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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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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5>

언론은 나이 먹을수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진짜 기자` 임영숙(대한매일 공공정책연구소장)

허허. 참으로 쑥스럽게 됐네. 그러게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가듯 이 얘기 저 얘기하면 된다니까. 인사동 찻집 수희제는 실내가 주인아주머니를 그대로 빼닮아 단아하고 넉넉하다. 그 뒤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있는 <향정>은 주인 아줌마가 걸걸하고 음식이 푸짐하지만 한 방에 서넛이 둘러 앉아있으면 뭔가 은밀하고 상대방이 여자일 경우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렇잖아도 난 임영숙 앞에서는 수줍음을 타는 편인데. 오늘은 꽤 더듬겠군. 남이 보는데서 사진을 찍으면 쑥스러워 하실까봐 말야. 임영숙이 너무 `쑥스러워`하니 프레시안 대표께서 직접 `안내역`을 맡아준 자리다. 그 분도 바쁘고 임영숙도 바쁘고, 나만 그 중간에서 꽤나 한가한 놈인데. 허허, 이것 참. 기자는 정말 사진 찍는 거 싫어해요. 임영숙이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살포시 웃는다. 저 미소가 없었다면 나는 임영숙과 오래 만나지 못했을 거다. 왜냐? 무엇보다, 무서우니까. 키 큰 여자를 내가 무서워한다는 얘기는 어디에선가 했지만, 그것 아니라도 임영숙의 외모는 다소 엄정하다. 하지만 바로 저렇게 `살포시` 웃을 때 잔잔한 미소가 안경알에 까지 묻어나면서 얼굴 전체를 환하게 펴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웃기만 하는 법이 없다. 그 웃음에 꼭 허스키의, 자신의 내부를 향해 부드럽게 떨리는 목소리가, 거의 노래처럼, 아니 국악 자체의 목소리처럼 묻어난다.

국악이라. 그녀의 국악 사랑은 정말 면면하다. 96년 7월 8일자 서울신문(대한매일의 옛이름) 칼럼 `원조 사물놀이`에서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들이(김덕수, 최종실, 이광수-필자) 지금은 고인이 된 김용배씨와 지난 78년 공간사랑에서 가진 첫 공연의 감동이 새삼 되살아 나면서 원조 사물놀이공연을 또 다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중략). 지난 86년 복잡한 추측을 남긴채 자살한 김용배씨를 명부에서 불러 올 수는 없겠지만 83년부터 남은 세 사람과 호흡을 맞춰 온 강민석씨가 있으니 원조 사물놀이의 리듬은 되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원조 사물놀이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2년후면 사물놀이가 첫 선을 보인지 20년이 된다. 최소한 그때는 세 사람이 다시 함께 무대에 서고 2002년 월드컵 개막식을 원조사물놀이가 장식하면 어떨까. 이쯤 되면 사물놀이에 대한 추억과 애정이 `전망` 수준에 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그녀의 최근 2년 간 칼럼을 읽으려면 http://columnist. org) 그녀가 살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이애주(무용가)씨 공간사랑 공연 때도 제가 처음 취재했어요. 그때 공간사랑에서 좋은 공연 많이 기획했지요. 공옥진씨 병신춤 공연도 그랬고. 그때 기획담당자는 왕년의 학림다방 DJ 강준혁. 문리대 최장수 재학 기록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그는 음악평론가 이덕희씨와 함께 서울 문리대 앞 학림다방의 `가구` 같은 존재였는데, 90년 초쯤 만났더니 국악과 운동권 노래 단체(이를테면 <노찾사>)의 합동공연 추진에 열을 올리고, 아니 거의 신성한 사명감을 느끼고 있어서 나는 `지 때문에 난 클래식을 공부했건만. ` 뭐 그런 심정으로 다소 억울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모처럼 자랑한다. 아참, 국악의 해가 있기도 전에 국악 시리즈 연재를 아주 크게(5단통 광고를 뺀 전단), 처음으로 했는데, 그때 참 좋았어요. 잘 안 알려진, 숨은 대가들을 소개하는 기쁨이 있었죠. 그 연재는 그 당시에도 화제였고 지금도 화제다. 연재가 끝난 후 분량을 채워 책으로 내기로 하고 당시 고려원(그때 편집장은 장석주)과 계약을 했는데,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출판사가 없어져 `게을러서 떼어 먹은 셈`이 되었고, 문화출판의 대명사 격인 지식산업사(사장 김경희. 그녀는 김경희에 대해, `오죽 했으면 출판사에 불이 났을 때 기자들이 성금을 모아주었겠느냐 `면서 존경을 표했는데, 나는 그때 모종의 젊은 날의 꿈이 다시 한번 활활 타오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안타까움`의 순간을 보았다. 엄정이 친근의 뼈대로 전화하는 순간이고, 내가 한없이 편하게, 재롱을 떨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67학번. 나보다 5살 위니까, 남새스러울 것도 없다. )에서 내자고 얘기가 있어 아직까지 계약된 상태다. 출판도 안된 책의 수명이 바야흐로 10년을 넘어서는가. 국악의 유현(幽玄)을 그대로 닮은 진풍경 아닌가.

