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회원을 거느렸고 또 숱한 명망가들을 위로 옆으로 포진시켰지만 <참여연대>의 대장이 박원순 변호사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한마디로 그는 인품이 너그럽지만 구체적이고, `가장 낮은 곳에서 지도`하는 정통파 리더다. 시민운동의 한계를 운위하는 `올드 맑시스트들`이 물론 있겠지만, 그들도 박원순의 지도방식의 `한계`를 시비거는 일은 드물다. 아니, 박원순은 좌파 지도자들이 내세웠으되 세월의 엄혹 때문에 실천할 길이 없었던 그 방식을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찾아갈 곳은 <참여연대>가 운영하는 <철학마당 느티나무> . 전통의 술꾼 동네 인사동을 약간 비껴나 종로경찰서와 마주한 곳에 운동단체치고는 퍽 핸섬하게 자리한 이 찻집-술집은 여러모로 박원순을 닮았다. 공간이 널찍하고 분위기는 더 넉넉하여 웬만하게 시끄러운 술자리와 웬만하게 한가한 찻 자리, 웬만하게 학구적인 세미나, 그리고 웬만하게 논쟁적인 회의를 두루 아우른다. 나는 물론 세미나나 학구적인 것과 무관하고 대체로 그런 `박원순 분위기`를 취기 쯤으로 누리려 들렀다가 갑자기 그리워서 그를 찾으면 가끔 위층에서 내려오곤 하는데, 학번이 3년 아래인 그에게 반말하기가 괜히 미안해서 나는 존댓말을 섞는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대장이 아니고 대장을 위한 증거일 것이 확실하다. 오늘의 대장은 27년 만에 `오둘둘 사건` 관련자를 소집(하는데 성공)한 유영표다. 사건 당시에도 대장이었다. 그때 박원순은 대학 1년생. 나는 4학년이었다. 뭐 그렇다고 이 참에 `한 반말` 하겠다는 게 아니라? 많이 모여 있는 사진을 찍어야 하니 일부러 한 10분 늦게 도착했는데 50명이 넘는 대상자 중 반 이상이 모여 시끌벅적하니 오른쪽 벽을 다 메우고 있다.
어, 정환이 왔구나. 어 형. 야, 임마. 뭐 그렇게 인사는 선배는 선배대로 후배는 후배대로 어영부영은 어영부영대로 소란스러웠지만 그런, 벌써 술 취한 듯한 좌중에 `두텁고 환한` 반색이 확실한 것은 역시 최고참(68학번) 유영표다. 그리고 경악. 혹시 정해일(신용협동중앙회 신용사업부장)이 연락 안되나?? 그렇게 유영표가 물은 것이 불과 이틀 전. 나는 `연락 끊긴지 한 10년은 될걸요. `하고 그냥 전화를 끊었는데, 어떻게 수소문 했지, 친구인 나도 포기한 연락을? 더군다나 여리디 여린 성격이라 징역 산 후 이쪽 연락은 영 탐탁치 않아 하는 듯 했는데? 그래서, 나는 하마터면 `야. 너 여기 웬일이냐?` 이런 실례를 범할 뻔 하다가 `야 되게 오랜만이네? `로 가까스로 얼버무렸다. 어이쿠, 어떻게 다 연락을 하셨어요?? 그렇게 물었지만 유영표는 반색의, `환함과 두터움`의 강도를 높일 뿐 별 대답이 없었다. 정말 오래간 만이네요? 강정숙이 여전히 수줍은 듯 고개를 외로 꼬며 인사를 한다. 강정숙은 87년 대선이 있기 전 민주화운동권 `분열의 지뢰밭`을 누비다가 횡사한 문학평론가이자 무엇보다 5. 22 사건의 주역인 채광석의 미망인이다. 나혜원씨가 안 왔네?? 나혜원(알리안츠 제일생명 설계사)은 `대선 그 후`의 지뢰밭을 누비다가 역시 횡사한 문학평론가 김도연의 처다. 으응. 보험일이 바쁜가봐? 요샌 보험이라고 안 해요. 설계사라고 하지? 어쨌거나, 자, 이쯤 되었으니, 나머지 참석 인원을, 유영표의 도움을 받아 소개해볼까.
