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기로 한 (술)집은 홍대 전철역 5번 출구로 홍대 쪽을 등지고 신촌 쪽으로 가다가 천민자본주의'판' 르코르비지에 건축 양식의, 제법 번듯한 미국 체인 레스토랑 코코스를 보고 '우'회전, 조금 올라가다가 다시 '좌'회전하면 눈을 때리는, 건물 전체를 형광등 수족관처럼 만든 국적 불명의 돈 놓고 마음대로 먹기 '판' 제주도 산지 직송 횟집 두서넛 뒤로 붉은 바탕에 하얀 한글 신명조 장(長) 2체 쯤으로 '눈치 없는 유비'라 쓴 간판이 언뜻 보이는 그 집이다. 자세히 보면 건물은 사각형의 외형이 둔중하고 낡고 완강한 것이 영문 모를 인쇄소를 연상시키는데, 입구는 표정과 복색, 그리고 자세가 원본 <삼국지연의> 그대로인 관우와 장비 상(像)을 '좌우' 배경으로 거느리고, 복색은 말끔한 선비 차림이지만 자세와 표정은 영락없는 삐끼 '판'의 유비가 비굴하게, '배실배실'에 힘을 주며 웃고 있는 손님 맞이 그림이다. 하긴 득의만만하다고도 하겠다. '삐끼'란 손님을 끄는 역이지 맞이하는 역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 '웃음'은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보다는 '연꽃 만나고 오는 바람'과 더 연관이 깊겠다.
'천민자본주의'란 단어가 나와서 말이지만, <눈치없는 유비>는 원래 유비, 장비, 관우가 각각 제멋대로 고집을 피워 소주집도 맥주집도 그렇다고 막걸리집도 아닌 뒤죽박죽의 그렇고 그런 집이던 걸 지금의 주인이 '제주도 산지 매일 직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직접 재료를 챙기며 갈치회, 소라회와 자리회, 그리고 돔베(사람 똥을 먹여 키우는 토종 돼지)고기에 성게국을 끓여내는 둥 '정통 제주도 음식' 을 선보이면서, 홍대 근처 뿐 아니라 서울 전체에서 손꼽히는 명소로 부상했는데(손님이 많기도 한데다, 내가 아는 한 소설가 현기영을 비롯한 제주도 출신 온갖 명사가 이 집을 단골로 드나든다), 아무리 특허등록 안했기로 바로 그 앞자리에, '원조'를 가리며 숭할 정도로 비까번쩍한 '산지 직송 횟집'을 들이 밀면 도대체 얼마나 뻔뻔스럽자는 수작인가.
문을 밀고 들어서려다가, 다시 몸을 돌려 홍대 쪽을 바라본다. '천민자본주의'란 말에 이어 '좌우'란 말이 오늘따라, 노무현 돌풍에 이은 '이념논쟁' 도 그렇지만, 더 크게는 오늘 만나기로 한 최만수 때문에 걸렸던 까닭이다. 홍대 앞은 조금 비껴 언덕길이 좁게 곧게 뻗었고 '좌'로는 극동방송 쪽을 내려가다가 '우'로 돌며 압구정동 못지 않은 번화가를 거느린다. 홍대'판'로데오 거리다. '우'로는, 2시 방향으로 곧장 오면 바로 내가 선 곳인데, 어영부영 주택가와 점방-슈퍼-카페가 이어지다가 그 중간 쯤에 그가 운영하는 디자인 사무실 <끄레 어소시에이츠>가 있고 그 다음으로 다시 어영부영 주택가와 점방-슈퍼-카페가 이어지다가 연기에 그을린 내벽의 돼지고기 소금구이집들을 질펀하게 뭐 싸듯 한참을 원없이 부려놓고서야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휴. 이 땅에서, 뭐가 '좌'고 뭐가 '우'냐. '압구정동'이 '우'고 '소금구이집'이 '좌'냐. 천만에. 그렇다면 거꾸로냐? 천만에. 어지러워 죽겠는데, 웬 단호? … 어쨌거나, 어지러운 채로, 이제 그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 그도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여기까지 오는 길은 그를 만나는 길이기도 했다. 그가, 모처럼, 장소를 정했을 뿐만이 아니다. 그는 내가 이런 식으로 길을 밟을 줄을 아마도, 짐작했다. 그는, 갈수록 난잡해져온 광고-출판계에서 단 하나의 목표, '가장 아름다운 형식'을 추구했고 꿈을 이룬 디자이너다. 세상이 험악하고 추해질수록 그의 디자인의, '아름다움으로의 집요한 응집'은 더 치열해지고, 기적적인 힘을 발한다. 언뜻, 디자인=형식이, 책'내용'보다 더 '내용적'으로 되는 순간이다.
