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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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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6>

설날, 아침밥상 같은 남자-국회의원 김태홍

`대중문화`를 왈가왈부하는 이 난에, 웬, 국회의원? 사진을 담당한, 그래서 괴물 형용의 나와 1주일에 한번씩은 울며 겨자먹기 데이트를 해야 하는 전홍기혜가 모처럼, 아니 나와 알게 된 후 최초로 얼굴에 의문부호를 그린다. 그럴 만 하다. 그녀는 짐승 고치는 수의사 장래 때려치우고 `사람 고치는` NGO 운동 경력의 소유자인데다 베타랑 기자니 `짐승 같은 사람`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므로, 평소 호기심은 몰라도 뜨아한 표정이 드믈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대중문화와 국회의원은 상극이므로, 의아할 것이 또한 당연하다. 왜 상극인가? 오늘날 국회의원은, 설령 대중문화 담당 국회의원이라 할지라도(그런 게 있기는 있나? 없으면 정말 문제다) 대중문화와 어울리기에는 너무 목에 힘이 들어갔다. 대중문화는 약간의 광기와 또 약간의 (좋은 의미의) 상스러움을 전제로 하는 것. 그런데, 국회의원들은, 날치기 통과 같은 일이 벌어질 때면 정말 그 행태가 진짜 날치기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평소 행동거지는 점잖고 온화하면서도 모종의 근엄함이 배어 있어서(왜 국회의원들은 모두 검은 양복을 입지?), 몸이라도 좀 난 경우에는 조폭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락그룹 <들국화> 헌정음반 발매 기념 공연 때 여러 축사가 있었지만, 어느 국회의원(내가 존경하는, 존경받을 만한 국회의원이다)의 화상 축사가 시작되니까 들국화 팬들이 그냥 어이없어 하면서 웃는 거라. 들국화 팬들은 나이도 50대부터 20대까지 고르고, `정치의식`이 높은 편이었는데도. 그러니, 저자가 미쳤나, 돈을 받아먹었나, 아니면 최소한 모종의 `청탁`을 거절 못한 게 아닐까, 안 그래도 선거철인데, 그예 사고 치는군…. 뭐, 그렇게까지는 (설마)아니더라도, 전홍기혜가, 프레시안 기자로서, 프레시안과 나 피차간에 호상간에 뜻 모를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할 터였다. 하지만, 들어가는 길이 복잡해서 엇갈릴까봐 아예 집으로 불러 같이 가는 차 안에서 전홍기혜는 내 말을 듣고 반쯤 수긍했다.

그리고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한 십분, 옛정을 생각해서(그와 나는 80년대 초 15평 사무실을 베니아판 하나로 가른 단체 사무실 각각의 실무책임자였던 시절이 2년 넘는다. 그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이었고 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국장이었다) 대낮에 한 잔 `거하게` 걸치러(자네하고 나하고는 운대가 맞는 것 같아. 하필 오늘 한가하거든…. 내가 다소 느닷없이 전화를 한 후 딱 두 시간 만에 만나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필`에 평생 동안의 막걸리에 쉰 듯한, 허스키한 웃음을 버무리면서.) 차를 타고 강서구 제주도 생물횟집에 도착, 그가 화장실에를 잠깐 다니러갈 때까지 약 15분후에는 완전히 수긍했다. 왜 저 사람 하려는지 알겠지?…. 그렇게 물으니 서른 살 먹은 토끼를 닮은 전홍기혜의 입과 코가 예의 안정된, 안심한 웃음을 다소곳이 편다.

무슨 얘기냐. 배삼룡을 `우라까이한`(뒤집은) 듯 `푸짐하게 못생긴`(내 표현이 아니다. 김태홍이 1999년 펴낸 책 <작은 만족이 아름답다> 표지용으로 박재동 화백이 그려준 캐리커처가 그렇다. 어쨌거나, 외모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충 설명한다.) 그는 의원회관 사무실로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 `여어, 왔군. 권총 기관단총 좌우에 차고…잘 왔어. 허허. ` 이렇게 웃을 때 그는 머슴(으로 말하자면 소설가 송기숙이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최후의 머슴`이지만 그는 소설가 이문구의 표현에 의하면 백제 유민이고, 훤칠한 미남이다)으로 환생한 부처님이라 할 만 하다. 그래. 머슴이라. 국회의원은 진정한 머슴이 될 수 있을까? 전회를 잇자면, 정치는 나이 먹을수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모종의 희망으로 답하고자 나는 그를 만나러 왔다.