이호웅 민주당 국회의원, 부천 시장 원혜영, 그리고 `도발의 미학` 시대를 연 영화감독 장선우, 역대 최고 혹은 `희대의` 도바리 경력의 신동수(선농음식살림 대표) , 전교조운동의 태초인 유상덕(한국교육연구소 소장, 면목고등학교 교사), 여군과 결혼, 군에 대한 증오를 박정희에 대한 증오로 올바로 교정시킨 장원관([주]성비물산 대표), 교육 출판의 새로운 차원을 연 박성규(전 <우리교육>사장, 현 월간 말 판매 대표), 문화운동을 명망 운동 차원에서 조직운동 차원으로 변혁시킨 황선진(마리교육 생활협동조합 대표), 박수무당으로 민속문화 운동을 이끌다가 민중화가 출신 부인과 함께 개량 한복 입기 운동을 시작, 대대적인 붐을 일으키면서 떼돈까지 벌었다는 연성수(두레민족생활 문화원 원장), 그리고 운동에 가난한 순정을 끝까지 관철시킨 `진짜 남자` 이영창(신한 렌탈 캐피탈 감사, 꽤 돈 많이 버는 자리 같은데, 이럴수가!), 결코 타락할 수 없는 `신의 어린 양` 정광서(목사, 이것도 희한하군. 요즘 세상에 `목사`와 `신의 어린 양'이란 말이 공존할 수 있다니. 신자더러만 `신의 어린 양`을 강조하는 게 오래된 세태 아닌가. )
유진권은 더부데데한 듯 하지만 의외로 날카로운 성격에 걸맞게 중앙일보 심의실 심의의원이고, 나일주는 다소 날라리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혹은 그 길로 제대로 나간 건지 신세대에 걸맞을 듯한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다. 천희상은 여전히 묵직한 도서출판 세계인 대표. 그리고 `이 사람 아니고서는 도무지 사업회가 굴러 갈 수 없을, 참으로 겸손의 힘이 신기한` 안종건(김상진 기념사업회 회장, 한국방송대학 농학과 교수)이 사업회 식구들과 함께 손님으로 참석했고, 마지막으로 송병춘은 좌파노동운동, 종종 극좌파 운동도 서슴지 않다가 작년에 최고령으로 사법고시에 합격, 연말 신문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오늘의 자리를 있게 만든 당사자다. 김석원(매일경제 기자)이는 열심히 암 투병하고 있어. 자주들 가봐? 유영표가 그렇게 소개 겸 당부 겸 챙기고 분위기는 잠시 숙연해졌다가 다시 들뜬다. 그런데, 웬 시시콜콜한 이력서들? 그러나 이 `시시콜콜`이 5. 22 사건에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생 운동사를 보자면 74년 민청학련 사건 만큼 유명한 게 없다. 이 사건은 날조된 인혁당 사건과 한데 묶이면서 대규모 사형 선고, 10개월 만의 석방, 그 얼마 후 인혁당 관련자들의 전격 사행 집행 등으로 매스컴의 대대적 보도를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충격과 감동, 그리고 다시 경악을 불러 일으켰다. 그에 비하면 5. 22 사건은 매우 시시콜콜하다. 김상진의 할복은 인혁당 주모자 사형집행 후 꽝꽝 얼어붙은 사회의, 운동권의 `공황` 분위기를 돌파하려는 의로운 죽음이었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권은 반체제는커녕 반정부라는 말도 못쓰고 서울대 문리대 탈춤반 등 (장래의) 문화운동 쪽 사람들과 사대쪽 (장래의) 교육운동 쪽 사람들, 즉 운동권 비주류 혹은 `잔당`(?. 이호웅이 문리대 학생회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자들이 위 수준에 그쳤으니, 붙일 법한 호칭이기는 하다. )들의, `장례식 준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자 준비인원은 반으로 줄었다. 민청학련과 연관하여 10개월 만에 끝난 긴급조치 4호에 비해 9호는 내용이 시시콜콜했다. 위반사실을 보도하는 것도 위반이다? `사형` `무기`가 빠진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시시콜콜하게 들어간 그 문구는 사실 학생-지식인 운동의 낭만-명분주의적 한계를 정확히 교활하게 꿰뚫어 본 `위력적인` 문구였다. 2년 혹은 3년씩 때리고 꼬박 살릴 거야? 참여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경계가 애매해지고 이견이 분분해지고 그만큼 괴리감은 더 심해질거야?