광고 디자인을 했을 때는 부자였죠. 그런데 갈수록, 책 쪽으로 오게 되면서, 책 디자인은 돈이 안 되니까, 쪼들리게 되죠. 그래도 할 맛은 더 나죠, 허허…. 그와 나는 동갑이다. 그는 70년대 대학생 시절 때 대학생 히피였다는데, 얼굴이나 외모는 그 때 그대로일 듯 하다. 어떤 웃음을 보고 '쪼갠다'라고 표현하는 수가 있는데, 그의 웃음이 정말 그렇다. 그가 웃을 때는 언뜻 너털에 가깝지만 뭔가 긴 여운을 남기며 모종의 통념을 흔쾌하게 쪼개는 것. 그 점에서 그는 아직도 히피인지 모른다. 히피의 모토는, beauty of peace and sex 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sex까지야 내가 알 도리는 없고 beauty of peace는 그의 디자인 미학과 내내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 얘기를 좀더 해본다. 내가 73년도에 잠깐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어 어디 좀 게길 데 없나 돌아다니는데 누가 연극을 하자는 거야. 그런데 연극팀이 아니라 완전히 사이키델릭 대마초굴이더라 이거지…. 하아, 그런데가 있었나…. 있었어, 숙대 앞에. 코뮌이라고…호오…. 그런데, 나도 그걸 좀 펴볼까 하는 생각이 슬슬 드는 참이라, '왜 피냐? '고 물었더니, '인생이 외롭고 슬퍼서 기분 좀 좋아볼라고 핀다. ' 이러는 거라, 그래서 난 단념했어요. 왜냐. 난 인생이 너무 즐거워서, 대마초를 피면 과할 것 같았거든. 연극이 끝나고 뿔뿔이 헤어졌다가 한 10년 후에 각자 소식을 들었는데, 한 여자는 유학을 갔다가 유명 의상 디자이너가 되어 돌아왔고, 또 한 여자는 아직 등단하지 못한 소설가 지망생 처지고, 한 남자는 정신과 치료를 호되게 받았고, 다른 한 남자는, 이 자가 제일 재밌는데 말요, 무교동에 박힌 후진 관광 호텔 지배인을 하더라구…. 아하, 그래, 그렇겠군, 하하…. 왜 대마초 얘기가 이렇게 길어지지? 아 그의 외모.
그는, 얼굴이며 모타리가, 75년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어, 몽당 자루 만한 몸을 똘똘 묶여 마치 너무 오래되어 쭈그러진 축구공 같았던, 검취(검사 취조) 대기실(사람을 꾸역꾸역 처넣기로 제일 악명이 높다)의 작곡가 신중현 같다.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기준은 세 가지다. '잘 생겼다'와 '못 생겼다', 그리고 '안 생겼다'. 최만수는 세 번째 경우. '잘'과 '못'의 2분법을 극복, 하지는 않고, 문제시하는 쪽이다. 그 옆에, 오래 전부터, 앞으로도 언제나 그게 당연하다는 듯 홍현숙이 앉아 있다. 여자다. 얼굴은 다소 두툼해 보이지만, 입을 열면 나이보다 앳된, 그런데도 뭔가 상대방을 서둘러 활발하게 감싸는 듯한 어투가 또한 눈, 코, 입술, 귀, 뺨 모든 것을 귀엽고 예쁘게 '활성화'시키는 여자. 나는 최만수와 홍현숙의 사례를 접하기 전까지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친구 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최소한 속으로는 단정지었었다. 그런데, 서로에게 가장 낯익은 듯 하면서도, '불륜'이나 '연애' 분위기는 아예 각자 '내 사전'에 없고('우리' 사전에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데도 홍현숙이 말하면 최만수가 말하는 듯, 그래도 상관없을 듯 하고, 최만수가 말하면 홍현숙이 말하는 듯, 그래도 상관없을 듯 하다. '관계'라는 말이 품어내는 일체의 수상한 기운, 혹시 모종의 운명조차 '아름다움의 디자인'으로 전화시킨 것처럼. 디자인 팀으로 함께 활동해서 그렇게 된 건지, 그래서 함께 활동을 하게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보기에 이 경우, 아름다움은 좌파다.
