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8>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8>

방화(放火)에서 사유(思惟)까지-계간 <당대비평> 주간 문부식과, `흑맥주`를 마시며

예, 좀 헤매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허허, 큰일 났네요…. 문부식이 벌써 세 번째 전화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화려한 역삼동 술집문화에도 물론 뒷골목, 혹은 옆 골목은 있다. 5감과 연관된 온갖 형용사들 중 요란한 것만 한데 뭉뚱그려 덩어리로 만든 듯한 강남의 유흥 풍경이지만 자정을 한 두 시간 넘기면 신세대들은 더 밝은 곳을 찾아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서 다소 풀이 죽고, `거대한`과 `화려한`과 `은밀한`을 기상천외하게 공존시킨 룸살롱 문화는 장급 여관이나 호텔로 가지 않는 한 `그후`를 이곳에서 펼친다. 선지나 굴해장국, 혹은 소 대창-곱창 혹은 갈치조림, 간장 게장 등의 메뉴를 여닫이 문 창에 써놓고 새벽 6시까지 영업을 하는 밥집 겸 술집들에서 룸살롱 `동생들`과 웨이터 `오빠들`이 마주 앉아 그날 하루를 정리하는 장면은 주변에 대해 위악적이고 더 노골적이지만, 그럴수록, 정말 가슴에 묻어서라도 덮어주고 싶을 만큼 물컹한 데가 있다. 아 그 새끼 정말 저질이데, 안 만지는 데가 없어, 씨팔…. 야 이년아, 니가 꼬리를 살살 치더구만 뭘 그래?…아니, 그게 아니구….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흐윽. 오빠. 나 정말, 오빠 사랑해….` 그러면서 여자가 눈물을 펑펑 터트리고, 그제서야 남자가 씩씩 분을 삭히는 걸로 끝나는데, 나는 그 장면이 내일도 모래도 계속될 것 같고 그만큼 여성해방도 남성해방도 눈물 그렁거릴 뿐 요원해 보이는 것이다. `뒷골목-곁골목`도 그 장면을 덮어주고 싶은 것일까? 내가 근무하는 한국문학학교가 위치한 이 길은 분명 일직선이고 뒷-곁길치고는 꽤 넓고 `특허청길`이라는 명칭도 엄연히 있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마다 헤매지 않는 경우가 없다. 하긴 출근을 하는 나도 그렇다. 테헤란로의 한 중앙인 특허청을 끼고 우회전을 하면 곧장 60년대 마포 공덕동 같은 `과일 구루마` 풍경이 펼쳐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 거기서부터는 평당 임대료도 `현란하게` 낮아진다. 문부식은 그 길을 헤매고 있다. 그건 예상했던 일인데, 그를 왜 이리로 불렀을까. 그의 주 활동지역은 <당대비평>의 홍대 앞이고 거긴 내 집과도 가까워서 그곳이 훨씬 더 나았을텐데, 왜 10시 가까운 오밤중에 그도 멀고 나도 먼 이곳으로? 그래. 흑맥주를 마시고 싶어서였다. `나막스(은대구포 구이) 안주 싸게, 두꺼운 걸로 잘 튀겨내`는 술집이라면 서슴지 않고 단골집 삼고 동료들은 물론 `휘하`(이것은 조폭들의 최신 용어다. 저는 형님 휘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끝까지 따르겠다는 뜻.) 술 후배도 반강제로 모아들이는 소설가 김원일이 며칠 전에 소개해 준 집 흑맥주가 참 맛있었다.

