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5분 늦었나. <섬>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가 매우 당황한 기색으로 사죄를 하는데, 대통령 면담하듯 정중하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전에 한번 와본 적 있는데 찾기가 정말 힘들군요. 죄송합니다…. 너무도 착실하게 생긴 외모에 건실한 체구에 격식을 한껏 갖춘 정장에(그와 가깝게 지내는 방송작가 강경미에 의하면 그는 연예인 중 베스트 드레서일 뿐 아니라, 방송이 끝난 후 의상을 챙겨 제자리에 깨끗하게 갖다 놓는 유일한 연예인이다. 그건, 그에게, 의상이 예의고 예의가 의상이라서 그런 것 아닐까?) 윗도리를 벗으니 요란하지 않아서 더욱 고급스러운 '비단풍' 조끼까지 차려입은 그가 그렇게 '사과 의전행사'를 치르고, 술 대신 콜라를 시키고(그는 예전에 술을 마시고 크게 실수를 한 후 대오각성, 술을 끊었다는데, 나는 그 얘기를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가 쑥스러워할 것 같아 그랬던 것 보다는, 그의 코메디는 그런 '웃기는 경험담'과 좀 다르기 때문에 그랬던 면에 더 강하다.), '제가 술을 못 하니 심심하시겠네요. 어쩌죠?', 그렇게 '앞으로의 예의'까지 챙기고 나서 화장실에를 가니 사진담당 전홍기혜, 그녀는 요즘 '올해 30이 되었다. 그리고 혼자다', 라는 말, 심지어 '외로움'이란 단어까지 심심찮게 발설한다는데, 그런 분위기를 일거에 씻어 내리면서 벌써부터 걱정이다. 얘기가 잘 되겠어요?…. 무슨 말을 물어볼 건데요?…. (다시)얘기가 잘 되겠어요?…. 물론 정재환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그가 코메디안과 너무도 달라 보여서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마라. 정재환은 내가 아는 한 잔 머리 혹은 잔 대사 능력은 좀 뒤질 줄 모르지만 연기력은 가장 절묘한 코메디언이다. '할 말 안 할 말' 시리즈에 든 대상이 모두 그렇듯, 그냥 한번 만나볼까 그랬던 게 아냐…. 다소 희한한 이 글의 제목은 그때 떠올랐다. 이 글은 제목을 설명하는데 그칠 것이라는 예감도.
코메디라. 글쎄요. 그 쪽은 손 놓은 지 벌써 7, 8년 되는데…. 그래도 코메디언 중 가장 모범적이고 또 문제의식이 많아 보인다는 게 중론이던데요?…그래요? 제가 좀 그래요. 문제의식이 있어 보이는 게 문제죠…. 화장실에 갖다 온 정재환과 다시 대담 격식을 갖추고 대담용 인사를 한 후 1분이 채 안되어 오간 대사다. 나는 이럴 때 정재환이 가장 좋다. 아니, 이럴 때 코메디의 본령을 느낀다. 이를테면 이렇다. 인터넷 구글검색기 한글판(www. google. co. kr)에서 '코메디안 정재환'을 찾으니 '일치하는 문서를 찾을 수 없'다. 어, '코메디언'인가? 그러나 역시 '찾을 수 없'다. '개그맨 정재환'을 찾아야 비로소 정보들이 뜨는데, '스타일기'라는 이름으로 스포츠신문에 연재된 것이 2000년. 그것 외에 그는 인터넷 언어 순화운동 모임인 '한글문화연대'(www. urimal. org) 부대표(그는 이 관계 책도 냈다)고, 40 나이에 성균관대학교에 입학(그의 '언어 순화운동'이 너무 인상적이라 국문과에 입학한 걸로 오해하는 이가 많은데, 사학과다)했는데 학점이 계속 올 A에, 받은 장학금을 모두 '좋은 데 써 달라'며 반납한다는 것…. 정말 '코메디'는 어디로 갔지? 정재환이 '손 놓은 지' 7, 8년 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코메디를 버렸거나 코메디가 세상을 버린 지(사실 같은 얘기다) 7, 8년쯤 되는 것 아닐까? 웃음은 21세기의 화두다. 혼기를 맞은 여성들이 꼽는 '문화적으로' 이상적인 신랑감 1순위가 '재밌는' 남자다. 개그맨이 MC-방송계를 거의 지배한다. 그런데, 코메디는 실종되었다. 그는 그렇게 삽시간에 우리를 '아주 조금만,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는 참으로 잘생겼다. 코메디언 혹은 개그맨 치고 잘 생긴 게 아니라 연예인 치고(도) 잘생긴 게 아니라 보편타당하게 잘 생겼다. 코메디언 아닌 줄 알죠…. 그런 것 같아요…전홍기혜가 양볼에 귀여운 보조개 웃음을 도드라트리며 (이직도)걱정되는 내색을 표하듯 살며시 감싸듯 하는데, 자세히 보니 정말 신기하다. 한국-일본-조선족의 얼굴을 한데 모은 다음 각 민족의 역사적 울화 혹은 피학-가학성으로 인한 결과로서 흔히 종족적 특징으로 묘사되는, 그러나 사실은 살벌한 오기의 네안데르탈인화(化)에 가까운 면모(이를테면 5. 