그러니까, 두 분이 같이 일한 것이…. 20년이 다 되죠. 1983년 <이가솜씨>에서 처음 뵜으니까. 그리고 85년에 독립해서 <끄레>를 같이 만들었죠…. 앞 마디는 홍현숙이 했고 뒷마디는 최만수가 했는데, 둘 중 누가 했든 무슨 상관인가. 그렇게 최만수의 '걸어 온 길'을 살펴보자. 그는 공예를 전공했고 판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1983년 <이가솜씨>에 디자이너로 취직하고 1985년 독립 디자인 사무실 <끄레 어소시에이츠>를 차리고 북디자인은 물론 패키지, 패션, 콘서트 및 행사 포스터 등 디자인에 관한 거의 모든 업무에 종사했다…. 최만수에 대한 홍현숙의 '공식 입장'은 이렇다. 그는 타협하고 설득하며 상업적 효과를 고려해야 하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니라 '작가'에 더 어울리는 기질의 소유자다.…(중략) 일단 시작하면 무섭게 집중하고, 완성도와 디테일에 집착한다…. (중략) 고집스럽다. 스스로 최선이라는 판단 하에 제시한 디자인은, 대부분 색과 장식이 극도로 절제되는데, 제동이 걸릴 경우 타협점을 찾기 힘들다…자신의 디자인 미학에 대한 최만수의 '공식 주장'은 이렇다. 베이직basic 성향이다. 절제를 통해 정답이 아니라 어떤 예감을 주려는 것. 블루스 음악이 그렇다. 정형화한 리듬과 패턴 속에 흥분과 긴장이 야기된다. 그, 감정의 전이와 반향의 느낌이랄까. 단순히 다양성을 줄이는게 아니라 가장 적은 요소 안에 많은 것을 담아내려는 디자인….(중략) 시작은 유채색이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여러 무채색의 미묘한 차이를 살리는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나는 뉘앙스와 여운을 중시한다. 작업을 끝내고 시간이 지난 뒤 반향이 어떤가를 느끼려 노력한다. 유채색들은 곧바로 정답을 얘기하는 듯 하고, 보다 은밀하고 절제된 느낌의 색들을 찾다 보니…
판화라. 그의 디자인이 파는 것은 동판이나 나무가 아니고 사물의 주변 혹은 공간이다. 그 공간-판화를 통해 글자가 글자인 채로 무늬가 무늬인 채로 색깔이 색깔인 채로 가장 온전한 제자리를 잡는데, 그 제자리는 글자가 글자 스스로를, 무늬가 무늬 스스로를, 색깔이 색깔 스스로를, '판화'하는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사물이 대상이 아니라 유일 존재로 되기 위한 자기-판화. 그것을 통해 가장 일반적인 글자(주로 신문명조체)가, 가장 고요한 무늬(거의 드러나지 않는), 가장 고요한(거의 색이 없는, 혹은 그의 표현을 조금 바꾸어서, 없어져 가는) 색깔이 가장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그것들이 이루는 균형과, 느리고 조용하지만 눈물의 (감정) 순간/결과(투명한 색) 변증법을 닮은 속도의 공간화를 통해 여백이 이미 공백으로 충만하다. 그렇게, '유채有彩 혹은 질낮은 의미화로의 지향'이, 들어설 필요도, 겨를도 없다.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베이직'이라 규정하는 것은 겸손하기 때문이다. '미니멀'이라는 표현은 (미니멀리즘과 연관이 있다면) 오류거나, ('최소한'이라는 뜻이라면) 불충분하다. 가장 가까운 표현을 찾자면 릴케의 '사물-자체 시' 이론을 빌려, '사물-자체 디자인'이라고나 할까.
