라 논리정연하게 `전망`했고, 민주화 운동권의 오랜 비판 전통에 찌든 나는 그 전망 앞에 주눅 들었다. 그러나 비판이 아무리 옳단들, 더 나은 전망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운동이고 지랄이고 다 때려칠 밖에…. 그렇게 이를 악물며, 다소 비장하게 나는 `전망`소설을 썼다. 세 차례의 선거 계절을 거치며 3부작 9권으로 `완성된` 그 소설은, 물론 의도가 `불순`했으므로 `소설적`으로는 읽을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선거 `현상`을 보다 소설적으로 보게 되었고, 그게 더 재밌을 뿐 아니라, 더 정확한 관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설이 `허구`라서가 물론 아니고, 현실이 소설보다 기막히더라는 말에 전제된 `소설의 재미` 때문이 아니고, 소설이 정황 뿐 아니라 배경과 심리의 `맥락`을 요구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랬다. 왜냐면, 언론 `보도`는 갈수록 맥락을 무시한다.
투표날이 다가올수록 정치부 기자는 대체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한군데에 두지 못한다. 연대론 밀약설 음모론 등 `상부구조`의 일을 염탐하다가 `썰`을 풀게 되고 `썰`에 재미를 느끼게 되고 자신이 만들어낸 `썰`을 스스로 믿어버리는 `의학적 병리현상`까지 보이게 된다. 평소에 정치부 기자 친구를 만나는 일이 `루머가 쏠쏠하게 재미난` 일이지만 누구를 찍을지 갈팡질팡한 판에 그들을 만나는 일은 있지도 않은 TV드라마에, 혹은 아홉시 뉴스에 출연한 착각을 느끼는, 사정은 했으되 사랑도 쾌감도 전혀 없는 `헐레벌떡 헛손질`에 가깝다. 경제부 기자들은 `하부구조`를 분석해야 하므로 느긋하고, 평소에 경제부 기자 친구들을 만나는 일은 `재벌 Y담`이 양념으로 가미된 교양 강의를 듣는 일이지만, 그들은 투표에 임박해서도 `경제가 문제지…` 뭐 그런 말 밖에 할 형편이 못되므로 그 느긋함을 견디는 일은 정말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무능한 가장을 `견뎌내는` 가족을 들여다보는 일보다 더 답답하고 화나는 일이다. 경제를 잘못해서 힘들 걸…. 그들은 박정희 때부터 그런 말을 해왔지만, 정작 경제 망쳐 놓은 까닭에 무너진 정권은 박정희 이래 없었다. 사회부 기자는, 여론부 기자는 어떤가. `소설적`으로 상상해 볼 것.
요는, 매우 복잡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거. 그런데, 선거란, 그런 복잡함의 맥락을 모처럼 보여주는 국민 정치 교육의 장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노골적으로 또 자포자기적으로, `정치`를 `이슈`로 단순화하고 `이슈`를 카테고리로 카테고리를 `예스 혹은 노`로 단순화한다. 이념도 노선도 방법론도 정책도, 무엇보다 개혁이 `예스 혹은 노`로 구분된다. 이것은 2중으로 치명적이다. 정말, `정치`보다 `복잡함`을 강조하는 `정치인`이, 헷갈리지만 헷갈림 그 자체를, 말도 안 되지만 지지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 판에, 지방자치제 선거 앞에 `월드컵 축구`가 있다. 아하. 스포츠 기자는 어떤가.