16군사쿠데타 직후 육군소장 야전복장에 라이방(썬글라스)을 쓴 박정희, 그 전에, 수백만 군중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히틀러, 최근에는 목표 실종으로 더 열받은 부시 미국대통령 등등, 하여간 파시스트[혐의]자들이 연상시키는)는 전부 삭제하고 각 민족들이 역사의 발전에 무리없이, 자신도 모르게, 그러므로 사심없이 기여할 때의 느긋하고 온화한 미래전망의 결과로서, 흔히 세계화의 결과라고 미리 오해되지만 사실은 고유한 민족적 진보의 일상화에 달하는 면모(이 면모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나는 오사마 빈 라덴의 모습이 성자를 닮았다는 주장에 동조했을 것이다) 만을 합쳐놓은 듯 하다. '일상화'가 표나지 않는 것이듯, 그의 잘생김도 표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그 '표나지 않음'을 '아주 조금만' 갸우뚱한다. 일단 공을 차 넣는 겁니다. 그런 다음 살금살금 들어가서 걸리면 공 찾으러 온 거고, 안 걸리면 쌔비는 거죠…. 그를 개그맨으로 출세시켰던 <청춘행진곡-전도협>의 대사다.
자, '문제의식이 있어 보이는 게 문제'인 그의 '문제의식'은 뭔가? 방송사 별로 코메디 프로그램이 너무 적어요. 2-3개 정도? 드라마에 비하면 너무 적은 거죠. 하긴, 연기자 숫자가 개그맨에 비해 훨씬 많으니까. 그런데, 드라마가 시청률이 떨어지면 다른 드라마로 교체하지만, 코메디는 프로그램 자체를 없애버린다는데 문제죠. 지속적으로 활동할 여건이 안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나이 든 분들이 할 연기가 없고. 거, 왜, 명절 때마다 해주는 <미스터 빈>이라는 코메디 있잖아요? 그 사람이 나오는 코메디를 한편 자세히 봤는데, 별거 없더라고요. 우리나라 코메디 수준이 더 높아요. 제약만 없으면. 성적인 묘사에 있어서나, 정치적 소재를 다루는데 있어서나. 외국 같은 경우는 방구(放氣) 뀌는 게 자연스러운데…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또 이따금씩 맞장구를 치거나 딴 의견을 내거나 그러다가 '방구' 얘기를 들으니 시트콤 생각이 난다. 그래, 작년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이른바 방송가에 '시트콤 시대'를 열었던 <순풍산부인과>에서는 박영규의 방구가 이야기의 소재를 넘어 계기로까지 활용되는데, 그리고 일본 만화작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초기작으로 <드래곤 볼>의 대히트 덕분에 뒤늦게 덩달아 빛을 본 <닥터 슬러프>에서는 똥이 또한 그러한데, 왜 코메디에서는 안 될까? 코메디가 시트콤 보다 더 고급이라는 얘기? 아니면, 시트콤은 일상적인 듯하지만 방구 냄새가 직접 풍길 리 없는 '바보상자 TV 속'이고 코메디는 과장된 듯하지만 방구 냄새가 직접 풍길 것 같은 '삶의 무대 위' 분위기를 여전히 갖고 있다는 걸까?
사실, 웃음이 21세기의 화두로 되면서 동시에 웃음의 본령이자 거처인 코메디를 떠나 토크쇼 진행이나 시트콤, 그리고 '웃기는'드라마 속으로 만연 혹은 창궐하게 되는 것은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의 특징적인, 그리고 불가피한 현상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흐름은, 비극과 희극의, 고상한 것과 저열한 것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절충적 중첩 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플롯으로서 드라마'의 해체다. 이 흐름은 역사적 전망 해체의 대중문화판(版)이다. 물론 사극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며, 말이 안 돼도 상관없는 이야기며, 갈수록, 말이 안 돼야 시청률이 되는 이야기다. 판타지 소설에도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황당한 이야기며 황당해도 상관없는 이야기며, 황당할 것을 미리 예상하는 이야기며, 황당할수록 컴퓨터 게임과의 관계가 더 긴밀해지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판타지는 신화를 차용하지만 신화와 정반대 방향이다. 신화는 '말이 되려' 노력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신화는 고전기의 탄생을 예감시켰지만, 판타지는 포스트모던의 도래를, 문학과 대중문화의, 그리고 컴퓨터 게임의 경계를 무너트리며 증거한다.