김태경 씨를 부르려 했는데…. 어, 나도 그랬는데. 바쁘다네요…. 김태경은 도서출판 <이론과 실천> 사장. 최만수와 김태경의 관계는 남자끼리지만, 홍현숙과의 그것과 달리, '애인'에 가깝다. 최만수는 김태경과의 작업에 대해 '물론 돈은 안됐지만,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앞으로도 그런 클라이언트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라 한다. 김태경은 최만수에 대해, 이랬다. 물론 책을 계속해서 여러 권을 하다 보면 마음에 안 드는 표지가 나오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럴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아야 되요. 디자이너와 전체적인 미적 기조가 맞으면 되지, 그 기조가 실현되는 순서까지 맞을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렇게 넘어가면 다음 책은 반드시 마음에 꼭 드는 디자인 '작품'이 나오고, 책을 여러 권 낸 후에 보면, 마음에 안 들었던 표지도 전체 기조에 한데 어울려 드는 거죠…. 마치 오래된 부부의 인생 설계 같지 않은가.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가, 세상 사는 맛이 사사건건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굳어진지 오랠 정도로 음식에 대한 미감(味感)과 디자인에 대한 미각(美覺)이 거의 국제적으로 까탙스러운 그가 겉보기엔 순딩이지만 속은 못지 않게 고집스러운 최만수와 그런 관계를 이루는 것 또한 '예술의 좌파'적이다. 그런데, 味覺과 美感이 맞나? 김태경과 함께 책을 논하며 음식을 같이 하면 아름다운 디자인을 먹는 건지 맛있는 음식을 디자인하는 건지 헛갈릴 때가 있지만, 헤어진 후 되새겨 보면 그 헛갈림은 희귀한 맛의 책 '내용'으로 전화되고, '내용'에 필적할 만한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왈칵 일곤 한다. 그 욕망을 아직 실현하지 못했으니, 나는 여전히 최만수와 김태경 사이에 낀 모종의 훼방꾼인 셈이다. 아, 그러고 보니 김태경에게도, 지금은 늦동이 낳고 집에서 살림하지만, '최만수의 홍현숙' 못지 않은 황경희가 있었구나. 그녀는, 책 내용을 꼭 읽고나서 디자인 편집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책을 읽다가 좋다는 '느낌'이 들 경우 그 '느낌'이 디자인으로 실현될 때까지 자신을 학대하는 스타일이다.
<이가솜씨>는 '뿌리깊은 나무'로 상징되는 디자인 혁명을 80년대에 두루 걸쳐 전반적으로 일으켰다.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로 대중화된 그 '혁명'은 84년 뿌리깊은 나무 팔도소리 시리즈, 86년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시리즈, 89년 뿌리깊은 나무 산조전집과 한반도의 슬픈 소리 시리즈 등 음반 디자인을 통해 가장 드높은 아름다움에 달했다. 이 디자인은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부당하게 천대받거나 당국의 '무형문화재' 정책으로 박제화하던 한국 전통음악에, 원래의, 그리고 새로운 전아성(典雅性)을 부여했다. 이 시리즈와 한번 마주치고 난 후에도 국악 전통을 낡고 비루한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힘들다. 시각적으로 뿐 아니라, 벌써 청각적으로도.
같은 시기에 최만수의 <끄레 어소시에이츠>는, 특히 김태경의 <이론과 실천> 출판물과 연관하여, 인문 및 사회과학 분야에 '디자인 혁명'을 진행시켰다. <이가솜씨> 보다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뿌리깊은 나무' 시리즈 장정은 고동색에 가까운 붉은 색이고, 신문명조체가 주조지만 제목은 목판체에서 개인 서체로 바뀌었다. 최만수는 '무채색' 기조고, 제목도 신명조체 기조다), 게다가 예술(국악)이 아닌 사회과학 분야에까지, 심지어 마르크스 <자본론>에까지. 이 최만수 디자인, 혹은 '이실' 디자인은 여러 명품을 내면서 뭇 출판사들의 요청에 시달렸는데, 한 때 '김태경이 디자이너를 숨겨놓고 있다.'는 볼멘 소리가 들렸을 정도다. 현재 <끄레> 디자인은, 대세다.