그런데, 그것뿐인가? 1년에 한두번 만나는 정도지만 일단 만났다 하면 별 이견 없이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이건 내가 80년대 말 만남 초기에 대체로 새벽 3-4시에 그와 우연히, 물론 술집동네에서 만났던 것과 크게 연관된다. 통금 이후 술집 영업이 금지되었던 그때, 그는 `몰래 영업집` 찾아내는데 귀신이었다) 마시는 편이지만, 그렇기로 단지 `맥주 맛` 때문에?… 그러고 있는데 오랜만에 전화가 통한 천관호가 먼저 들어선다. 흐음. 같이 만나게 하면 일단 재밌겠구만…. 잠시 이 사람에 대해 한마디 하자. 그는 내 (보성)고등학교 1년 선배인데 재수하여 같은 학교 같은 학과를 같은 학년으로 같이 다녔다. 이런 경우 서로 웬수가 되거나 아주 친해지거나 둘 중 하나고, 후자의 경우는 선배가 정말 착하디착한 경우에(만) 가능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나같이 성질 더럽고 시건방진 후배를 만났다면 더욱 그러할 터. 그는 얼마나 착한 사람인가. 중소기업사장인 그는, 그도 IMF 때 부도를 맞고 내고 그랬는데, 채권자들 대다수가 빚 독촉은커녕 그의 업체 `살리기`에 나선 것은 어려울 때일수록 흔한 미담 중 하나라 하겠지만, 25년 전 그가 아르바이트로 가르치던 여학생의 아버지까지 나서서 돈을 마련해 주었다면 거의 `착함의 기인`이라 할 만 하지 않겠는가. 위궤양을 앓은 흔적 때문에 약간 어두운 얼굴을 마냥 착한 웃음으로 펼 때면 영락없는 서영춘 표정이다. 어쨌거나, 그는 나에게 일종의 화두다. 전혀 주장이 없는 그의 `착함` 앞에서 나의 어설픈 노동운동론은 늘 난색이다. 문부식? 부산문화원 방화사건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다. 예, 그 친구…. 하하 정말 재밌겠구만. 오늘. 근데, 왜, 웬, 흑맥주? 그 의문은 문부식 본인이 오고 대화가 진행되면서 완성되고, 풀렸다. `흑맥주`는 바로 `미국 문화원` 옆에 있었던 것. 술을 자주 많이 마시기는 하되 여러 종류를 `즐기`지는 않는 `단순무식형`에, `술은 정신과 연관되므로 비싼 술이 맛있을 수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병맥주보다 생맥주를 즐기는 `막무가내파`인 내게 `흑맥주`라는 말은 아름다운 여인의 알몸보다 더 고혹적인, 맛은 알되 그러므로 더욱 범접하지 못하는 술맛의, 알몸을 풍기는 단어다. 친구놈이 아르바이트 월급 탈 때나 얻어먹을 수 있던 명동의 카이저호프나 뢰벤브로이의 생맥주 시절, `흑맥주`는 그보다 조금 윗길로 잠깐 시판되었다가 사라졌다. 그때 잠깐 거의 기적적으로 맛보았던 그 맛. 생맥주보다 독하고 독한 바로 그만큼 그윽하고 텁텁하면서도 고급스러웠던 그 맛과 `흑(黑)`이라는 글자가 어울리면서 이뤄내는, 사랑과 죽음의 낭만적 일치감. 몇 년 전부터 흑맥주가 거의 범람하다시피 했지만, 나는 `흑맥주`(라는 말) 앞에서` 늘 경건하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절, 광화문에 있던 `미국 문화원`은 내 낭만의 사치스런 보금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당연시했다. 미국은 무엇보다, 70년대 운동권의 보루였다. 징역을 살면서, 혹은 오랜 수배생활을 하면서, 아니 근근이 단체 살림을 꾸려가는 사람들조차,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이 집권하기를 고대했던 사람들은 90%가 넘는다. 수천명이 희생된 광주항쟁의 영광,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등장이라는 현대사의 치욕을 겪고 나서야 미국의 정체와 본질은 의심받기 시작했다. 문부식은 그 유명한 82년. 3. 18.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모자. `부미방`사건은 최초의 반미-가해(加害) 사건이다.