선거가 정치의 복잡함을 단순화하는 과정은 `체육` 스포츠가 문화-예술 전반을 단순화하는 그것을 닮았다. `월드컵 축구`는, 88올림픽보다 더한 영향을 문화-예술 전반에 끼칠 것인데,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88올림픽은 그나마 경기 종류라도 다양했지 않은가. 88올림픽은 물론 국위를 선양했고(이런 식으로 국위 선양을 한다는 게 좀 찜찜한 것도 별도로 치고), 무엇보다 경제 수치와 향후 효과상 흑자를 기록했지만, 올림픽 기간 및 전후 1-2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문화(예술 뿐 아니라 생활 전반의)가 얼마나 천민화하고 단순화했는가를 지금 돌이켜보면, 겪어 보지도 못한 6. 25 전쟁 미군기의 융단 폭격을, 겪어본 듯 하다. 그리고, 앞으로 월드컵과 지방자치제 선거로 덮칠 정치-문화의 단일 종목화를 생각하면, 정말 개혁이고 나발이고 간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물론, 내가 축구를 좋아하고 안 하고에 상관없이 월드컵 행사는 치러야 하고 내가 투표를 하고 안 하고에 상관없이 선거도 치러야 한다. 그리고 내가 죽고 싶은 아니든 상관없이 세상은 지속되어야 하고 발전해야 하고, 발전할 것이다.
하여 나는 문화-예술과 가장 가깝지만 문화-예술 보다, 아니 정치 보다 더 영향이 큰, 그러면서 언론으로 보자면 어느 분야 보다 낙후한 연예계의 `복잡한` 현상에 눈을 돌리고, 그것이 아직은 선거 정치와 무관한 영역 같으므로, `내용의 복잡함` 까지, 최소한 복원시켜보려는 것이다. 그렇다. 오래 기다렸다 다시 탤런트, 황수정도 나와라. 황수정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황수정 `보도`는? 그 둘 사이에 어떤 의미의 간극이 존재하는가? 대한민국만큼 TV 드라마를 즐기는 나라는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만큼 TV 드라마를 `우습게 보는` 나라 또한 없다. 대한민국만큼 TV 드라마 위력이 큰 나라 없고 대한민국만큼 TV 드라마 `여론이 나쁜` 나라 또한 없다. 이 현상에는 역시 맥락이 없다. 물론 단순화 때문이다. `즐김`과 `위력`은 인기 혹은 시청률을 매개로 한 단순화. `우습게`와 `여론`은 `전망 없는 도덕`을 매개로 한 단순화. `위력`도 `즐김`도 `우습게`도 `여론 나쁨`도 `일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일상은 단순한 것인가, 단순해도 되는 것인가, 단순해야 하는 것인가? 모두, 아니다. 일상은, 일상이야말로, 정치보다 더욱,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 신화 혹은 오딧세우스 아내 페넬로페의 수의 짜기-풀기에 담긴 가정과 사랑과 섹스의 복잡함에서 이미 보듯, 단순해서는, 안된다! 일상은 예술이 될 필요가 없는가, 될 수 없는가, 되면 안 되는 것인가? 모두 아니다. 일상은, 일상이야말로, 예술이 되어야 한다. TV 드라마의 `기적`(이란 게 있다면)은 그 둘의, 합의 기적이다. 최근 나는 TV 드라마의 `기적`을 이렇게 정리했다.
영화에서 죽음은, 죽음의 이야기가 있는 없든, 영화 미학의 주제거나 소재거나 존재조건이거나 반영이다. 어쨌거나 길길이 뛰는, 튀는, 최소한 눈에 띄는 이야기=영역이다. TV 드라마에서 죽음은, 죽음의 이야기가 있든 없든, 삶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당연한` 일부다. 마치 현실의 삶에서 그렇듯이!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영화의 `화면 혹은 분위기`에는 죽음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당연한` 색(色) 혹은 감(感)이 스며들지 않는다. 일상의 연속성이 죽음을 제 안의 자연스런 일부로 받아들이는 경로가, 애당초 차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예술은 전철(前轍)로 TV 드라마의 `예술성`을 선도하는 동시에, TV 드라마에 스며든, 일상의 자연색을 심화하는 `죽음의 흑백톤`을, 경악`으로써`, 그리고 경악`으로서`접한다. 그것은 TV 드라마를, 탈(脫) 가상현실화하는 색 혹은 감이다. 흑백영화, 특히 무성영화는 지금도 그 점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흑백의 콘트라스트가, TV 드라마 경우와 달리, 영화의 극성(劇性)과 더불어 비(非)현실성까지 강조하는 한계 또한 암시한다. 그리고, (총)천연색 영화는 사태를 오히려 더 악화시켰다. 현재 TV `화면 혹은 분위기`는, 영화의 그것과, 거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차원에 있다. TV는 영화 연기와, 영화 연기가 연극 연기와 다른 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다르다. TV 드라마의 그 죽음의 일상 색을 다시 영화에 끌어 들여 영화의 천연색을 자연색으로 심화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아니, 우선, 불필요한가. 당연히, 필요하다. 그`심화`는, 향후 오랫동안 영화 예술가들이, 아니 모든 예술가들이 달겨들어야 할 가장 긴박하고(왜냐면 영화`장르`자체의 사활이 걸려 있다), 가장 용감한(왜냐면, 일상에 배인 죽음의 결이 이렇게 전면적으로 가시화한 적은 없었다)과제다.