그때는 입사가 참 빨랐지요. 현역에 남아있는 여기자 분 중 저보다 입사가 빠른 분은 장명수 씨(한국일보 사장) 정도. 처음에는, 뭐 여기자한테는 중요한 일을 잘 안 맡기니까, 그냥 두 줄짜리 방송프로그램 짜넣는 거 맡았어요. 하하. 그때는 KBS가 남산에 있을 땐데,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신문은 사양 산업 같고.
글쎄 나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뭐라? 할 말 많지요. 너무 많아요. 그렇게 나는 갑자기 말이 헤퍼졌다. 요즘처럼 언론이 불신을 받은 적이 없다. 특정 신문을 반대하는 운동이건 언론 자체를 방송과 한데 묶어 `바보상자`로 치부하며 상종을 안 하는 쪽이건 내가 보기에 국민 대다수는 비판 언론과 언론 비판을 구분하지 않는다. 미래 전망을 위한 여론 수집 기능은 없어진지 오래다. 언론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여론`은 압도적으로 `옳소!`다. 그러나 정부의 신문사 세무조사가 언론 탄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도 `여론`은 압도적으로 `옳소!`다. 그건 모순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여론조사는 없다. 만약 묻는다면 `여론`은 어떻게 답할까? 별 골치아픈 걸 다 묻고 있네 그런 반응이 압도적일 것이다. 왜냐면 이제까지 여론조사는 `골치 아픈` 사안, 생각을 요하는 사안을 물어본 적이 없다. 좀 `생각이 있는` 여론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말이 꼭 되야 되냐. 니들은 언제 말 됐냐. 방송이고 드라마고 뉴스고, 도대체 말이 되는 게 있냐. `학자풍` 여론은 이렇게 답하리라. 그게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아니겠는가. 논리 정합성이란 게 사실 독재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한때 `언론도 싫고 언론 비판도 싫다`고 자포자기했던 적이 있다. 그랬는데, 욕만 할 게 아니라, 지금의 언론이 그나마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은 누구의 덕일까, 그 자산을 키우고 확대시키는 게 더 바람직한 일 아닐까? 그렇게 포지티브한 쪽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나이가 슬금슬금 찾아오면서 나의 문학을 도와준 몇 몇 기자들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얘기를 하자면 임영숙이 길잡이로 가장 적합하다. 홍일점이어서가 아니고, 위 인용글에서 보듯, 그녀가 쓰는 기사 전체에서 묻어나는 (스타 기질이 아닌) `제작자` 스타일 때문이다.

소설가 김주영은 환갑 기념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괄호 안은 필자). 연재를 하다보면 제일 먼저 걸리는 게 상업주의다. 독자 반응 한마디까지 분석하고 작가한테 일러주고 이를 테면, 남녀가 여관방에 들어갔는데 아무 일도 없이, 아무 살도 안 섞고(웃음) 나오면 되느냐, 뭐 그런 압박이 오게 되거든. 그래, <객주>. 내 서울신문에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때 연재할 때는 담당기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 간섭을 안 했다. 여기잔데.

(임영숙씨?) 맞아. 그 분. 원고 실수가 있었을 때도 아무 말 않고 격려만 해준 덕분으로 <객주>가 나올 수 있었다. 실수가 있어도 안 해주고 격려만 해준 덕분으로 객주를 쓸 수 있었다. 물론 제대로 지적을 해서 작품이 더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작가를 위해 참아준 것. (어쨌든 그때는 뭔가 여유가 있었다. 난 신경림 시집 <농무>를 다시 한번 보다가 놀랜 적이 있다. 수록된 시들의 게재면이 밝혀져 있는데, 서울-경향 신문이 그렇게 많았다. 74년 언론자유수호 운동 이후 동아-조선에는 오히려 글을 안 쓸 땐데. 서울-경향 신문은 정부 기관지 격 아닌가. 정치가 살벌했던 때라 숨통을 그렇게 문화면 쪽으로 터주었다. 그에 비하면 요즘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훨씬 좋은데, 뭔가 더 막막하다. 더 숨이 막히고 ) 권력과 정치가 물러간 자리를 상업주의가 재빨리 차지한 것이지, 더 치밀하게.