<자본론>이라…. 바흐 음악이 '음악으로 돌아가는 음악'이듯, 최만수 디자인은 '디자인으로 돌아가는 디자인'일 터. 또, 그의 이철수 판화 디자인은 판화 자체가 디자인으로 되는 디자인일 터. 그 디자인과 <자본론>의 만남은, 어땠을까? 엥겔스는, 다소 거칠게, 사회주의란 '산업화에 세익스피어의 문체를 합한 것'이라 했는데, 나는 그 책 디자인을 보면서 <자본론> 이후 100년 동안의 세계 변화에 대한 인식의 공백이 뼈아프게 느껴졌다. 당시 <자본론>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낡고 비루'하기는 커녕 은밀히 읽히면서 '신화성'을 더해가던 중이었다. 그 신화는, '지하화'하면서, 1980년대 남한을 1900년 쯤의 러시아와 혼동시킬 우려가 애당초 있었고, 바야흐로 우려가 현실화하던 중이었다. 최만수 디자인의 멀쩡한, 멀쩡함의 아름다움은, 그 혼동과 공백, 혼동의 공백, 그리고 혼동=공백을 슬픈 아름다움으로 드러냈던 것. 그때 디자인은, 사회주의적이며 <자본론>보다 사회주의적이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생전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며 이론의 신화화 현상을 질타했던 것과 같다. '민주적'과 '민중적'과 '노동자적'과 '통일지향적'과 '해방적'이 '폭발적'이었으되 끝내 '혁명적'이지는 못했던 우리들의 80년대 현장 운동은 대체로 이같은 '아름다움의 아픈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아름다움을 학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던가? 아니다…. 레닌이 이미 말했다. 사회주의 문화는 역사적 단계의 진보적인 문화, 즉 '진보적' 귀족문화와 '진보적' 시민문화에 새로운 노동자 삶을 합한 것이다… 이때 '진보적 문화'란 클래식, 즉 고전문화에 다름 아니다. 고전문화를 보존하고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노동자 계급 만이 완수할 수 있는 사명이다.…. 레닌은 또 그렇게 덧붙혔다. 그 레닌도 동상이 무너졌고 현실 사회주의는 멸망했다. '아름다움의 충고'가 당대의, 그리고 미래의 사회주의를 위해, 현실주의적으로, '내용화'해야 하는 까닭이다.
최형은 좌파의 첨단에 있어, 그거 알아요? …. 갈치회가 입안에서 살살 녹고 술이 오르고 홍현숙이 얘기하는 듯, 최만수가 얘기하는 듯, 아니면 내가 얘기하는 듯, 누가 얘기하든 상관없이 얘기가 그렇게 '미(美)와 미(味)', '안주와 술', '얘기와 음식'의 혼동으로 기분좋게 뒤섞였다. 조금 늦는다던 사진담당 전홍기혜 기자가 꽤 늦는가 싶더니 프레시안 기자들 서넛을 우루루 몰고 왔다. 집을 옮겨 차수를 늘여야 겠군. 근데 큰 일 났다. 초상집 가야되는데…부친상을 당해 미국에서 10년 만에 귀국한 친구를 본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들 판인데…. 술을 많이 먹게될 게 뻔하니까요, 그렇게 만나자마자부터 엄살을 떨던 최만수도 선뜻 2차까지 갈 눈치다. 광고 디자인은 물론 예술이지만, 끝내 자본주의적이라는 슬픔을 벗지 못한다. 북디자인은, 책의 내용만 좋다면, 그 슬픔을 '좌파적'으로 역전시킬 수 있다. 아름다움은 형식인가, 내용인가. 철학이 내용이라면 문학-예술은 형식이다. 그러나 그 전에, 철학은 신학의 형식이고 신학의 형식은 성(聖)인데, 성은, 그 자체로는 성(性)과 마찬가지로 내용이 없다. 오죽하면 예수가 '육화'했겠는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노자의 도(道)가 그렇고, 불교의 공(空)이 그렇고, 힌두교의 가상현실론이 그렇다. 눈에 보이는 물적인 세상의 흐름이 진보적일 때 아름다움=디자인은 그 결과로서 형식인 동시에 의미다. 그렇지 못할 때 아름다움은 제 스스로를 '판화'하는 내용인 동시에 전망이다. 이때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좌파다. 마르크스와 동시대인으로 살면서 문학과 예술의 어법을 철학 속에 끌어들였던 니체 철학의 일부는 우파적, 혹은 '문학-예술'로 인한 탐미주의 때문에 더욱 극우파적이다. 문학-예술의 '형식' 자체를 철학의 내용으로 전화시킨 들뢰즈는, 철학적으로 니체의 후예고 심화지만, 현실 사회주의 멸망 이후 신자유주의적 혼돈=텅빔이 횡행하는 지금, 그의 철학은 일체 좌파적이다. 이 말을 디자인 예술 어법으로 번역하면, '최만수의 디자인 미학은 좌파적이다.'로 된다.