탤런트가 `예술가`로 되는 일은 영화배우가 예술가로 되는 일보다 어렵지만, 어려운 만큼 더 소중한 일이다. 그것은 영화배우 예술가가 연극배우 예술가보다 더 힘들지만, 힘든 만큼 더 소중한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그렇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TV 탤런트-예술가가 출현하는 일은 요원한가? 아니, 정말 기적적으로, 또 환경에 비해 너무나 장하게도 `기적`은 가까운데 있다. 명배우들이 제일 가깝고 드라마 PD들이 그 다음으로 가깝고 제작자(혹은 TV 제작국 간부 혹은 당국자는 그 다음이고, 언론 연예면이 가장 낙후하다. 이 순서는 물론 제작 환경이 열악하고 그것이 열악한 정부 정책 탓이며 거꾸로 정부 정책의 열악성을 온존시키기도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특히 연기자들은 몸으로 때우며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다. 그리고 언론 연예면의 낙후성은, 경악 그 자체라는 뜻이다. 황수정 사건은 그 `몸`과 `언론-연예면`이 최초로 충돌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전에도 몸의 문제는 있었다. 그러나 언론과 충돌한 적은 없었다. 압살당하거나 얼버무리거나 아니면 정치권 실세에 의해 보호되거나, 대체로 그랬다. 황수정은 모든 면에서 그 경우와 다르다. 언론, 그리고 검찰은 그 `다름`에 경악했고 복수했고 광분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다름은 감동적인 다름이다. 손쉬운 것부터 말하자면 우선 그녀의 남자가 재벌이나 정치인 혹은 연예계 대부보다는 여러 면에서 평범한 사람이라서 나는 감동했다. 언론은 실망했고 비난 투로는 설명하기 힘들었고 그 힘듦에 방향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당연하지만 덧붙여, 섹스가 아닌 사랑이 그녀와 그 남자를 맺는 매개였다는 사실에 나는 또 감동했다. 언론은 이 `순애보`를 `육체적`으로만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마약이 아닌 최음제`라고 그녀가 주장했을 때 나는 좀 놀랐지만 곧 흥미로웠고, 조금 지난 뒤에 크게 흥분했다. `몸`과 `사랑`이 정말 한 몸을 이루는 `엑스타시`를 나는 대신 느꼈다. `대신`이란 말이 좀 비겁한가? 그러나 연기자는 예술가는 `대신` 느끼게 해주는 예술가다. 문학이 글로 대신 느끼게 한다면 연기자는 몸으로 대신 느끼게 한다. 문학자가 글로 대신 느끼게 하기 위해 글로 섹스를 체험-연습하는 것을 탓할 수 없듯이, 연기자가 몸으로 섹스를 대신 느끼게 하기 위해 몸으로 섹스를 체험-연습하는 것을 탓할 수 없다. 하물며, 글로 대신 느끼게 하기 위해 문학자가 몸으로 섹스를 체험-연습하는 것에 관대한 마당에 연기자의 섹스-체험 행위를 탓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더욱 하물며 그게 섹스 체험-연습이 아니고 정말 사랑행위였다는 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된다고 `길길이` 호들갑인가. 이것이, 비칭이라 좀 문제가 되지만, `딴따라`의 원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특히 가수-배우를 비롯한 몸 연기자에게 `대마초 문제`를 지금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적용해야 한다는 평소 내 주장의 근거다. 