그때가, 임재걸 기자(당시 중앙일보)와 함께였죠, 아마? 아, 그거 기억하시는구나. 창피한데. 80년대 초 첫 대면 때, 내가 데뷔한지 얼마 안 되고 그녀가 문학란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녀는 대낮부터 두 사내와 술을 대작하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취해 땅바닥에 그냥 주저앉은 적이 있다. 딱 두 번 그랬는데, 그때마다 김정환 씨가 있었던 것 같네. 한번은 이애주 씨 공연 때고 그랬나? 어쨌거나, 그때 그녀의 그 `키 큰 쓰러짐`은 대낮보다 더 찬란한 광채를 뿜었다. `키 큼`과 `쓰러짐`의 격차가 모종의 서슬 푸른 아름다움을 내뿜으면서 앞으로 있을 파란만장의 80년대 그 이후까지 품는 듯 했던 것. 그 한 십오년 후에 어느 행사장에서 나의 노래를 듣고 그녀는 거의 상심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김정환 씨도 늙는구나. 세월은 아무도 이기지 못해. 난 그때, 젊음에 찬탄했는데. 그래서 취했었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때, 주저앉은 임영숙의 모습에서 세월의 빛을 보았던 것일까? 어쨌거나 그녀와 함께, 80년대 초 기자들을 거론해보자. 정확히 말하면 84년 내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일을 맡기 전의 기자들. 왜냐면 단체를 맡으면 기자는 홍보대상으로 전락되기 마련이니까.

임재걸은 성품을 닮아 글이 호방하면서도 단아하다. 너무 느긋한 듯 흐르다가도 마무리가 정확해서 많은 것을 포착한다. 그가 내게 문학과 술 먹는 방법, 그리고 술 먹는 장소, 이를테면 낮에 술을 먹다가 한잠 자고 싶으면 어디로 가고 등등을 아주 자상하게, 선생님처럼 꼬박꼬박 가르쳐 주었다. 신기하다면 일부러 불러 폭탄주를 시음시킨 것도 그고, 소의 간에 붙은 곁간이 그렇게도 좋다면서 불러다 먹인 것도 그고, 안주는 될 수 있는데도 기름진 것을 챙겨 먹으라고 가르쳐준 것도 그다. 그가 나를 임영숙과 함께 처음 데려간 곳은 원조 최대포집. 돼지 껍질 밑 염통 곱창 대창 등 각종 부위를 `1인분씩`시켜먹을 수 있는, 흡사 일제시대 때부터 있었을 법한 그 집에서 그는 `우선 배를 채워야 한다. `며 굳이 살코기만 시켰었다. 그 15년 후쯤 그가 퇴사를 준비하면서 내게 `문학학교에 한 자리`를 부탁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좋아하는 글쟁이-술친구들(이를테면 시인 신경림 소설가 김주영 이문구 김원일 김원우 등등)이 일주일에 한번씩 요일 별로 학교엘 나오니 그냥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매일 술 마시는 게 즐겁지 않겠나 . 나는 당연히 자리를 마련했지만(자리라야 책상 하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그 자리에 없고 대구에서 안경테 제조업체 사장으로 있다.