한마디로, 긴급조치 9호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현실주의적 전략이었고 운동권은 그것에 대처할 길이 막막하고 답답했다. 답답함은 청춘의 독(毒)이라 했던가. 시시콜콜은 의미의 적이라 했던가. 그러나, 그렇게 <긴조 9호 시대>는 5년 동안 한국사회 전 분야에 걸쳐 `기나긴 죽음`을 안겼다. 5. 22. 은 긴조 9호 시대의 첫 사건이다. 이 `장례식 운동`은 죽음에 대해 구체적이었으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이진 못했다. `설마` 하던 경찰 간부급들의 목을 날리긴 했으되, 지속적인 반 독재투쟁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사건 주역들은 2년 혹은 2년 6개월을 꼬박 살았고, 더러는 군대까지 갔거나, (운동권 도피자도 아닌) 병역 기피범으로 몰려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징역을 사는 사람은 따분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정말 절망의 모습이 보이는 때다. 이때 중요한 것이 시시콜콜의 의미다. 5. 22 사건은 `첫 사건`이라기보다는 뒤늦은 마지막 사건이었고 여러 모로 미흡하고 여러모로 지지부진했지만 사건 당사자들은 바로 그 점을 오랜 세월에 걸쳐 의미화 했는데(그런 점에서 그들은 운동권의 `스타`가 아니고 제작자다), 그 오래 세월을 조직화한 것이 바로 유영표다. 자, 술 한잔 하지? 오늘은 마치 그가 `사건 그 후` 27년을 세상과 화해시키는 자리 같다. 그래, 하는 일은 잘 되고?? 그의 얼굴의 반색이 두터운 만큼 너그럽고 환한 만큼 열린 인품을 머금는다. 일이 잘 되면 정말로 제일 보다 더 좋아할 것 같은, 그리고 도와줄 일 있으면 언제든지 도와줄 것 같은, 그런 얼굴이다. 아니 더 나아가, 그의 인품=반색을 맛보기 위해, 단지 그런 이유로 내 일을 잘 하고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그는 `시시콜콜한` 존재였던가? 아니다. 그는 야학운동 시절부터 이름을 날린 `현장운동가`였고 창작과 비평사에서 `용역`을 줄 만큼 유능한 필자였다. 그러나 그한테는 시시콜콜`도` 꼬여든다. 이를테면, 내 경험으로 보자면, 이런 식이다. 73년 10월 2일 최초의 반(反)유신데모 때 (대낮도 아니고) 오전 술기운에 데모에 가담했다가 늠름한(?. 취했으니까 ) 태도로 연행되는 사진이 주한미군 신문 성조지(星條紙)를 거쳐 물경 뉴욕타임즈지에까지 실리는 바람에 `상당한`의 폭행과 불이익을 당한 일로(그 일 때문에 나는 `사진`은 물론 `스타`도 싫고 제작자가 좋다) 무척 혼란스러운데다 하필 내가 다니던 얌전한 영문과에 백낙청 해임 파동이 발발, 담당형사가 나의 술을 무슨 `사회 참여형` 술로 오해했는지 자꾸 집적거리고 심지어 연행도 해가고 그러는 거라서 이래저래 술만 늘던 때, `71년 강제징집`되었다가 제대했다는 이철이 내게 학습을 제안했다. 나는 술김에 그러마 했다가 또 술김에 약속을 어겼고 그러기를 일곱번 만에 이철은 나를 포기했다. 저 술주정뱅이하고 다시 약속했다가는 비밀이 새겠군?
그는 그런 내색이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 `음모가` 기질을 냄새 맡았다. `음모가`란 운동권에서 결코 욕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이지만 나는 `음모가`라는 말이 그때나 이때나 싫고, 그런 점에서는 운동체질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가 그 유명한 민청학련 주동자 이철이고, 나는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을 면했다. 그때 면했던 것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충격과 경악`을 평생 극복하지 못했을 테고, 그래서는 문학쟁이가 되지 못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다가온 것이 유영표. 민청학련 사건 직후 아주 살벌할 때였는데도 그는 나와 술김에 약속을 스무번 이상 했고 스무번 이상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예의 그 자연스런, 치열하게 자연스런 반색으로 나를 대했다. 사태는 이철 때보다 (데모하자는 얘기가) 더 뻔했는데, 그에게서는 `음모가`의 면모가 전혀 없었다. 그가 조직가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나를 분명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나는 술에 쩔었을 망정 앞일이 뻔히 보이는데도 술에 쩔은 채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그렇게 당연하고 편안할 수 없었으니 그는 대단한 조직가다. 더군다나 주동자급 `대우`를 받았지만 워낙 술에 쩔은 채 다녀서 회합의 장소 횟수며 내용을 전혀 기억 못하는 게 너무도 분명해서 `와꾸`를 짜는 검사한테 `넌 주동이라며 도대체 뭘 한 거야 `라고, 모진 고문에 더해 선의의(?) 꿀밤까지 덤으로 먹었다는 사실을 덧붙이면 그는 정말 불세출의 조직가겠다. 하지만 유영표의 경우, 그것을 굳이 `조직가 기질`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분명, 그의 반색은 시시콜콜에 갉아 먹히는 나의 정신을 단도직입, 시시콜콜의 의미로 채워주는데 적합한 것이었다.
