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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장정일’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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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작 ‘장정일’은 누구인가

신간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중 남재일의 장정일論

장정일의 인간적 면모와 문학세계를 종합한 일종의 평전의 책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행복한 책읽기)가 지난달 출간돼 화제다. 이 책에는 구광본, 임형욱 등 동료 문인, 변호사 강금실, 전직 기자 남재일 씨 등의 글과 장씨 본인의 작품 및 단상이 담겨 있다. 영화 제작이 추진 중인 시나리오 ‘보트 하우스’도 실렸다.

20컷에 이르는 사진 자료와 소설가인 부인 신이현이 그린 일러스트들을 삽입함으로써 작가 장정일의 모습을 더 실제적이고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을 출판한 ‘행복한 책읽기’는 “장정일이라는 이름 석자는 TV뉴스를 통해 대한민국 곳곳에 파고들었지만 정작 장정일이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작가인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우리시대의 인물읽기 시리즈의 첫 번째 인물로 선정했다.

특히 ‘거짓말 사건’이후 장정일은 슬그머니 문학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난 듯이 보이지만 그를 다시 조명해봐야 하는 이유는 장정일이 일으킨 파장이 한때의 소동이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서 제대로 탐구되어야 할 사건이라고 출판사 측은 밝혔다.

<장정일..>중 소설가 장정일을 오랜 기간 만나왔던 남재일(전 중앙일보기자, 고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씨의 글 전문을 필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싣는다. 편집자

***아주 단단하고 뾰족한 그리움**

***프롤로그**

햇수로 10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기자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사무적이면서도 동시에 사적이다. 특히 문화부에서 만난 작가들이나 영화감독들과의 관계는 그 이중적 성격이 더 강했다. 취재대상이 개인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고, 취재내용도 다분히 사적인 예술세계를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맺어지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기자직을 그만두고 나서 뒤돌아보면 결국 기자가 만나는 사람은 두 부류밖에 없는 것 같다. 하나는 내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필요에 의해 만나서 사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지만 그 사적인 친분이 필요의 부재를 대체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장정일을 만난 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를 발표한 직후 문학담당이었던 나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느 다른 작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드문드문 만나 술 마시고 문학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헤어지는 관계를 유지했다. 다른 담당에 비해 취재원과의 관계가 사적인 편인 문학담당 기자가 성실하게 취재원 관리를 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기자생활을 그만두면서 취재원 관계로 만나던 사람들 대부분과 사적 친분도 흐지부지됐는데, 장정일과는 여전히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만남의 성격도 달라졌다. 더 이상 만남의 내용을 음주량으로 채우지도 않게 됐고 문학에 관한 얘기도 하지 않게 됐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이 대구의 한 서점에서 만나 저녁 먹고 차 마시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지는 게 보통이다. 가끔씩 이른 시간에 만나면 영화를 보거나 목욕탕에 가는 일이 고작이다. 그런데도 둘 사이의 침묵이 불편하지 않고 아주 오랜만에 만나도 엊그제 본 것처럼 어색하지 않게 됐다.

더 이상 주장도 반박도 않게 됐고, 남들 걱정 않고 세상 걱정 않게 됐다. 다변으로 친밀함을 표현하고 날선 주장으로 서로를 보여주지 않아도 투명하게 보이는 관계. 그래, 어느새 우린 친구가 돼 버린지도 모르겠다.기자 생활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 친구가 된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정일의 경우는 그 과정이 좀 특이하다.

영화감독 H의 경우는 처음부터 취향이 끌렸고 자주 오래 만나면서 친해졌다. 연애 초기의 남녀가 그렇듯이 하루가 멀다하게 만나고 주변사람들 연루시키고 단둘이 여행도 가보고 개인적인 비밀도 털어 놓으면서 친구가 됐다. 장정일은 첫 만남부터 H의 경우와는 사뭇 달랐다. H는 완전무명의 감독이었을 때 처음 만났고, 장정일은 이미 문학담당 기자의 고정적인 취재원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첫 대면했다. 그리고 장정일을 처음 만났을 때는 개인적으로 끌리진 않았다. 기사의 소재가 되는 작가이고 외모나 글이 다 완강하게 자기를 고집하는 그 강한 힘에 호기심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장정일과 나의 공통점을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한 일(一)자라는, 이름에 쓰면 단명하거나 고독해진다는 그 글자로 끝나는 것 이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금 내가 그를 평생 변하지 않을 친구로 생각하게 됐는지 그 계기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를 만날수록 나를 끄는 것은 촉각적인 매력이 아닌 어떤 막연한 믿음이라는 것만 어림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오래 보지 않아도 한가닥은 같이 있는 것처럼 늘 맞닿아 있고, 시간 오래 흘러 피차 이것저것 많이 변해도 유행가의 곡조처럼 변치 않을 마음의 한 대목은 나눠 가질 거라는 믿음 말이다. 나는 그러한 믿음이 언제 어떻게 내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는 일은 내 개인적으로는 그 믿음의 진원지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첫 만남**