모든 대중현상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연예인 토크쇼의 사소한 신변잡기가 인기를 끄는 이유와 사극이 인기인 이유가 서로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변잡기'와 '말 안되는 이야기'의 상관관계를 지적하지 않고 되는대로 툭툭 하나마나하게 '저열' 운운으로 씹어대는 얼치기 지식인 보다는 대중이 훨씬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말 안 되는 이야기'를 말 안 되는 이야기로 즐기다가 그것도 시들해지면, 구체가 재밌고 섹슈얼한 이성(異性) 유명 탤런트들의 육성을 듣고 육감을 느끼는 짜릿한 기쁨을 위해 채널을 바꾸니 말이다. 이렇게 웃음은, 아니 웃음이 '코메디=이야기'를 해체한다. 이 흐름의 예감은 <쇼쇼쇼>의 곽규석이었다. 그 이전에 장소팔-고춘자의 만담이 있지만 복고적이라서 우스운 면이 더 강했다. 김희갑,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은, 위대한 코메디언인 바로 그만큼 이 흐름에 역행했다. 남보원-백남봉은 개그를 이야기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던,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심형래 세대는, 1980년대 초-중반 생음악 맥주집의 막간 코메디 전력이 보여주듯, 과도기적이다.
선두주자는 이경규와 주병진이다. 그리고 이 둘은 '이야기와 무관한 코메디언'으로 출발했다. 주병진이 '이야기 세계'로 돌아온 것은 '성폭행' 재판과 연관해서(만이)다. 이 흐름의 총화는 단연 서세원. 그는 마지막 이야기 세대지만 이 흐름의 으뜸 가는 프로다. 하는 일 , 하는 말, 심지어 복장에서조차 포스트모던하다. 그러므로, 그가 '이야기'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내를 동반한 광고에 출연하거나, 영화 <조폭 마누라>에 대규모 자본 투자를 하는 방식 말고는. 이홍렬은 모종의 '정확한 중간'에 위치한다. 김국진-신동엽 세대는 그야말로 '이야기 해체 이후' 개그의 세대다. 이들이 다시 탤런트-연기자들과 한데 어우러지는 '이야기 세계'가 바로 시트콤이다. 김희갑이 주연을 맡은 <와룡선생 상경기>나 <팔도강산>은 '코메디'연기력을 영화 '연기력'으로 전화시켜야 하는 장이었고 그때 코메디언들은 그런 연기력이 있었다. 지금 시트콤은? 다르다. 배우'연기력'이 '개그력'로 전화되어야 하는 장이다. 이때 전화는 질적 타락이다. 왜냐면, 이야기의 (해체가 아니라)타락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강호동의 개그가 땀내 진한 사나이들의 '모래판 이야기'를 해체하는 이 도저한 흐름, 코메디의 실종과 웃음의 타락 앞에서, 코메디 '장르'의 위기 앞에서, 정재환의 웃음은 무엇인가. '주변이자 바탕'이다. 그가, 그의 생각과 코메디가 건전해서가 아니라('건전한 코메디'란 얼마나 따분한가!), 좌우로, 아주 조금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갸우뚱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이후' 세대인 그가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 그것도 좋은 면으로 연결되는 것 또한 '갸우뚱' 아닐 것인가. 이런저런 얘기에 '그렇죠'와 '글쎄요'를 반반씩 섞으며 '갸우뚱' 표정을 지을 뿐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치 않았던 그의 '문제의식'이 다소, 답한다. 최근 <개그 콘서트>라는 게 인기를 얻는데, 그게 연극 개념과 결합해서 그런 것 같아요. 동숭동 연극무대 분위기와 방송을 결합한 거죠. 일주일 내내 같이 연습하고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정도 그렇구요…나도 그 프로 많이 봤는데, 재밌데요. 왜 그 <코메디 TV>라는 거 요새 생겼잖아요? 거기서 해주길래 아주 재밌게. 그런데 난 그 프로그램 몇 년 전 것 재방송하는 줄 알았어요…. 아녜요 요즘 하고 있는 거죠. 3년 째 하고 있는데…. 3년을 버텼다면, 자리를 잡은 셈인가? 그럼 다행이군. 하지만, '몇 년 전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 좀 불길하다. 웃음과 드라마=연극의 (재)결합은 포스트모던을 회피하는 복고가 아니라 극복하는 미래지향으서만 의미와 생명력, 그리고 존재이유를 갖게 될 테니까…. 난,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의 얘기는 이제 정치풍자 코메디 쪽으로 향한다.