고려신학대 학생 문부식, 김은숙, 김영현, 부산대학생 최인순, 김지희 등이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하고 문화원 및 유나백화점, 국도극장 등에 삐라-유인물을 살포했다. 현장 주동자에 여대생이 섞인데다, 방화로 인한 사상자가 난 이 사건의 파장은 컸다. 전국수사기관에 비상근무령이 내려졌고 하루 7만명의 경찰이 주동자 검거에 동원되었다. `전장병과 예비군 및 예비군 소속 직원들`까지 수사에 적극 협력하라는 국방장관 특별명령이 시달되었다. `운동권`도 놀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초강경파였던 4. 19 세대 이부영(현재 국회의원)은 `반미라…. `하며 당혹을 누그러트리려 했지만 얼굴에 핏기가 가셨고, 유능한 쪽으로 능글맞기 짝이 없었던 함세웅(신부)은 `자수를 주선한` 모 신부 이름을 들먹이며 `벼엉신 같은 놈. 쪼다 같은 놈. ` 신부답지 않은 육두문자를 날렸으나 그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채광석(문학평론가. 작고)은 뭔가 신이 난 듯 함지박 웃음을 `하아 핫핫` 마냥 키웠지만 그도 `새로운 경험`을 만끽할 뿐, 뚜렷한 방향이나 대책은 갈팡질팡 속수무책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김대중 정권이 `친미적`(물론 한나라당은 한술 더 떠 `복미적(伏美的)`이라는 주장이 팽배한 채로 `반미`가 거의 유행이 되었다. 아니 스포츠신문들이 앞 다투어 반미에 열을 올린다. 백주대낮에 편파판정으로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빼앗긴 김동성 사건으로 스포츠-연예계에서 `반미`와 `황수정 마약 스캔들`은 똑같이 절호의 기사거리다.

그런데, 그 안에, 문부식이 없다. 아니, 그런 분위기 속에 문부식이 불편하고, 심지어 무관해 보인다. 왜 그걸까? 그는 반미운동을 포기했는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리고 그가 주간하는 <당대비평>은 논리에 있어서나 기사취재력에 있어서나, 세계 최고수준의 `반미` 잡지다. `논리`가 최고인 것은 영미는 물론이고 프랑스-독일의 `반미` 논리가 자본주의적 자체 모순을 벗지 못하는 까닭에 가능한 일이고, 기사 취재력이 최고인 것은 `제3세계권`(이란 말이 아직도 통용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으나)의 잡지에서 그만한 시야를 갖춘 잡지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즉, `한국적` 상황을 `세계적`으로 유리하게 활용한 결과다. 아니, 조금 더 나가도 되겠다. <당대비평>을 통해 비로소 `반미선언` 혹은 `반미론`이 `반미`의 이론적 실천과 실천적 이론의 학문으로 생체(生體)-체계화한다. 거기서 그치는가? 당연히 아니다. `반미`가 소재주의에 머물지 않고 `안티(anti)`에 매몰되지 않고 인문-사회과학 전체를 `실천화하면서 심화`한다. 이 작업은, 학문과 대중문화가 공히 천박해지고 그 경계가 천박해지고 천박에 대한 비판이 더욱 천박해지는 상황을 단호하게 거스르는 용기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반미운동을 비롯한) 모든 운동권의 병폐를 극복하려는 주체적인, 매우 진귀한 전망-창조 행위이기도 하다. 즉, 내가 보기에, 그는 `천박화`의 속도에 맞추어, 아니면 속도를 가속화하면서 지식이 `정보의 홍수`로 폭발하는 까닭에 더더욱 개념도 용도도 실체도 폐기되어 버릴 위기에 처한, `지식인`이라는 보통명사를 국어사전이 존치시킬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더 나아가, 이제껏 우리가 바라마지 않았던, 그러나 좀체 보기 힘들었던, 더더욱 몇 안 되는 지식인 중 하나다. `방화범'과 `지식인`이라. 이 말이 어울리는 것일까, 그는 개과천선한 것일까, 아니면 약해진 것일까, 아니면?…. 아니다. 모두 아니다. 그런 식의 질문은 운동사의 질곡들을 담고 있다. `문부식`이 내내 허물어트려왔던 그 질곡들을.