서소문 중앙일보 구내 커피숍에서 장정일을 인터뷰하기 위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다소 상기된 얼굴이었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직후 그가 호주머니에서 신문에서 도려낸 작은 기사조각을 꺼냈다. 모 일간지에 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 대한 서평이었다.

“아니 작가가 1년 동안 공들여 쓴 소설을 이렇게 한마디로 매도할 수가 있심니까. 기자가 그럴 권리가 있심니까.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안 쓰면 되는 것 아닙니까.”그가 보여준 기사 조각은 ‘신간안내’ 코너에 실린 한 줄짜리 서평이었는데, “어느 성도착자의 변태적 성 행각을 그린 소설”이라고 간단하게 언급돼 있었다. 내가 봐도 그 기사는 당시 장정일이 가진 뉴스가치를 감안하면 이상하리만치 홀대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상했던 것은 극도로 흥분한 장정일의 태도였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혹평을 받으면 몹시 감정이 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평가에 조금도 동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의 작가들은 속으로 삭인다. 불만을 터뜨려 봤자 혹평이 찬사로 바뀌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평가에 대한 침묵을 더 성숙한 인간으로 보는 작가에 대한 관습적인 시선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기자가 작가를 만날 때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 관습적 시선이 바탕에 깔려 있게 마련이다. 나도 그랬고. 장정일은 그 시선의 요구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낯섬......혼돈......판단중지......호기심의 순으로 나는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 느낌은 적정한 거리를 전제로 더 이상 다가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못하게 하는 관찰에의 욕구 같은 것, 다시 말해 관음증적인 것이었다.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제안으로 신촌에 있는 우드스탁에 가서 맥주를 마실 때까지도 이 야릇한 긴장감은 풀리지 않았다. 거기서 오고간 이야기 중에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물 이야기밖에 없다. 아마도 재즈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내가 “재즈를 들으면 온 몸의 나사가 죄다 풀리는 것 같는 느낌이 드는데, 물에서 천천히 유영할 때 이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고 하자 그는 “목욕탕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목욕탕보다 수영장을 좋아하고, 물과 햇빛과 바람이 적당히 섞여 있는 공간이 좋다”고 하니까 그는 “아주 감각적이네요. 나만큼이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어느 시점에선가 그는 아주 사적인 스토리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 나는 순간 이런 얘기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해도 되냐는 생각이 들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개인적인 관계로 빠져드는 데 대한 기자로서의 반사적인 거부반응도 있었지만 공통의 성감대를 찾아 전신을 포개놓는 그 거침없는 직설의 화행을 통한 관계맺음이 개인적으로 익숙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드스탁을 나오면서 나는 인터뷰할 때 그의 태도나 맥주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들이 그로서는 최대의 호의를 베푼 것이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그와의 사이에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은 별로 사라지지 않았다. 뭐랄까, 그의 질감은 아주 물컹한 것과 아주 날카로운 것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있었다. 그의 외모와 표정부터가 그랬다. 체형과 얼굴을 롱샷으로 잡으면 동자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표정을 클로즈업하면 검술 수업을 받는 소년 사무라이가 거기에 있었다. 그의 말은 동자승의 감수성으로 세계에 다가가고 사무라이의 칼 끝으로 인식하는 절대고독의 울음이 배어 있었다. 내가 본, 혹은 만든 그의 이미지에 내재하는 이 불균형의 이원론은 그를 거듭 거듭 만나면서 하나의 탄착점으로 녹아들어 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하나의 완성된 탄환으로 정해진 탄도를 날고 있었을지도 모르며 변한 것은 그가 아니고 나의 시선일 수도 있다. 어찌됐건, 지금 나에게 그는 하나의 양감, 그리고 하나의 질감으로 와 닿는다. 그건 작가 장정일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인간 장정일일 수도 있다. 그 둘 사이에 부조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촌에서**

내가 처음 장정일을 만났을 때 그는 은평구의 한 동네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 가보지 않았다. 주로 신촌에서 만나 소주를 마시거나 락카페에서 음악을 들었다. 문학판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중간에 합석을 하지 않는 한 네 명 이상을 넘지 않는 자리였다.