<시사터치 코메디 파일>이라는 프로그램을 3년째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정치적인 소재를 했는데, 린다 김을 난다 김으로 한다던지, 주요 시사인물을 희화화하는 거였는데, 최근에는 못하고 있다.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김영삼 문민정부 수립 직후에는 분위기가 오히려 좋았죠. 분위기는 풀리고 소재는 참신했고 말예요. 저도 '김영삼 대통령' 흉내 역도 맡았었고, 모의국회에서 현안 토론을 하면서 기발한 돌파구를 내고 그랬는데, 지금은 소재의 참신성도 떨어지고, 돌파구는 농담이나 헛소리 수준으로 전락하고, 제약은 더 잡다해지고, 그러니, 잘 안 되죠…. '대선이 다가 오니 더 그렇겠죠. '라고 운을 뗀 후 나는 이런 내용으로 문제의식을 넓혀보았다. 김형곤의 '회장님 우리들의 회장님' 이래 시사 코메디는 한동안 크게 유행했지만 풍자의 깊이가 없었다. 한마디로 반복되는 단순 구호와 표피적인 흉내만 거듭될 뿐 내용의 발전이 없었다. 정치 코메디를 하려면 정치 자체를 코메디로 보는 철학이 중요한데, 이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집안에서는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티격태격할 것이 분명한데도 공적으로 대통령-영부인 포즈를 그럴 듯 하게 해내는 그 정황이 바로 정치의 코메디 아닌가….
그런 '존재의 우스꽝스러움'을 구현하는 일이 웃음과 이야기의 미래지향적 결합을 가능케하는 거의 유일한 경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코메디에 왠 깊이냐고? 큰일 날 소리. 그리스 비극(tragedy)이 종교적인 송가에서 비롯된 반면, 희극(comedy)은 섹스와 정치에 대한 농담에서 시작되었다. 섹스 농담은 충분히 음탕했고 정치 농담은 충분히 위험했다. 즉, 희극은 '종교적'인 비극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인간-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장 순정한 장르인 음악의 가장 자본주의적인 분야인 오페라에서 막간극 혹은 하인 보초 등 하류층에만 허용되던 코메디(buffa)가 오히려 비극을 감싸 안으며 비극을 넘어섰던 18세기 '예술의 기적'이 '웃음'을 21세기의 화두로 제시하게 된(포스트모던적이 아니라) 역사적 연원이다. 그 웃음의 화두에 답하려면 자기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너그러운 연민의 풍자정신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정치풍자를 하려면 스스로 정치가가 되고(그래서, 다시 배우의 연기력이 필요하다), 자기=정치가에 대해 연민의 풍자정신을 구사해야 한다(이때 코메디언은 기존 배우의 연기력을 능가한다). 앞에 <미스터 빈> 얘기가 나왔지만, 사실 미스터 빈은 대단한 코메디언이다. 말 몇 마디로 보자면 우리나라의 재치가 번득이는, 거의 살벌하게 번득이는 MC 개그-랩에 비할 바 못되겠지만, 연민의 풍자정신이 '이야기'를 가능케할 뿐 아니라 더 심화시키는 까닭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코메디는 이야기를 향할수록 슬랩스틱(slpapsick), 즉 , 넘어지고 엎어지고 얻어맞으며 웃기는,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학의 소극 경향이 두드러지는 운명을 아직 벗지 못하고 있다.
확실히, '문제의식이 있어 문제'라는 스스로의 표현이 맞는지, 그는 자신의 코메디에 대해 어눌했다. 겸손하기도 했지만,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인터뷰 내용이 '한글문화연대'에 관한 것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는 '갸우뚱'하면서도 논리의 맥락을 끊지 않고 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실 연기로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위의 '썰'은 그의 연기를 보고 내가 생각했던 것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아니, 내가 한 말이 정말 맞나?,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연기는 '말'했고, 나는 듣기만 했던 것인지 모른다. 자, 이게 다 무슨 소린가?