전홍기혜의 명함을 건네 받더니 그가 `성씨가 둘이군. 아버님이 전씨인가?` 그렇게 묻는다. 어머님이 전씨라고 하자, `호오. 신세대군.` 그렇게 답했다. 프레시안? 뭐하는 신문이야?…. 경력이 오래된 기자들이 사표를 내고 모여서 만든 거죠…호오. 인디펜던트(신문이구만? 돈은 어떻게 하고? 유료화를 하려고 하는데, 시기를 보고 있나 봐요…. 호오. 네이션 지구만. 거기도 늘 적자인데 후원자들이 많지. 편집권이 절대 독립되어있구. 그래서 명문 지로 된건데. 난, 느즈막히 뭐 하겠다구 결심하고 직장 때려치우는 사람들 보면 정말 부럽고 존경이 가….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코메디의 여유가 몸에 배인, 아니 배포 큰 웃음이 육화된 듯한 그가 진심으로 말할 때는 눈에 약간의 물기가 어린다. 그리고, 그럴 만 하다. 내가 알기로, 그는 아무리 애국심과 혁명정신이 투철하고 충일한 자라도 뒤로 물러서거나, 투쟁성을 더 높이는 식으로 돌파=회피하기 일쑤인, 재정(財政) 문제의 최강자다. 그를 보면 마치 어려운 단체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운명인 혹은 종교인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권 재정으로 말하자면 돈 많은 사람한테 돈을 `많이` 뜯어내는 방식도 간편하고 훌륭한 일이겠으나 결국은 3류다. 일류는 정기 회비 납부자를 늘려가는 능력. 그 능력이 있어야 재정이 강화될수록 조직이 강화되는 황금률이 그 능력에 의해 가능해진다. 아니 나는 감히 말하겠다. 어느 운동이건 재정의 어려움을 모르고, 그 어려움을 돌파한 경험이 없는 한, 낭만적이되 끝내 혁명적이거나 본질적일 수 없다. `명망가들`이 단체의 주축을 이뤘던 80년대 초 그는 홀연히 나타나 운동권에 웃음과 재정의, 놀라운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유명한 <말>지를 창간한 주역은 성유보(언론개혁 시민연대 공동대표)다. 그러나 그 <말>지에 `생애`를 부여한 것은 단연 김태홍이다. 그가 사무국장을 하는 동안 천부를 밑돌았던 <말>지 발행부수는 십수만부에 달했다. <언협> 사무국장이면 당시 최고의 명망을 발하던 직함 중 하나지만, 그는 대중 앞에 나서는 걸 꽤나 부끄러워했고(그의 표현에 의하면 `아는 것도 없고 또 못 생겨서`), 내내 지방출장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주치면 꼭 술 한 자리 챙겨주면서 마냥 행복해 했다. 정작 나보고 고생이 많다면서….