그는 사람 많은 행사와 모임을 피했다. 이때 그에게서 받는 인상은 약간 불안하고 늘 진지하고, 그리고 강한 공격적 의지로 생활을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 거의 농담을 하지 않았다. 술은 소주를 좋아했는데 마시는 속도가 물 마시듯 했다. 술이 세서 잘 취하지 않았지만 일단 본인이 ‘갔다’고 느끼면 소리없이 사라지는 버릇이 있었다. 한번은 이대 앞의 ‘올로올로’에서 2차로 맥주를 마시다 화장실을 갔는데 소식이 없어 한참이나 찾아다닌 적이 있다. 나중에야 나를 찾으러 나온 김완준으로부터 ‘자주 그런다’는 얘길 듣게 됐는데, 사실 이때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습성을 가진 인물을 내 주변에서는 처음 봤기 때문에 무례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하지만 한참 후에야 그런 버릇이 자신을 지키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장정일 특유의 직설법임을 이해하게 됐다.또 한가지 이때 받은 인상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장정일의 돈 씀씀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장정일이 지갑을 갖고 다니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못 본 것인지 아예 지갑이 없는 것인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늘 만 원짜리 몇 장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물론 신용카드는 없다. 그러니 그는 하루 지출할 최대한의 액수가 정해져 있는 셈이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간혹 비싼 술자리로 이어지면 그는 계산대 앞에 그냥 서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면 장정일의 문청시절 지기이자 나의 고등학교 짝지이기도 한 김완준이 우스개로 “그게 다 장정일의 배째라 작전이야”라고 속살대곤 했다.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장정일의 진짜 작전임을 깨달았다. 그것도 경제의 범위에 한정된 작전이 아니라 그의 삶을 관통하는 작가로서의 생존전략임을 알 수 있게 됐다.“Y형 같은 경우만 해도 그럭저럭 몇 년 소설쓰다 힘 떨어지면 어디어디 문창과 교수로 안 가겠심니까. 그런데 나는 전혀 호환이 안 되는 작갑니더. 글 못 쓰면 죽어야 됩니더.”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작가라는 말이 문화적 호사를 예약해 주는 작위가 아니라 직능을 보증하는 자격증이어야 했던 듯 싶다. 그의 불온한 발언들, 그의 불안한 생활여건들, 그의 불투명한 미래를 상상해 보라. 그 어느 것도 쉽게 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이 삼중의 악조건을 작가라는 하나의 끈으로 꿰어 매고 끌고 나갈 수 있는 출구가 필요했다. 그 출구는 몹시 좁았고 그는 자신의 몸을 거기에 맞추기로 작심하고 혹독한 감량에 돌입했다. 작가에게 덧씌워지는 화려한 장식은 노동에 방해가 된다.

그러면 버린다. 어떻게? 존재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얻는 날선 자의식의 검으로 단칼에 베버린다. 상처에서 나는 피는 고독에 소비되는 영양의 보충을 위해 핥아 먹는다. 발언의 불온지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든 국가에서 권장하는 커뮤니티에 소속되지 않는다. 어떻게? 우선 세계에서 가장 결속력이 강하고 보수적인 한국의 학부모는 되지 않는다. 다른 커뮤니티도 태업으로 일관한다.

다음은 불안한 생활여건을 불안정하게 안정시키기 위해 모든 감각을 가난한 놀이에 길들인다. 택시와 양주를 적으로 간주하고 핸드폰과 신용카드를 배척하고 브랜드 중독에 걸린 미인을 보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전염병 환자로 기피한다. 그렇게 긴축으로 남는 힘은 모두 불안한 미래와 싸우는 병참기지에 저장한다. 책을 사서 독서일기를 쓰고, 재즈CD를 사서 말라가는 가슴 한 귀퉁이에 스프링클러를 달아주고, 가끔 지기의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사면서 체온을 나눈다.