중앙일보는 임재걸 덕에 자주 들렀지만 한국일보에는 `보도지침` 사건의 1인 주역인 대학 친구 김주언이 복직해있었으므로 심심찮게 가게 되었는데, 중앙일보보다 더 허름하고 인쇄 잉크 냄새가 더 가까운 그곳에,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장명수 `밑에`, 쌍벽의 문학 담당기자 박래부와 김훈이 있었다. 그 위에, 참으로 정갈한 문장을 구사하던 정달영도 있었다. 장명수는 매일 연재되는 `여기자 칼럼`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으던 중이었고(그 점에서 그녀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여기자라 할 만 하다), `요즘 뭐해. 연락 좀 하지. 술 한 잔 살게. 주언이도 데리고, 한번 하자구.` 그렇게 고생한 후배 김주언에 대한 미안함을 표하는 거였는데, 반말이 그렇게 다정할 수 없었다. 당시 내가 시건방진 열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아니 시작과 동시에 너무도 유구하게 들렸던 그녀의 반말은 정말 신기하다. 박래부는 글이나 인품이나 부처님과(科)였고 김훈은 자학의 예수과(科)였다. 박래부가 모종의 넘침의 풍성함으로 빛나는데 반해 김훈은 응집으로 빛난다. 박래부는 내가 들르면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일 마치고 내려갈게. ` 그렇게 챙기지만 김훈은 무슨 글을 신들린 무당처럼 쓰는지 큰 기사 하나를 쓰고 나면 진이 다 빠져서 며칠씩 결근을 하거나 아예 사표를 내는 적이 잦았고, 술에 대한 태도 또한 그와 같았다. 박래부와 김훈이 합작한 <문학기행>시리즈는 문학사에 남을 만한 걸작이다. 박래부와 김훈이 번갈아 쓰는 기사와 황지우 등 훗날 당대의 문장가로 성장하는 문인들의 `작품-줄거리 요약`이 어우러졌던 것.

박래부와는 (너무) 일찍 친해진 반면 김훈과는 (너무) 늦게 친해진 듯 하다. 사실 80년대 초, 신군부 감찰원들이 신문사를 들락거리던 시절 엑스자 멜빵으로 바지를 올리고 머리를 깎아 올리고 눈매가 독한 김훈을 나는 보안사 관계자로 오해했고 김훈은 동료 기자들이 끌려가 죽도록 맞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 철 모르고 기고만장한 나를 `활이 있으면 쏴 죽이고 싶었다`고 훗날 고백했다. 박래부는 현재 한국일보 심의실장이고 요즘 칼럼을 읽으면 앞으로 문화부 장관이 되면 딱 좋겠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문화 마인드`가 누구보다 깊고 총체적이다. 김훈은 숱한 신문-잡지사를 전전하며 소설계를 넘보다가 과연 올해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더니 최근 한겨레신문사 부국장급 민권 사회2부 일선 경찰서 출입기자가 되었다. 나는 박래부에게 문학하는 마음의 미래를 그리고 김훈에게서 그 현장을 배웠다.

말을 해놓고 보니 모두 문학 담당 기자들인데, 그것은 내가 문학을 하는 처지여서가 아니라(대표적으로, 나는 농성 인터뷰 당시 기자들을 집단 퇴장시킨 [중앙일보]사회부 기자 김상도에게 운동가의 처신보다 더 엄정한 기자의 처신을 배웠고, 친구인 정세용 [내일신문] 기획위원에게 기자는 `상식의 양심`이라는 점을 배웠다. 그리고 `화제 혹은 문제의` [조선일보] 이한우 출판담당 기자에게 사석에서 들은 `한국의 운동권은 주류 연구가 부족하다`는 말을 아직도 가슴에 새기고 다닌다. 그의 `이승만론`이 정당한 판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 문학, 그리고 문화담당 기자들의 역할이 그때보다 지금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예술과 언론은 서로 적대적인 면이 많다. 언론은 대중을 향해 쉬워지므로 언론이지만 문학-예술은 의미의 이유를 향해 난해해지므로 문학-예술인 면이 있다. 언론도 문학-예술도 `새로운 것`(news)을 추구하지만 언론의 `뉴스`가 비일비재(非一非再)의 딴 이름이라면 문학-예술의 그것은 고전적 깊이의 딴 이름이다. `올바른 언론`은 `비일비재`를 전망의 내용(의미)으로 종합하고 `올바른` 문학-예술은 `고전적 깊이`를 전망의 형식(의미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이므로 어렵사리 서로를 자극하는 단계에 이르겠지만 자본-상업주의 문화는 그 단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아마도 노태우 의사擬似민주주의 정권이 운영한 88올림픽을 전후하여 확고한 뿌리를 내린) 천민자본-상업주의에 허우적대는 채로 밀레니엄 `문화-예술의 시대`를 맞은 그 언론문화가, 다시 `한일 월드컵`이라는, 올림픽보다 몇 배 더 거대한 `먹이`에 일찌감치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으나, 내겐 거꾸로 보인다. 즉, 월드컵이 언론을 삼키려고 거대한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게 보인다. 스포츠의 비일비재는 단순할수록 극적이다. 그것이 정치의 비유로 일방-전화 순간은 파시즘의 순간이다. 그것이 문학-예술의 비유로 전화되는 순간은 수천-수만년 인간 문명의 의상이 하루아침에 벗겨지는 순간이다. 월드컵이 끝나고 난 후 비일비재와 전망과 의미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더 멀리 떨어져 있게 될까, 아니 그 말들이 신문지면에서, 살아남기는 할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누구보다 임영숙을 떠올린다. 아니 욕심을 더 내서, 언론은 나이를 먹을수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임영숙을 떠올린다. 그녀가 이 명제와 함께 나이를 먹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첫 만남 후 20년 동안 그녀를, 자주는 아니고 드문드문 만났는데, 반은 우연히 만났는데, 그게, 만남이, 개별 만남마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계획한 일 같은, 그래서 그녀와의 만남은 20년 세월보다 더 굵직하고 알찬 것 같은, 착각이 또 든다. 나는 언론계에서 `모금`을 할 일이 생기면 우선 그녀부터 찾는다. 이유는 세 가지. 그녀라면 거절할 리 없고(사실 첫 타자가 거절하면 망신살 이전에 얼마나 기운이 빠지는가 ), 그녀를 통하면 얼마나 모금이 될 지 가늠할 수 있고(그녀는 가장 후한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배려해주라는 세세한 충고를 빼먹지 않는다 ) , 그리하여 언제나 현실은 생각보다 따듯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목표액이 터무니없이 크다는 것은 미리 주눅들었다는 반증이다. -모금전문가) 까닭이다. 그랬나? 그랬지요. 언제나.

