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리스키(risky)한 경우를 상정했는데 그게 현실화되고 있다. 노 후보의 상승속도가 평상적 예측을 뛰어넘는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가닥이 안 서 있다. 급격한 구도 변화에 대응할 전략구상 시스템이 굴러가고 있지 못하다는 걸 솔직히 시인한다."
21일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노무현 태풍' 앞에 망연자실하고 있는 한나라당 상황을 이렇게 털어놨다.
거세게 부는 '노무현 바람' 앞에 한나라당의 갈 길이 험난해졌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고문이 이회창 총재를 크게 앞선 것으로 드러나면서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대책 마련에 부심이다. 노 고문의 급부상이 더 이상 '찻잔속의 태풍'이 아니라는 경각에서다.
특히 '이회창 대세론'의 배경인 영남권에서조차 노 고문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있어 당내 일각에서는 '당을 비상체제로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빌라 파문'과 당내 갈등으로 급속하게 악화된 여론은 곧바로 노 고문의 상승 요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누구보다 한나라당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당 안팎의 목소리는 높지만 '노풍(盧風)' 차단을 위한 동력 마련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악재는 많고, 또 이 총재가 내놓은 수습책도 미흡하기 때문이다.
"이 총재 수습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 이 상황에서 총재도 보호하고 노무현 대책도 마련하는 2중의 과제가 매우 어렵다. 대안을 운반해 나갈 룸(room)이 좁혀져 있다." 한나라당 전략팀의 솔직한 고민이다.
***영남권 지지기반 크게 동요**
한나라당으로서는 최근 2주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 고문이 이 총재를 추월, 연일 격차를 벌이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당혹스럽다. 특히 당 내부에서는 영남권에서의 지지율 반전이 심각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지난 19일 중앙일보가 전국 성인남녀 1천8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자체 여론조사 결과 노 고문은 지금까지의 여론조사 중에서 가장 높은 55%의 지지율을 보이며 이 총재를 따돌렸다. 33.6%에 머문 이 총재와의 격차는 무려 21.4% 포인트.
박근혜 의원을 대입한 3자 대결에서도 이 총재(32.4%)는 노 고문(44.5%)에게 12.1% 포인트 차로 뒤처졌다.
더욱이 지역별 조사 결과 부산/경남 지역에서조차 이 총재(43.1%)가 노 고문(46.8%)에게 3.7% 포인트 뒤처진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일주일 전인 10~11일에 실시된 같은 조사에서 이 총재(59.2%)가 노 고문(29.3%)을 여유있게 따돌린 점을 감안하면 급격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영남권에서 노 고문 지지율이 수직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지역 의원들 사이에 '노풍'이 대선은 물론 6월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노 고문이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 영남의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할 경우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부산 지역의 한 의원은 "노 고문이 후보가 될 경우 지방선거에서 작심하고 치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며 "영남권의 핵심지역인 부산이 흔들리면 영남권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같은 노 고문의 급부상에 대해 이 총재는 20일 기자간담회에서 "대선까지 뭉게구름도 나오고 하얀 구름도 나오고 갖가지 상황이 변화하기 마련"이라며 다급한 속내를 감췄다.
이 총재는 이어 "우리 당은 흔들림 없이 한 방향을 지향하는 힘과 저력을 갖고 있다"면서 "(민주당 후보가) 누구로 결정되건 우리 당의 믿음과 실력으로 국민에 직접 호소, 선택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 악재가 노 고문 호재**
그러나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난 노 고문의 파죽지세가 '빌라 파문', '원정 출산' 등 이 총재가 처한 악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데 한나라당의 고민이 있다. '서민' 대 '귀족'의 대결이라는 인식이 확산될수록 노 고문의 상승세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 이 총재의 한 측근은 "이 총재가 그동안 쌓아올린 입지가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데 대해 상당한 위기감을 갖고 있다"고 당내 분위기를 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내 비주류 세력과 소장파들은 이 총재의 독단적 당 운영에 대해 비판의 수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급기야 20일에는 김원웅 의원이 충남도지부 정기대회에서 이 총재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다 중도에 단상에서 내려온 일도 벌어졌다.
김 의원은 이날 "4년 전 당 경선에 참여했던 이홍구, 이수성, 김윤환, 이인제씨 등이 잔류하지 않고 다 탈당한 것은 이 총재의 포용력이 부족한 때문"이라며 "미래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당의 위기를 총재가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풍' 차단 대책 마련에 부심**
당 안팎의 악재와 맞물린 노 고문의 급상승을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한나라당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이에 한나라당은 이 총재의 가족과 재산문제에 대한 명쾌한 정리를 통해 빌라 문제 등으로 형성된 따가운 여론을 순화시켜 나간다는 전략을 내놓고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또 "노 고문의 서민적 이미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면서 노 고문의 정치적 성향과 노선 등에 대한 반대여론 형성, '노풍' 대책을 수립해 나갈 것임을 예고했다.
또한 노무현 후보를 김대중 대통령과 연결시켜 반DJ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 전략도 중요 대책이다.
실제로 한나라당 대변인단은 논평을 통해 "민주당 경선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며 '노풍'의 배후에 '김심'이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했으며 노 고문의 정계개편 발언에 대해 '정권 핵심과의 사전교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노무현 후보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이미지를 덧씌워 흔들리는 영남정서를 잡겠다는 계산이다.
한편 이 총재의 당 내분 수습방안 발표에도 불구하고 비주류와 소장파의 반발이 계속되고 여론의 호응도 받지 못하는 점을 감안, 조만간 이 총재의 대선후보 출마 선언을 계기로 이를 만회할 수 있는 다각적인 방안을 검토중이다.
이와 함께 당 내분이 수습 되는대로 국가혁신위 종합보고서 발표회를 잇따라 갖고 향후 국정운영의 기본틀과 비전을 제시할 예정이다.
***'노풍'이 거품이 아니라 '이회창 대세론'이 거품 될 수도**
그러나 현재 한나라당이 내놓은 위기 타개책으로는 정가를 휩쓸고 있는 '노풍' 차단에 당분간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우선 이 총재의 '빌라 파문'에 대한 여권의 공세가 늦춰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급속도로 악화된 국민 여론도 이 총재에 대한 정서적 괴리감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럴수록 노 고문의 상승세는 상대적으로 가파르다.
당 내분 사태도 수습이 요원해 보인다. 오히려 "대선구도 및 전략과 관련해 궤도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당내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여당의 국민경선제 성공에 필적할만한 5월 경선 바람몰이도 기대난망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노풍'이 거품이 아니라 '이회창 대세론'이 거품이라는 주장이 수면위로 떠오를 수도 있다. 한나라당과 이 총재의 앞 길이 험하디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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