아니, 더 중요한 `유영표 경험`이 있다. 유영표의 아버지는 이른바 `부역자`다. 70년대에 부역자의 아들이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선 형사들이 온갖 소문을 내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 그렇게 겁을 준다. 그리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부역자`란 말은 심리적으로나 전략-전술적으로나 `위축시키는` 단어였다. 그런데 나는 그와 연관하여 그런 분위기를 느낀 기억이 없다. 그 안에서도 내 안에서도, 그의 주변에서도 나의 주변에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건 신비의 영역에 속하지만 사실은 그가 운동으로서 일상에 정통했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그 때문에 내 인생이 크게, 당분간은 고생 쪽으로 뒤바뀌어버린 것인데도 그를 원망한 기억이 없다. 아니 그와 연관해 원망과 비슷한 단어를 떠올려 본적도 없다.
`원망`은 정반대도 아니고 그냥 너무 멀고 상관없는 단어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상관없는 사람인가? 아니다. 그가 없(었)다면 나의, 혹은 우리들의 토대 혹은 시작이 없었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다. 한꺼번에 만난 것은 정말 27년 만이고 이야기가 제멋대로 진행되면서도 무언가 무르익는 듯한데, 그게 또 당연하게 모종의 총체를 이루는 듯한데 그는 말이 없는 듯 그냥 답변만 하는 듯 하면서도 그 총체의 얼개 역을 한다. 형식이 가장 위대한 내용으로 되는 순간, 혹은 현실주의가 형식으로 되는 순간? 이영창이 다소 느닷없이 `출세한` 송병춘을 물고 늘어지는데 그의 표정이 무덤덤하니 `극좌파`가 법조계 인사로 변하는 것도 발전 같고 그걸 시비 거는 일도 발전을 위한 일 같고 그걸 그냥 두는 일도 발전을 위한 길 같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발전을 당연하게 만드는 27년의 존재 같으다. 나라보다, 전망보다 더 큰 인품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그냥 진보적인 인품인가? 아니다.
죽은 채광석은 워낙 욕이 무차별해서 누구도 사정거리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정작 유영표에 대해서는 지레 겁을 먹었는데, 인품(채광석은, 그도 눈물겨운 사람이지만, 소위 인품`과科`는 아니다) 때문이 아니라 실력 때문이다. 어휴, 영표 걔 한테는 안돼, 히히? 미국문화원엘 가서(그때는 소위 `불온 문서`를 보려면 `자유민주주의`의 미국 문화원 도서를 대출받는 게 가장 빠를 때다) 중국관계(그때는 민주화운동가들이 모택동 사상을 가장 궁금해 했을 때다) 책을 좀 보려면 어김없이 대출증에 유영표 이름이 있는 거라. 걔 한텐 안돼? 당시 채광석이 서울 사대 출신으로 문리대의 쟁쟁한 운동스타들에 대해 부러워하고 주눅든 만큼 욕도 많이 해댈 땐데, 그런 반응은 채광석을 잘 아는 나로서는 여간 놀라운 게 아니었다.
80년대 초 그가 허름한 지하방에 살고 아내(민주당 국회의원 장영달의 동생이다)가 아이를 낳았는데 끼니 걱정을 할 정도라는 소문을 듣고 나는 차미례(세계일보 논설위원) 와 함께 임산부용 고급 쌀 두말을 직접 어깨에 지고 찾아간 적이 있다. 소문은 (당연히) 헛소문이었고 두 내외는 놀란 눈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러나 난 사실 별로 놀라지 않았다. 헛소문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잠시고 나는 뭐랄까 나는 나의 토대에 대한 애정을 `쌀`로 보여주어야겠다는 내 아이디어가 스스로 기특하고 즐거웠을 뿐이다.