고통을 많이 받을수록 은총이 더하다는 것을 믿는 한 카톨릭 수녀가 평생을 피학증세로 살았으나 정작 예수가 선택한 것은 마냥 즐겁게 뛰어놀던 다른 수녀였다.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피학증의 수녀가 물으니 예수가 말한다. 그녀의 허벅지를 보거라…마냥 즐겁던 수녀의 허벅지는 고름투성이었다. 보아라. 그녀는 고통을 고통으로 알지 않았다…. 그와 비슷하게, 김태홍이 말한다. 나는 언협 때가 제일 행복했고, 빛났고, 한겨레신문(광고 이사) 때가 제일 비참했어. 재미없고, 괴롭더라고. 지금은 내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고…. 나는 김태홍을 만나기 전에도 후에도 수금이 주업무(였)지만, 김태홍을 만난 후 수금의 괴로움이 즐겁다. 그뿐인가, 그를 만난 후 나는 내가 맡은 단체가 계급성이 분명할수록, 후원금 제도부터 없애 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몇 년 전, 세상사는 게 좀 시들했을 때, 성유보가 무슨 당 발기위원으로 서명을 해달라기에 `형. 난 요즘, 도무지 발기가 안돼.` 그렇게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 성유보를 민망하게 만든 일이 있다(이 자리를 빌어 죄송). 김태홍이 부탁했으면, 했을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가 그런 부탁을 할 리가 없다. 그는 `고통분담파`가 아니다. 그는 고통은 당하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고, 행복은 나누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있는 놈이 없는 놈한테 주는 게 좋다는 파다. 그렇게, 그는 수금의 고통은 혼자 지고 성취의 기쁨은 특히, 옆 사무실의, 똑 같은 처지의 나와 나누었던 것일까? 물론 이것은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나도, 그때가 그립고, 고(故)송건호 선생, 이영희(한양대 교수), 임재경(전 한겨레신문사 부사장), 이부영(국회의원), 김종철(전 연합통신 사장) 등 `언협` 관계 사람들과 `나이를 잊고` 술벗하던 시절이 그리운데, 그 그리움의 아우라 혹은 아로마가 바로 재정 담당 김태홍이라는 거다.

난 말요, 열 받으면 아직도 맞장 뜨는 편이지만, 횟집 주방장하고는 안 싸워. 매일 식칼로 살점 도려내는 직업인데, 큰일 나거든. 신촌에, 밤 12시쯤 되면 사람들이 그냥 미쳐버려. 아연 살벌하지. 벌이가 강남은 언감생심인 치들이 신촌으로 몰려들었다가 대학생들 시시덕거리는 거 보면 눈알이 확 돌아가거든. 그러다 지들끼리 싸우는 거야. 이때가 되면 포장마차에 비상이 걸려요. 식칼을 지키느라고. 식칼 쥔 놈이 이기는 건 좋지만, 누구 식칼이냐, 이게 골치 아프다 이거요…. 오래 간만에 한 수작 하고 싶었을까? 도전을 하듯 그렇게 농을 건네니 김태홍이 병아리를 귀엽다며 우악스런 손으로 쓰다듬는다. 요즘 깡패들은 참 이상해. 상대방이 칼을 들면 그렇게 신나 하더라고. 이건 완전 `어서옵쇼!'라니까. 평소 웃음이 실실하지만 아주 가끔씩만 킥킥댈 뿐인 전홍기혜가 이 대목에서 크게 웃었다. 그건 그렇게 놔두고 김태홍이 뒷자리에 합승한 사무관에게 묻는다. 어이 그 임종석이 타고 다니는 차 있잖아, 그런 걸 뭐라 그러지?…LV라던가? leisure vehicle. 레저용 승합차라구요…그런데 왜 그런 큰 차를 타고 다니는 거지?…. 신세대풍이니까요…. 김태홍의 차는 검은 색 소나타III다. 한화갑은 소나타III였다가 최근 대선후보 선거에 출마하면서 다이너스티로 바꾸었다. 김민석은 무쏘…. 나는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안다. 그는 역시 실무적이다. 유인물 혹은 <말>지를 몇 보따리 씩 싣고 사무국 직원들과 함께 돌아다녔던, 아니 (그땐 가난했으므로) 다니고 싶었던 시절과 달라진 게 없다.