왜냐면, 몸-예술가는, 줄여 말하면, 자신의 몸의 예술적 엑스타시를 극대화함으로써 대중들에게 대신 느끼게 하는 예술가다. 요는, `예술적` 이라는 형용사가 지칭하듯, 극대화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으로 전락할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그러나 다시, 추함의 미학도 있으며, 그것을 인정 안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특히 몸-예술가들에게, 대마초를 피라고 강요할 수 없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대마초를 피지 말라고 할 수 없거나 필요가 없다. `몸`과 `예술` 사이에는 `멀쩡한 것`이 없다. 술이 흐르듯 그 비슷한 `안 멀쩡`들이 흐를 뿐이다. 멀쩡함의 미학은 `사이`에 있지 않고 각각의 주변 혹은 사이의 `배경 혹은 그 후`로 있다. 공연 예술가들한테는 더더욱 그렇다.
황수정 현상에 우리들은 왜 짐짓 놀랐을까? 어찌하여 하필 술 광고 모델 역이 공연 도중 취소되었을까? 좋게 이해하자면 집안에 일상 속으로 TV가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미노타우로스 신화 혹은 페넬로페 신화에서 보듯 섹스는 일상 속에 있다. 영화관에서 섹스하는 변태들 보다야 집에서 섹스하는 경우가 훨씬 정상이고 일상적인데 애들이 걱정 되면 침실 섹스 조심하는 거 반만 조심하면 충분할 텐데, 왜 애꿎은 애들 핑계 대며 우리는 TV+일상과 섹스의 관계에 대해 거품을 무는 것일까? 그것은 정말 희한한 이율배반의 일상 아닐 것인가. 설마 우리는, 우리네 보통 삶은 연예계 보다 더 `전근대-기만적`인 것 아닐까?
이래서야 우리는 TV 드라마를 통한 `일상의 기적`을 맞볼 수 없다. 탤런트들이 `배우의 날개`를 일상 `때문에` 꺾기는커녕 `일상 속으로` 더 심화시켜야 그 기적은 최소한 가능해진다. 거기까지는 얼마나 먼가. 황수정 `사건`이 사건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사건`을 두고 호외특종 날리며 사회기강 도덕 운운하며 신문기자질에 사회지도자 역할까지 참칭하는, 그야말로 전근대적으로 음탕한 `잡놈 중의 잡놈`들이 사라질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일상=예술의 기적을 맛볼 기회와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자, 그러므로, 쉬이, 물렀거나, 물렀거라, 물렀고 황수정, 아니 수정아, 니 안방 극장에 다시 나와라.
ps. 87년도 김대중은 `선생`이었다. 그 `선생`의 추락이 아쉽고 때로 분하고 때로 억울하고 울컥, 화가 치미는 것은 나도 매 한가지지만, 나는 그때부터 `선생`이라는 호칭이 의미하는 `단순화`가 내내 신경 쓰였었다. 노무현은 개혁의 `기수` 혹은 `선수` 쯤 되나? 그건 정치의 질이 한 단계 더 복잡해진 것, 아니면 단순해진 것? 내용이 있건 없건, 거품이건 아니건, 정치란 말이 지겨워도 아직 놓치지는 않고 있는 것처럼 `개혁`이란 말도 그쯤 되므로 누가 하든 어쨌거나 `개혁`이란 말을 살리기 위해서 일상과 `섹슈얼리티`의 복잡함을 사례로 든 것일 뿐 감히 선거 열기에 찬물을 끼얹거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는 의도는 애당초 없었으니, 선거 `운동자`들을 너그럽게 생각해 주시기를. 그리고, 그러나 황수정 이야기는, 정말 장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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