그렇게, 그렇게 하산할 날을 꿈꾸며 언어의 칼 끝에 시선을 집중하다 보면 앞을 가렸던 안개는 걷힐 것이다. 거기에 어떤 풍경이 오든 그게 무슨 대수랴. 나는 장정일의 삶의 서사가 구성된 과정을 이렇게 상상해 본다. 처음 만났을 때 어색해 보였던 그의 단속적인 행동들도 이 서사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내가 그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거짓말 사건’이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를 좀 더 가까이서 알 수 있게 됐고, 이때 받은 인상이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결정지웠던 것 같다.

***거짓말과 장정일의 진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한창 논란이 되고 있던 97년 봄 나는 ‘J─스타일’이란 특집면을 만드는 부서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2년 앞서 영화담당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취재원으로 장정일을 만날 일은 없었다. 그는 가끔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것과 관련해서 전화를 했고 가벼운 안부 정도를 묻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J─스타일의 창간호를 준비하고 있을 때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한창 논란이 됐고 나는 장정일의 입장을 옹호하는 기사를 썼다. 그 직후인 97년 3월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다시 장정일에 관한 기사를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기사는 한동안 뜸했던 그와 다시 자주 접촉하는 계기가 됐다. 장정일로서는 ‘거짓말’을 둘러싼 상황이 심적으로 부담스런 상태였고, 사회적 반응이 어떻게 귀결될지 궁금해 했다.

나는 “성적 표현의 수위나 여주인공이 고등학생이란 설정이 금기의 선을 넘어간 것 같다”며 “내가 판사면 골치 아프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한술 더 떠 “맞심더, 내가 판사라도 구속 안 시키겠습니까”라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었지만 그는 이미 구속을 각오한 것 같았고, 그 소설 자체를 하나의 퍼포먼스로 던져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한창 논란을 빚고 있던 5월 나는 칸 영화제에 가게 됐다. 그때 장정일의 처인 신이현은 파리에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 장정일을 만났을 때 그는 “파리로 나오면 집사람한테 재워달라 하이소”라며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칸 영화제에 갔다가 나오면서 파리에 들러 신이현의 집에서 이틀밤을 신세졌는데, 그때까지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고작 전화로 원고청탁하면서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다. 장정일은 남들이 불편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일을 아주 쉽고 편하게 생각하고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거짓말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문학계의 예술작품 인정 감정서가 필요해서 적임자를 찾고 있을 때였다. 자격 요건은 문학평론가나 문학전공교수였는데, 대중적인 지명도가 높은 인물일수록 유리한 상황이었다.

나는 평소 장정일과 친분이 있던 이인화가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옆에 있던 신이현도 같은 뜻을 비쳤다. 하지만 장정일은 난색을 표명했다. 대학교수로 있는 사람을 이 사건에 연루시켜서 폐를 끼칠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장정일은 이인화와 함께 계간지 좬상상좭의 편집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냥 쉽게 부탁할 수도 있을 법한데, 끝내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이후 이 문제가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기 직전 신촌의 한 술집에서 만나 검사의 질문에 대한 예상 답변을 만들 때의 모습이다. 이런저런 가질문을 만들어 보고 그에 대한 모범답변을 요약해보는 일을 하다가 문득 그러한 광경 자체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그는 내뱉듯 이런 말을 했다.

“이번 사건 끝나면 닥치는 대로 대중매체하고 인터뷰해야겠심더. 여성지하고 하고 주간지하고도 하고 연예정보지하고도 하고 되는 대로 많이, 평소에 내 주장을 해야 싸움이 될 거 아닙니까.”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나도 상가도 가고 결혼식도 가보고 그래야겠심더.”나는 지금도 그 말이 반어적인 자기 다짐으로 이때껏 자기가 살던 방식을 더욱 굳건하게 지켜나가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작지만 빈틈없던 단단한 아성의 균열을 목도하는 탄식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다만 그는 지겹도록 바뀌지 않는 세상의 공고함을 소름끼치게 피부로 느낀 듯 했고, 문학판의 대응자세에 대해서는 많이 섭섭해했다. 그러나 그 섭섭함에 대해서는 이내 자신의 퍼포먼스에 뒤따르는 필연적인 증상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삭였다.