토대라? 토대는 말이 없다. 그냥 있을 뿐이다. 하긴 왜 토대가 말을 하겠는가. 토대는 전망과 희망의 흐름이자 육체일 뿐이다. 사실 80년대는 `말`이 험악했다. 이론이 1년 단위, 심지어 학기 단위로 바뀌고 과격이 능사고 그러므로 어지간한 `전설의 선배`도 후배들의 존경과 신망을 1년 이상 담보하기가 어려웠던 시기다. 과장해 말하자면 어제의 형님이 오늘은 (새 이론을 못 알아듣는) 멍청한 새끼로 내일은 (다른 생각을 하는) 개새끼로 모레는 (운동에 해악을 끼치는) 나쁜 새끼로 둔갑하기 일쑤였던 시절이다. 유영표는 생업으로 <매일경제> 신문사 출판부에 오래 근무했다. 그는 처음부터 오래 근무한 베테랑 같았고 그런 채로 아주 오래 근무했다. 그리고 IMF로 회사가 어려워지던 와중에 방계회사형식으로 (주)매경 바이어스가이드를 독립시켜 대표를 맡았는데, 한국 상품을 해외에 소개하는 책을 만드는 회사다. 어, 그런대로 괜찮아. 뭐 전보다 낫지. 뭐, 그렇다고 떼돈 버는 건 아니고? 그는 친구나 후배의 생계를 제일 먼저 궁금해하고(그래. 하는 일은 잘 되나?) 잘 된다는 소리를 들을 때 반색의 강도를 높인다. 그게 오랜 습관이 되어, 자기 생계를 얘기하는데도 남 생계를 챙기는 투다.
마지막으로, 정말 이상한 일이다. 유영표 또래의 운동권은 눈에 보이는 운동권의 가장 나이 많은 세대로 후배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는데, 정작 생계에 몰두한 듯 보이는 그를 욕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물론 그가 운동과 연을 끊었을 리는 없고, 만날 때마다 그의 정세 판단은 유연하고 정확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후배들의 욕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긴조 9호` 후유증이 `극좌파 조급증`과 중첩되는 욕-악몽의 세월을 분명 겪지 않았는가. 나는 그 `마지막 정말` 이상함이 사실은 현실주의적 희망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일상에 뿌리를 내리는 동시에 가장 넓은 시야와 반경을, 스스로 지닐 뿐 아니라 남에게도 마련 혹은 허용하는 일. 유영표에게는 그것이 체질화되어있다. 최소한 나를 비롯한 5. 22세대는 그의 반경 속에서 화려함에 주눅들거나 물들지 않고 시시콜콜한 일상의 현실주의적 의미화-심화를 통해 반경을 넓혀 가는데 알게 모르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위에 소개한 여러 운동들은, 그의 반경 덕분에 잡다함을 다양함으로 다양함을 열린 통로로 열린 통로를 새로운 중심으로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위에 지하운동가는 없었나? 송병춘이 좀 경험이 있었을 법 하군? 그러나, 질문도 우문이고 추론도 부질없다. 지하운동단체야 말로 유영표에게서 가장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 지하조직이요. `하고 조직표에 내색을 하는 순간, `나 지하운동가요 `하고 얼굴에 내색을 하는 순간, 거꾸로 모든 지하당 사건이 공안당국의 조작이었다고 주장하는 순간, `지하운동`은 어불성설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시절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김상진의 죽음을 일상의 밝음으로 전화시키려는 노력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그리고 대중적인 지하운동 아니겠는가. 아니 더 나아가서 세상과 화해하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을 고치겠는가. 이 분이 정말 대단해. 누가 그런 일을 하겠어. 표 나지 않고 일만 많다는 게 아니라, 그것도 있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차가 파할 분위기고 안종건이 기념사업회 사람들을 데리고 먼저 갈 태세라 유영표가 그렇게 서둘러 당부 또 당부였는데, 그때 그는 정말 오늘 모인 모든 사람들의, 그들의 직업과 운동의 27년을 세상과 화해시키고 있었다.
ps. `할 말 안 할 말`을 연재하면서 `붓끝` 함부로 놀린 것 때문에 `혀끝`으로 사과한 적은 종종 있었는데, 유영표에게 감동하느라 술기운이 너무 편안해졌는지(나는 취기보다는 `편안 ` 때 실수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이번에는 `혀끝` 함부로 놀린 것 때문에 `붓끝`으로 사과해야할 일이 생겼다. 2차를 가서, 조금 더 친해서 더 다투기 쉬운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다가 나는 그 중 한 후배에게 `니가 진지해서 문제냐. 천박해서 문제지. `라고 했다가 아주 개새끼 소새끼로 작살이 났다. 자신의 옛 데모 후배와 세상을 화해시키려는 유영표의 더욱 구체적인 노력에 더욱 감동, 갑자기 유영표의 가신(家臣)이 되고 싶었던 걸까. 어쨌거나 내가 `영표형` 앞에서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가 진지해서 문제냐. 천박해서 문제지. 나부터 그래. 영표형 앞에서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선배 발치도 못 따라 가면서 후배들, 혹은 신세대들 탓만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 들어. `였다. 어쨌거나 모처럼 밤술자리에 불려왔다 지 남편 개새끼 소새끼 듣는 봉변을 당한 우리 마누라가 집에 와서 나를 위로키는커녕 못지 않게 작살을 냈으니, 그만 용서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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