징역이야 뭐 그냥 살면 되는 거잖아요? 어쩔 수 없어 살기도 하고. 그리고, 5년까지는 뭐 이런 저런 힘든 생각도 하곤 했는데, 5년 지나니까 반은 꺾어졌다, 뭐 그런 느낌에 세월 가는 것도 좋고 아니면 말고 그렇더라고요…(5년이 반이라, 몇 년 형을 받았었지?) 어, 저, 사형 받았잖아요…. (그랬나, 1심에서?) 아니 대법 확정 판결 받았죠. 그때 대법관 중에 이회창(한나라당 총재)이 있었구요. 그랬다가 전두환이 대통령 되면서 감형하고 또 특별 감형하고, 노태우 때 또 특별 사면하고 그래서 나왔지요. …. 그랬구나. 난, 왜 그걸 몰랐지? 참 이상하네. 그러고 보니 더 근본적으로 이상한 것은 그가 `방화범`이었던 것을 내가 알았고 이따금씩 짓궂은 농담도 했지만 `왕년의` 방화범으로조차 `느껴본` 적이 없다는 거다. 그는 출감 후 처음 만났을 때 내게 시를 좋아한다고 정말 진지하게 토로하는(그는 현재, 적어도 나보다는 유명한 시인이다) 문학청년이었다. 그 다음은 같은 사건의 동료전사(戰士)이자 애인이었던 김은숙(소설가)과의 결별, 그리고 결혼 후 아내의 오랜 와병 등 실의의 나날들을 견뎠던 시절의 그는 (물론 잘 생겼지만) 약간 느끼하다 싶었을 정도로 `한량 끼`가 진한 백수건달이었다. <당대비평>을 시작하면서 그는 잡지 디자인 개념을 일신한, 단행본보다 더 세련된, 표지 및 내지 미학(디자인 업체 <크레>)과 땀내음과 유혈 당당한 남미 정글 혹은 아프리카 사막의 해방운동, 그리고 최고의 지식인 글을 결합시켰다. 그 결합은 성공했다. 그가 마련한 틀 속에 김우창(문학평론가)의, 모더니티의 격조를 갖춘 문장과 해방투쟁 혁명가의 육성이 공존하는데,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놀랍지 않은가. 운동이 세련을 버리고, 세련이 운동을 벗지 않을 수 없었던 질곡이 사라지고 세련이 운동을 향해 열리며 운동이 세련으로 깊어진다.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쓴 것은 `방화범`이라는 `말` 뿐, 실체도 역사도 기억도 아닐 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구세대가 신세대한테 한 방 맞는다는 것은 유쾌한 정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마운 일이라 할 만 하다.

징역보다야 잡지 내는 게 훨씬 더 힘들지요. 아니, 의외로, 딱히 돈 문제는 아녜요. 처음에 출판사에서 잡지를 내느냐 마느냐로 좀 실갱이를 했달까 신경전을 폈달까 뭐 그런 것 말고는 돈 문제는, 물론 늘 모자랐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학생운동 출신들이 정치권을 기웃대거나 주도하기보다는 학계로 더 많이 진출한다는 일본에서도 보기 드믄(왜냐면 이들은 대체로 `강단적`이다), 그리고 6. 8혁명의 주도자로서 훗날 철학계를 지배하는 들뢰즈-가타라와는 애당초 경우가 다른(왜냐면 이들이 추구하는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멸망 그 후`의 영역에 있다), 우리나라로 보자면 70년대의 <창비>와 <문지> 혹은 여러 진보적인 잡지들 경우 보다 훨씬 더 어려운(왜냐면 70년대는 `부상하던` 시기였고, 지금은 `퇴각하는` 시기다),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니, 그가 한술 더 뜬다. 제일 어려운 것은 필자란(筆者難)이예요. 90년대 들어 논의가 다양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무척 천박해진 면이 있거든요. 우리는 수준 높은 에세이를 원하는데 제대로 쓰는 필자를 찾기가 힘들고 그냥 딱딱하고 규격만 차린 학위 논문 같은 게 나오기 일쑤고. 기획을 해도 그 의도에 맞는 글을 받기가 힘들죠. 에세이라 그러면 잡문 취급이나 하고, 그런 게 아닌데…. 그는 한마디로, 지식 글에 있어 `사유의 부재`를 개탄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에세이란 전망을 향한 사유의 과정이 드러나는 글이다. 