감격과 좌절의 80년대. 그때 내 첫 직장은 '정병규 사단', '북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대중적으로 확립한 정병규와 조의환, 서기흔, 그리고 임혜봉이 포진했던 <홍성사>였다. 근무한 것은 3개월이 채 안되지만, 이때의 인맥으로 나는 내가 그후 관계하게된 온갖 공개단체(공개운동 단체를 나만큼 다양하게 경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의, 기관지의, 표지를 꾸미면서 '유료화'를 감행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직장 <범양사>에서 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논리를 '초월'한 현대물리학과 동양(=종교)적 시공 '혼동'을 일체 등식화한 <동양사상과 현대물리학>, 그리고 <춤추는 물리> 등을 편집했다. 근무한 것은 역시 3개월이 채 안되지만, 이때의 '경험'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논리 공황 상태를 견디는 사전 연습으로 효과가 있었다. 세 번째 직장은 <길벗>. 근무한 것은 두 달이 채 안되지만, 계엄사령부의 사전검열을 거부하느라 출판 기회 놓쳤던 '이념서들'을 수소문해 펴내는 와중에, <이가솜씨>에서 받아 온 출판사 로고와 책 편집 기준(목차, 큰 제목, 작은 제목 등의 서체 및 크기, 활자 배치 등등) 비용이 엄청난 것에 놀랐고, 그 정도의 미학적 원칙을 적용했는데도 책의 모양새가 확 달라지는 것에 놀랐던 '2중 경악의 경험'은, 그후 직장 생활 없이 가열차게 혹은 지루하게 이어진 공개운동단체 활동에서 민주화운동도 프로가 제값 받으며 해야 한다는, 그게 '좌파적'이라는 원칙을 내내 고수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아동출판에 새바람을 일으켰던 웅진출판사 <어린이 마을> 시리즈 디자인을 주도한 박혜준은 글쟁이한테 좋은 디자이너가 얼마나 힘이 되는가를 내게 느끼게 해준 장본인인데, 그녀는 훗날 <노동자문화 운동연합>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충격과 감동, 그리고 자체 분열의 80년대. 그때가 끝내 '혁명적'이지 못했던 이유가, '아름다움의 충고'를 듣지 않아서 였다는 얘기가 아니다. 뒷 항목은, 앞 항목의 한계를 미학적으로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 후 10년이 더 지난 지금, 정치가 예술을 '동원'하려하기 보다는 ('예술적'이 아니라) '예술의' 좌파의 (창작)방식을 정치에 적용하려 애쓰는 방식으로 '정치와 예술'의 관계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근데, 너무 떠들었네. 술판은 어느새 2차, 3차를 거쳐 90년대식으로 이쁘고 60년대식으로 걸쭉한 '주모'가 있는 인사동의 한 길모퉁이 술집으로 옮겨와 있는데, 최만수는 어느새 없다. 어디까지가 최만수 얘기냐. 아니, 내가 혹시, 최만수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나는 '끄레들'을 사진찍지 않고, 그들의 일원'으로서' 내 안의 최만수, 최만수 안의 나를 그냥 '판화'하고 싶었으니까.
ps. 어제(17일) 이인제가 사퇴했다. '노풍'은 흥미롭고, 사퇴는 안된 일이다. '이념 논쟁'이 시들해졌다. 그런데, '너, 좌파다.'에 '나, 좌파 아니다.'가 이념 논쟁이면 '좌파=몹쓸 것'은 대전제란 얘긴데, 좌파가 홍어좆이냐, 이런 씹, 쉐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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