90년대 초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있다가 KBS 사장으로 옮겨간 서기원(소설가)과, 서울신문사 노조위원장이다가 언론노조 초대위원장으로 선임된 권영길(민주노동당 대표) 사이에 `전쟁`(울산 현대중공업 `골리앗 농성`과 병행된 `사장 퇴진 요구` KBS 파업)이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을 다 좋아했던 임영숙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임영숙의 눈가에 고였던 이슬, 그 이슬방울에 묻어나던 무한한 슬픔의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때 그녀가 안타까워했던 것은 부장급들과 노조원들 사이에 대화의 끈이 이 사건을 계기로 영영 끊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물론 노사분규는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계급투쟁도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임영숙의 언뜻 엄정한 표정보다 더 엄정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싸움에 대한 무한한 슬픔의 표정이 없다면, 상처를 고통으로 벌써 치유하는 그 표정의 힘이 없다면 투쟁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끝내 투쟁 이상에 달하지 못한다. 그랬나? 그랬지요. 언제나. 오보 아냐? 천만에.

나를 만난 후 20년 동안 그녀는 문화부장을 거쳐 논설위원, 그리고 논설위원실장을 지내다가 최근 대한매일 산하 공공정책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했다. 회사가 정부로부터 완전 독립한 상태에서 일도 만들고 돈도 만들어야 하는 그 자리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다가 벌써 일에 몰두한 그녀를 보고 난 피차 참으로 마땅한 선택이었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글이)야말로 문화면의 `올바른` 공공정책 그 자체였던 것이다. 5공 전두환 시절 서울신문사는 엘리트들을 꼬불쳐 놓은 정부기관지였다. 김대중 정권으로 바뀌면서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꾸고 `호랑이의 포효`를 캐치프레이즈 삼으면서 `정론지`로 거듭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국민의)정부 정책 홍보지로 눌러 앉는가 싶을 때 재정 독립을 한 셈이 되었다. 이 와중에 `진짜 기자` 임영숙이 보여준 균형감각은 `올바른 문화`의 균형감각 그 자체였다. 아니 `올바른 언론`의 균형감각 그 자첸가? 주류를 모르고는 세상을 개선할 수 없다. 주류에 젖어 들어서는 세상을 개선할 수 없다. 주류를 알고 주류에 젖어들지 않고 희망과 전망 행위에 앎을 투사시켜야만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문학-예술과 언론은 각기 다른 차원에서, 나이 먹을수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내가 그랬나? 그랬지요. 언제나.

우리는 술자리를 2차로 옮겼고 그렇잖아도 편안해진 자리가 아주 노골노골해졌다. 그랬나? 그랬나? 그런 임영숙의, 쑥스러움의 반문이 귓가에 맴돌고 급기야 요람이 되어 나를 편안하게 흔들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랬지요. 그랬지요. 그렇게 되 뇌이면서 언론도 격변과 지성의 요람으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고, 생각도 요람으로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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