그렇다면 그의 진단은 잡지 경험자답게 날카롭고 질곡을 깨부수는 사람의 말 그대로 정곡을 아프게 찌른다. `잡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현 단계 우리나라 지식글 계에서 `에세이`는 쓰기가 가장 힘들게 되어있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그렇다. 인신공격은 물론 에세이가 될 수 없다. 에세이가 희망을 위한 것인 까닭이다. 자본에 좌우되는 상업주의 글쓰기는 물론 에세이가 될 수 없다. 에세이가 돈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연관이 있는 까닭이다. 일방적인 자기주장은 에세이가 될 수 없다. 에세이는 미래를 위한 반성의 방법론인 까닭이다. 울화통에 휩싸인 글은 에세이가 될 수 없다. 에세이는 자해의 공격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양식과 연관이 있는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아주 과학적인 논리를 갖추고 상대방의 주장을 귀담아 들으면서 장점을 제 것으로 취하는 모범적인 토론의 과정조차, 그것만으로는 에세이가 될 수 없다. 에세이는 그 과정을 포함하면서, 삶의 난해한 부분까지 포괄하는, 그런 식으로 미지를 이해하는 예술의 장르인 까닭이다. 작금의 풍토 속에서 그게 어떻게 쉽겠는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질문은 절충 없이, 이분법 없이 곧장 답변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이므로 가능했다. 태도나 입장 면에서 보면 작금의 지식인 풍토는 사실 운동사에서 예견되어왔고 준비되어왔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무슨 소리냐. 진정으로 주체(라는 말은 오해의 여지가 너무 커서 아직도 쓰기 싫지만)적인, 일 수 있었던 행복한 경우는 경험의 축적이 사유의 깊이를 낳는다. 그러지 않았거나 그럴 수 없었던 불행한 경우는 경험이 축적이 상투와 천박화를 낳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정으로 주체적`인 경우는 한국 현대사에, 아니 세종-세조 이래 너무도 드물었고, 그게 현대사의 비극이다. 한일합방이 주체적이었던가, 는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질문을 파괴한다. 김구의 생애는 한국현대사를 응축하지만, 응축이 전망에 가닿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극적이고, 비주체적이다. 아니 거창한 얘기 할 것 없이, 성명서 한번 내는데도 징역과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학생-지식인의 70년대나, 데모 한번 하는데 징역 혹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시민-노동자의 80년대, 더군다나는 , 그리고 90년대는 더욱, 성명서 데모 한번 하는데 징역 몇 년을, 심지어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고 법정 판-검사의 취조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던 시대에 주체란 말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 주체성의 싹을, 나는 문부식으로 하여 보았다. 베트남에서다. 이것은 그의 `방화`가 주체적이었다는 뜻? 아니다. `방화`는 역시 소재주의적 접근. 방화로 인한 사상자 발생의 불가피성/부도덕서 논의도 소재주의의 다른 이름인 이분법. 요는, 그가, 사건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도모했다는 점이다.