술과 음식이 나오고 건배를 하고 `김정환이는 거의 유일하게 나를 평가해주거든. 그래서 좋아.` 그렇게 운을 떼더니 김태홍이, 80년, `웃기는 재주는 좀 있어서`(그의 표현이다) 기자협회장 자리에 있다가 5. 17 전두환 쿠데타의 철퇴를 맞고 TV 공개수배자 22명 중 두 번째로 화면을 장식하고, 옥탑방도 아닌 광고탑 방에서 겨우 체포를 면했다가 결국은 피체, 8월 한 달 동안 남영동에 끌려가서 홍준위 이근안 등, 훗날 악명을 전 세계적으로 떨치게 되는 고문기술자들에게 6, 7년 먼저 고문당하면서도 밥을 억수로 먹어 치운 이야기는 제쳐두고, 또 한겨레신문을 그만 두고 시름시름 세월을 앓다가 1995년, 4. 19 이후 최초의 지방자치단체에서 광주시 북구 구청장에 최다득표로 당선, 담장을 허물고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아침 일찍 주민들을 깨워 청소를 하는, 근면하고 `구체적인` 민선 구청장으로 또 민주화 운동 성공사례로 일본 NHK 및 후지 TV에 김지하(시인) 김민기(작곡-연출가)와 함께 1시간 씩이나 소개되었던 얘기 다 제쳐두고, 아니 정말 `김태홍적으로 구체적`인 보도지침 사건(한국일보 현직기자였던 김주언을 통해 나날의 일상적인 `보도지침`을 입수하여 종합, 전두환 독재정권의 `비극적이고도 희극적인`, 정말 엽기적인 언론탄압 실상을 만천하에 폭로한 사건. 이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자실`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담당 형사와 정보부 요원들이 그렇게 당황한 것은 처음 보았다. 공개단체운동이란 아무리 비밀리에 한다고 해도 담당 형사들을 놀래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모를 수는 있으나, 예상하지 못하는 일은 별로 없는 까닭이다. 보도지침 사건은 김태홍식 `기상천외`가 그대로 관철된, 일상의 본질을 다시 생각케하는 사건이었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냥 가슴께에 대못을 박힌, 채집된 곤충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에 대해서는 입 딱 씻고, 하필이면 1982년 운동권 데뷔담을 술술 풀기 시작한다. 일단 그걸 따라가 보자.

1982년 홍남순 변호사의 환갑 기념 잔치가 광주에서 열렸다. 홍남순 변호사하면 한마디로 재야와 광주의 상징적인 존재.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재야인사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1982년이다. 그때 광주 분위기가 어땠겠냐. 경악과 절규가 채 끝나지 않은 채 어둠의 무게에 눌려 그리움만 치솟고 사람을 만나면 무사한 게 반갑고 살아있는 게 고마워서 그냥 환장할 때다. 그러저러 잔치를 치르고 날 밤을 새고 보니 서울로 떠날 사람들이 3평 남짓한 방에 한 30명이 있었는데, 우물쭈물하고 도무지 길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모두 헤어지기가 싫은 거였다. 하지만 돈이 있어야지. 돈 한 푼 없을 때 아닌가. 그러니 우물쭈물이었다. 그런 상황을 김태홍이 견뎠을 리 없다. 가자, 아니 갑시다…. 그는 일행을 모두 이끌고 무등산 산장으로 향했다. 있는 대로 술을 시키고 안주를 시키고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 아무리 앞장을 섰기로 마이크를 오래 잡으면 사람들이 곧 지겨워하고 기분 나빠하고 더러는 자존심 상해한다. 그러나 이 날은 달랐다. 그는 시난고난한 이야기를 우스개 소리 쯤으로 전화시키면서 동시에 마음 깊은 곳을 울리면서 쓰다듬을 줄 알았다. 그의 마이크 독재는 점점 더 심해졌지만, 반독재운동을 대표적 명망가들이 모인 그 자리에서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주거-생계지가 광주였던 사람들. 이 일을 어찌할거나. 돈 한 푼 없는 거 뻔히 아는데. 저자가 어쩌려고. 결국은 우리가 담보로 맡겨질게 뻔한데…. 그의 `독재`는 점점 더 강화되었다. 그는 내처 `방석집`으로 그들을 끌고 갔다. 앗, 뜨거라. `방석집`이면 서너명이 먹어도 한 달 월급 금새 털리는 곳인데….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구라`에 점점 더 빨려들었고 도무지 흩어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임채정(국회의원)은 급기야 의사인 동생을 `현장 대기`시켰고, 당시 광주, 하필이면 방석집 근처에 살던, 그래서 제일 제발 저렸던 황석영(소설가. 그때는 광주의 문화운동을 주름잡을 때다)이 거의 사정하다시피하여 자기 집으로 일행을 옮겨갔다. 자,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의 구라에 `감탄`한 김지하는, 김태홍보다 한 살이 많은데, `말 놓읍시다.`고 했다. 몇 번이고 그랬지만 그는 거절했다. 선밴데 무슨 말을 놓는가. 그 다음, 그의 `구라`에 주눅 든 황석영은 `무릎을 꿇`(설마)더니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황석영은 그보다 한 살 아래. 김태홍은 단박에 `그러시게.` 그랬다. 그날 좌중은 구라 순번을 먹였다. 황석영은 금성 라디오, 방배추는 나쇼날 라디오, 그리고 김태홍은 소니 라디오….