나는 화제의 방송 드라마 <아줌마>에서 정재환이 연기해낸 역할이, <맨발의 청춘>의 트위스트 김 이래 가장 중요한, 획기적인 코메디-희망의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맨발의 청춘>은 출신 성분이 다른 두 남녀의 사랑과 자살을 다룬 60년대 최고의 '비극' 영화. 여기서 트위스트 김의 연기와 역할, 그리고 연기=역할은 '삶의 애환의 접점'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아줌마>에서 정재환의 연기와 역할, 그리고 연기-역할은? 지식인의 고급한 싯귀가, 페미니즘의 첨예한 논리가 등장인물의 지적 허영을 '풍자하며 웃기기' 위해 구사되고, '시민연대운동'의 명분이 등장인물의 허위의식을 '까발기며 웃기기' 위해 구사되면서 잘못된 결혼제도로부터의 당당한 여성 해방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재미나게 전달하기는커녕 인생과 의미 자체가 '허탈하게 웃기는' 것으로 전락하려는 그 아슬아슬한 순간, 억척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삶에 가장 가까웠던 '아줌마' 원미경 곁에 그가 있었다. 극중 인물로 동시에 코메디언으로. 가장 멀쩡하게, 동시에 가장 웃기게. 그때 그의, '습관적으로, 좌우로, 아주 조금만 갸우뚱하는' 동작과 표정이 진정한 코메디의, 카메오인 듯 아닌 듯한 '갸우뚱'으로 전화되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웃음을 통한 이야기의 타락-해체 흐름을 막을 뿐 아니라 그 흐름을 역전시키면서 웃음과 이야기를 미래지향적으로 재결합할 핵심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귀기가 있는 여자는, 얼굴이 처음부터 요상한 여자가 아니라, 평소에는 매력과는 상관없이 그냥 빠지지는 않는 얼굴이다 싶다가 입가에 빨간 점 하나를 찍으면 삽시간에 소름이 쫙 끼치는 그런 여자다. 채플린 코메디로 치자면 콧수염이 너무 두드러지면서 외모와 풍경, 그리고 스토리 전체를 희화화하는 대목보다는 콧수염을 뗀, 매력과는 상관없이 그냥 좀 범상치는 않다 싶다가 콧수염을 붙이자마자 삽시간에 웃음으로 경악하게 되는 그 순간의 겹침이 본질적이며 예술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줌마>의 정재환에게는 그 순간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그 기회를 기적적으로, 아니 습관적으로, 아니 습관의 기적으로 실현시켰다. 그것은 자연스러울수록 빛나는 실현이다. 하여, 나는 그를 '건전한 문화운동가'로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싫다. 그리고 그 자신 안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건전함에 주눅 들거나 건전함을 강조하고 싶은(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자아의 일부도 싫다. 나는 그가 자신의 코메디언 역할을 보다 자연스럽게, 체질화시켰으면 좋겠다. 그가 함몰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그는 갸우뚱하는 게 체질인 남자니까.
ps. '이야기 해체' 사태를 좋은 쪽으로 극복하는 또 하나의 경로가 있다. 어릴 때 존경했고 지금도 존경하는(누누히 강조하거니와 어릴 때 존경했던 사람을 대가리 컸다고 과거의 존경빚 독촉하듯 '변했네' '한 물 갔네' '알고 보니 나쁜 놈이네' 그런 식으로 깎아내릴게 아니라 어릴 때 존경했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계속, 평생 존경한다면 우리나라 문화풍토는 훨씬 풍요로워진다) 남보원을 자주 만나 술자리에 끼인 적이 있는데, 그가 특기인 원맨쇼에다, 그 쇼 중간 중간에 들려주는 살아온, 고생한 인생 경험담을 합하면 그의 '이야기'가 완성되고 그때 그 '이야기'는 채플린의 코메디 예술에 달한다. 대중예술가를 '밝음의' 엔터테이너로만 취급, '어둠의' 장례기사를 싣지 않던 관행이 깨진지 오래되었지만, 더 시급하게 또 주도적으로 창조되어야할 관행이 바로 코메디언의 코메디와 '코메디 그후'를 적절하게 섞는 문화다. 왜냐면 삶에서 승리하는 것이 끝내 승리하고 삶과 무관한 것은 끝내 사라진다. 코메디로 말하자면, 웃음에는 낭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코메디는 예술 속 삶이고, 갈수록 가상현실로 되어가는 대중문화의 현장에서 더욱, 삶을 닮아가야 한다. 또 하나의 경로는, 물론, 죽음과 웃음의 의사소통 혹은 겹침이지만, 이것은 코메디 만이 아니라 예술 전체의 문제고 희망이며 삶의 궁극적인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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