이때까지도 그의 이미지는 분노에 찬 도시의 게릴라나 머리띠를 동여매고 파업을 주동하는 선동가를 연상시켰다. 거기에는 늘 적이거나 동지이거나 관중의 존재가 군살처럼 붙어 다녔다. 하지만 실형을 살고 나온 다음 그는 훨씬 날씬하고 단단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옛날 소년원 생각하고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감방도 많이 민주화됐심더. 같이 있던 사람들도 비교적 양질이고요.”그는 남의 얘기를 하듯 무심하게 감옥생활을 얘기했다. 마치 정리된 기억의 한 토막을 서둘러 과거로 흘려보내고 더 이상 이 문제로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이미 그는 감옥에서 많은 생각을 한 듯했다. 어쩌면 감옥의 창살 틈새로 새삼스럽게 파고드는 외로움을 껴안고 한동안 씨름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세상과 싸워 이기기보다는 자신과 싸워 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

확실히 그는 세상을 바꾸려는 파업에서 오래 자신을 지키려는 태업으로 삶의 전략을 수정한 듯 했다.감옥에서 나온 뒤 그는 이 문제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문학동네에 대해서도 별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얼핏보면 예나 다름없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주 조용하고 미세하지만 뭔가 확실한 내면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한마디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사람관계는 변했다. 사무적인 것은 더 사무적으로 개인적인 것은 더 개인적으로 정리가 됐다. 어떤 혹독한 사회적 체험을 겪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에게도 피아의 경계가 엄격해질 대로 엄격해졌다.

그는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관계의 정치적 항상성도 물리적 연속성도 기대하지 않게 됐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한순간이라도 고마움을 느낀 사람들에게는 보복하듯 두 배의 정을 주고 남이 된 사람들에게는 침묵하게 됐다.감옥에서 나온 한참 뒤의 일이다. 장정일은 내게 자신의 변호를 맡은 강금실 변호사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지금 벤처기업 전문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변호사로 있는 강 변호사는 장정일의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선뜻 자기가 하겠다고 자원해서 변호를 맡았다.

강 변호사와 저녁을 먹기 위해 대구에서 상경한 장정일은 신촌의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약속장소인 강남의 고급음식점에 나타났는데, 그때 그는 만 원짜리 50장을 종이에 싸서 들고 왔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반드시 이 돈을 다 써야 합니데이.” 나중에 강 변호사가 만류하는 바람에 그는 그 돈을 결국은 다 쓰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나는 그때만큼 장정일이 거액의 돈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대학친구가 대구에 들러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전화를 했는데 마침 장정일과 선약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셋이서 자리를 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이 친구는 교수 특유의 강의조로 이야기를 했다. 자칫 작가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어투였는데 장정일은 시종 진지한 태도로 듣고 있었고 간혹 맞장구도 쳐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문화판 사람과 교류가 거의 없는 이 친구도 내게 “그 친구 참 괜찮네”라고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 자리가 참 불편했다. 마치 맞지 않는 남녀를 소개시켜 주고 커피를 얻어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미심쩍은 기분을 장정일은 단박에 묘한 감동으로 바꿔놓았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졌다. 식당 입구에 발목이 잡힌 우리는 한동안 서서 내리는 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장정일이 갑자기 빗속으로 뛰어가더니 한참만에 우산을 하나 사 가지고 왔다. 분명히 우산은 하나였는데, 그 우산을 내 친구에게 주면서 양복입었으니 우산을 가져가라고 주고는 정작 자기는 다시 빗속으로 뛰어가서 택시를 잡아타고 가 버렸다. 우산을 세 개 사서 하나씩 쓰는 것은 장정일답지가 않다. 그건 사치다. 두 개 사서 그 친구와 자신이 쓰는 것도 당치 않다. 그건 배신이다. 그리고 두 개를 사서 그 친구와 내가 쓰는 것도 이상하다. 그건 동어반복이고 사족이다.

그는 산문을 쓰지만 영혼은 시인이다. 애정표현도 시적이다. 그는 늘 하나씩 저 앞에 먼저 징검다리를 놓아준다. 그 울퉁불퉁한 돌덩이를 하나씩 밟아나가면서 그의 삶의 문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그의 문학적 방법론을 온전히 수용하는 데도 꽤 시간이 필요했다.