언론계에서 그의 별명은 `북경방송`이다. 중국 대륙은 너무 넓어서 각 지방 말이 사투리 정도가 아니라 거의 외국어라고 해야 할 정도인데 하루에 몇 시간 씩 북경방송이 시작되면 지방방송은 방송 자체를 멈춘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 소문에서 유래된 별명이다. 김태홍과 같은 `반열`에 선 방배추는 누구인가? 황석영이 다음 작품으로 <민족깡패 방배추전>을 쓰겠다고 공언한 바 있는 바로 그 방배추다. 통일운동가 백기완을 만나 `주먹`에서 , 남 대신 맞아주는 운동권 맷집으로 변신한, 그러느라 그 튼튼하던 몸이 형편없이 망가져서 오히려 `건강했던 몸`을 원망할 정도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집 문상은 빠지는 법이 없는 그의 인생을 여기서 다 얘기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구라 실력은 정말 신화적인데, 사례 하나. 미리 말하건데 이건 정말 구라다. 여자가 하도 궁해 닭하고도 하고 염소하고도 했는데 말야. 염소가 닭보다는 아이큐가 훨씬 높더라. 닭은, 그냥 놀라서 난리를 치다가도 일 끝내고 놔주자 몇 걸음 안 가서 그냥 평소대로 꼬꼬댁, 꼬꼬꼬 하면서 걸어가는거야. 그새 까먹은 거지. 그런데 염소란 놈은 내가 지나가면 매에-하고 아는 체를 하거든…. 이쯤에서 황석영이 한번 시비를 걸어본다. 근데, 닭한테 형님께 들어갑디까? 한참 구라를 푸는데 이렇게 나오면 맥이 끊기잖을까?…. 하지만 방배추의 순발력이 정말 놀랍다. 얌마. 계란이 나오잖아, 계란이….

김태홍은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곤욕을 치렀다. 광주 5. 18 행사 때 참배를 마친 후 후배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을 2급 룸쌀롱쯤 되는 곳으로 몰고 가 여자를 앉히고 술을 먹였다가 `누군 밤새 추모했는데 국회의원이란 것들이…` 그런 식으로 파문이 일파만파 번졌던 것. 그는 그때를 `지옥 같았다`고 표현한다. 나는 공인이 되어본 적이 없으므로, `공인의 처신`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니 그 대목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또, 그 당시, `여자 있는데 가면 여자 앉히는 게 예의 아니겠나.` 뭐 그렇게 애매몽롱(?)한 얘기 하다가 소설가 공지영(그녀는 자실-언협 당시 같이 일했다)한테 호되게 야단맞은 적도 있다. 하지만, 다만, 그런 생각이 든다. 김태홍은 그 당시의 `행진`을 계속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사실,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을 운동권으로 지낸 사람에게는 초상집과 잔칫집의 구분이 없다. 초상집 문상 말고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으므로. 초상집에서 조직이 준비되고 데모가 모의되었다. 초상집은 운동집이고, 그러므로 잔칫집이었다. 안종관이라는, 70년대 말인가 희곡 <별주부전> 한 편을 쓰고는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지만 그 뒤로 그 방면에 그것을 능가하는 희곡 작품도 없으므로 여전히 희곡작가 대접을 받는, 그렇지만 아무래도 구라와 술 실력이, 그리고 여유작작한 인품 때문에 더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 그가 김태홍과 안 친했을 리가 없는데, 김태홍은 되는 일 하나도 없던 광주 칩거 시절 신문에서 `안종관 부친상`이라는 부고를 읽고 곧장 서울로 올라와 부의금을 내고 절을 올렸다. 그런데 안종관은 없고 왠 시커멓고 꺼끄장한(안종관은, 다소 시니컬하지만 허여멀쑥한 선비풍모다) 사람이 그런다. 제가 안종관이올씨다마는….