작가회의의 간부급 문인 10여명과 대산재단 외국문학 지원담당자, 신문기자1명, 출판사 사장1명, 그리고 유력한 잡지 주간 1명으로 베트남 공식방문단을 꾸릴 때 나는 주저없이 <당대비평> 주간인 그를 꼬셨고 그는 흔쾌히 응낙했다. 아, 베트남. 그곳은 현대문학을 4기로 나눈다. 이미 저명한 문인 자격으로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펜 대신 총을 든 1세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총을 든 2세대, 미국-제국주의에 맞서 총을 든 3세대, 그리고 신세대. 우리나라 사정으로 감안하자면 얼마나 피비린 문학인가. 그러나 1세대, 그리고 2세대는 마치 그 옛날 나를 그토록 귀여워해주시던 외할아버지의 표정을 그대로 닮았다. 3세대에 속하는 바오닌은 이렇게 말했다. 싸워보니 미국 놈들은 겁쟁이고 한국 사람들이 정말 무섭더라. 하지만 불쌍하기도 했다. 자진해서 온 것도 아니고 용병으로 끌려왔으니, 우리와 같은 약소민족 아닌가. 더군다나 위험한 지역이라고 미국 놈들은 한발 물러나고 일부러 용병을 투입한 것이었으니…. 바오닌은 서방세계, 특히 프랑스에 널리 알려진 작가인데, `베트콩 특공대 출신으로 몇백명 중 단 5명의 생존자 중 하나`라는 경력이 특이한데, 그것에 대해 또 바오닌이 말한다. 미친놈들. 특공대 출신인 것도 사실이고 희귀한 생존자인 것도 사실이지만 터무니없이, 전쟁 귀신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냐, 나는 주로 하늘에 대고 총을 쐈을 뿐이다… 그때 잘 생긴 그의 얼굴에 묻어난 표정은 정말 <전쟁의 슬픔>(그의 소설 제목) 자체의 그것이었다. 신세대들은 정말 잘 웃고 지들끼리 시시덕거리고 대충 엉기기도 하는 것 같은데 밝고 구김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그때 100년 동안의 제국주의 투쟁이, 주체적으로 승리에 가닿았으므로 또한 이룩한 너그러움의 치열한 폭과 깊이를 보았다. 그렇게 각 세대 대표 문인들이 한 10명씩 앉아 우리들의 도착을 기다리던 <문학동맹> 회의석상은, 정말 장관이었고 나는 온몸에 주눅이 들면서도 모종의 구원을 받는, 그러면서도 복종이 아니라 해방의 희열에 가까운 감정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 감정에, 자괴가 묻어났다. 우린 너무 엄살이 심한 것 아닐까. 너무 말만 요란 굉장해져 온 것 아닐까. 주체적이지 못했던 정황이 증오를 낳고 증오가 천박을 낳고 천박이 다시 증오를 낳고 (고달픈 서민의 일상에 비하면)한줌 밖에 안 되는 수난의 양을 떠벌리며 시대에 좌절하고 울화에 몸과 정신을 망가트리는 편협이 가슴을 찢어발기는 사태에 이른 것 아닐까. 그때 문부식은, 그 쟁쟁한 문인들이 아니라 바로 문부식이 그 장관에 어울려 보이다가 그 속으로 합류했다. 아하, 저런 저런. 나는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반미 유행`과 `반미 대중문화` 속에 불편한, 아니 무관해 보이는 문부식. 그렇게 그는 현대-운동사의 질곡을 극복했으되 또 하나의 질곡을 상징한다. 의미의 심화를 위한, 사유=에세이를 향한, 그리고 아름다운 전망(우리의 전망은 유토피아적이거나 장미빛인 적은 많았지만, 과학적으로 아름다운 적은 없었다)을 위한 그의 작업은 계속될 것이고 한참동안, 갈수록 더 고독할 것이다. 왜냐면 . <당대비평>은 잡지가 좀체 넘기 힘든 `마의 4천`부수를 일찌감치 훌쩍 뛰어넘었지만 시대는 바야흐로 사유를 향한 노력을 무시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경멸하기도 하는 시대다. `주체적일 수 없었던` 부류가 `주체적이고자 하는` 부류를 경멸하는, 절망이 희망을 경멸하는 무서운 시대다. 그러니, 그러므로 더욱, 그의 노력이 성공하기를.

ps. 정말 점잖네…. 천관호는 그렇게 저으기 안심하면서 `착한 사업가론`을 펼쳤고 문부식은 그것을 껴안았는데, 나는 베트남 개방정책의 한국적 현현을 본 듯 했다. 아, 흑맥주 정말 맛있구나야…. 근데,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니 만원짜리 한장이 툭 떨어진다. 문부식이, 되레 질문만 해대면서도 내내 나를 가르친 것까지는 좋은데, 언제 내 옷속에 꾸겨 넣었지? 모든 주머니를 악착같이 막았건만. 귀신같은 솜씨네 정말. 전혀 녹슬지 않았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