국회의원이라는 게, 현실 개혁이라는 게 말야…. 그가 모처럼 정치얘기를 한다. 계단이 있잖아. 늘 다니던 계단인데 그게 한두 개가 없어진 거야. 그런데 그걸 모르고 그냥 헛디뎌 버리거든…. 그런데, 놀랍다, 그에게 `국회의원이 되는 것`의 계단은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내려가는 계단이다! 그 `내려감`은, 무엇을 위해? `설날, 아침밥상 같은 남자`라는 이 글의 제목은 무슨 뜻? 그의 얼굴은 잔치의 미학을 구현한다. 그 뿐인가? 내가 존경하는 국회의원들은 많다. 이것저것 일을 하려고 애쓰는데, 언론이 제 세상 만난 듯 만만한 동네북쯤으로, 비판을 위한 비판만으로 씹어대는구나, 그런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드는 국회의원들은 더 많다. 하지만 그 옛날 DJ도, YS도 또 누구누구도, 하여간 이회창과 김종필 말고는 대체로 민주화운동권의 범주에 속해 있었을 때 어느 야당 총재 집에 세배 술 얻어먹으러 갔다가 본, 현관 마루 밑에 수북이 어지럽게 쌓여있던 구두들, 장래 공천을 바라며 눈도장을 찍으려 떼로 몰려들었던 그 구두들, 퀴퀴하고 요상한 냄새의 잔치를 벌였던 검은 구두들의 인상을 말끔하게 씻어내 주는 경우는 좀체 보기 힘들다. 내게 김태홍은 그 장면을 아침 밥상 장면으로 `상승`시켜준 사람이다. 여야 정치권의 개혁 공방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별 의견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다. 국회의원이란 게 겨우 몇백명인데, 무슨 무슨 개혁 모임이 왜 그리도 많은지. 한 의원이 서너 개씩 혹은 대여섯 개씩 단체에 적을 두고 있으니 같은 사람들끼리 다른 명의의 회합으로 회의하고 토론하고 다시 회의하고 토론하고 조정하다가 날 새겠구나…. 이럴 때 나는 김태홍을 생각한다. 그는 대선후보 경선 주자도 아니고, 개혁 모임의 스타도 아니다. 하지만 TV에 가끔 그의 모습이 스치듯 비칠 때, 여전히 회의는 좀 머쓱하고 쑥스러운 듯, 쭈볏쭈볏한 그의 내색이 잡힐 때, 나는 비로소 안심한다. 뭐가 좀 되기는 될 모양이구나…. 그는 아우라이자 아로마이자 아침밥상이기 때문이다.

ps. 정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송건호 선생은 말렸고, 박현채 선생은 하라 했고… 에라. 오늘 제낀다. 술 먹고 집으로 곧장 갈란다. 어이, 이봐요. 술 좀 줘…. 그렇게 김태홍이 호기를 부리는데 나는 비로소 달라진 걸 하나 발견했다. 옛날에는 저렇게 말 안했다. 어이, 안주는 대충 주고 술은 오비 맥주로, 좋은 걸로 한 병 줘, 그랬다. 동행들이 주인한테 안주가 많네 적네, 시비 혹은, 좀 더 주쇼, 맛있게 해주쇼, 호소를 하니 김태홍이 눈물나게 웃겨 버린 것. 나는 그의 `가르침`을 곰곰 되새겨 내 버전을 만들어냈다. 혹시, 한참 술을 먹는데 여자들이 일어서면 사내들이 너도 나도 붙잡는가 싶다가 보니, 이 비겁한 놈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여자들만 남아, 때는 12시가 넘어 나 혼자 바래다 줘야 할 판인데 그 교통 막히는 때 택시 한대로 4대문 안팎을 섭렵해야 하는 낭패를 당한 적이 있는가. 기사 아저씨가 그 코스를 순순히 밟아줄까?…그럴 때면 기사한테, 이렇게 말하라. `아저씨. 바쁘세요?` 그러면, 기사들이 완전 뿅 가서, 만사형통이다. 바쁘긴요, 하하. 웃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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