문학담당을 맡기 전에 순전히 독자의 위치에서 읽었던 『아담이 눈뜰 때』는 뭔가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 시니컬하고 센티멘털한 질감은 내 취향과 맞아떨어졌지만 그 숱한 아포리즘들은 너무 익숙해서 개안의 스파크를 일으키기보다는 감각적 몰입을 방해하기만 했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는 도발적이었지만 아주 수학적이었다. 한마디로 질감이 풍부한 글에 반사적으로 몰입하는 내 문학적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 소설이었다. 흔히 장정일을 얘기할 때 하루키를 거론하지만 하루키와 장정일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아마도 ‘신세대 문학’이란 범주로 구성한 사회학적 경향성이 닮았다는 것 이외에 정작 작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학적 방법론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하루키의 문학은 아름다운 소비다. 그것이 재즈이든, 스파게티든, 섹스이든, 사랑이든 그는 불가피한 현대적 삶의 조건들 속에서 순간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 아름다움은 집단을 통한 전면전을 진심으로 포기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대가이며 진정으로 개인을 찾아낼 때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하루키는 개인을 만나기 위해 소설을 쓴다.

반면 장정일의 문학은 치열한 탕진이다. 사회가 드리우는 삶의 조건을 바꿀 수도 없고 나를 온전히 가지고는 벗어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가진 것을 자진 반납함으로써만 개인의 자격증을 얻게 되는 것, 그러니까 훨씬 더 착한 바보의 전략이다. 그리고 이 바보는 동시에 의욕적이기까지 해서 개인을 규합해서 세모난 네모의 세상을 만들기를 꿈꾼다. 장정일은 여전히 집단과 싸우기 위해 소설을 쓴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루키를 보는 장정일의 태도다. 삼 년전쯤인가 장정일의 ‘정말 좋심더’라는 말을 듣고 대구 두류산 공원 수영장에 같이 갔을 때의 일이다. 목욕탕이건 수영장이건 그는 본전을 빼겠다는 듯 2인분을 해치우는 버릇이 있는데, 이날도 10여 회 수영장을 왕복했다.

그리고 나서 마치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수영장 이곳 저곳을 구경시켜주며 ‘정말 좋지요?’를 연발했다. 나는 “뭔가 허전하지만 대중 수영장치고는 정말 좋다”고 그의 기대수준의 절반으로 답했다. 그리고 내가 가 본 모 호텔 수영장의 경우를 얘기했다. 그 수영장은 탁 트인 하늘을 보면서도 뭔가 수영장에 안겨 있다는 안락한 소속감을 주었다. 반면 두류산 수영장은 넓지만 갇혀있거나 던져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 그 호텔 수영장에서 받은 느낌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자 장정일은 한참 있다 입을 열었다. “그러게 소설도 하루키처럼 놀아봐야 하는데 말입니더.......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거는 못 쓸 거 같심더.”

나는 요즘 하루키를 읽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장정일은 요즘도 어쩌다 하루키 얘기가 나오면 “좋은 작가지요”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하루키처럼 쓸 수 없고, 쓰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루키의 어떤 작가적 재능의 한 부분에 대해 인정하고, 부러워하고, 배우고 싶어한다. 이런 태도는 하루키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독서일기에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동료작가들 칭찬도 많이 한다. 그것도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구체적 내용을 적시한다. 교과서를 통해 배우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사람을 통해 학습을 한 개인사 때문에 사람을 참고서로 해독하는 학승 기질은 여전하다. 아마도 그 힘 때문에 그는 무엇이든 부분으로 파악하고 수용하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 같고, 그 거리야말로 때가 밀릴 듯이 치열한 인간관계가 삶을 말아먹는 환경으로부터 작가로서의 자신을 보존하는 안전장치가 아닌가 싶다.

***대구에서**

7월말 대구에서 거의 1년만에야 장정일을 다시 만났다. 대구 시내 한 가운데 집필실을 마련했다고 해서 내가 가보자고 청했다. 두어 평 남짓한 집필실은 원래 창고로 쓰던 공간을 개조했는데, 벽과 바닥을 모두 목조로 마름질해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서가의 책과 책상 위의 노트북, 그리고 오디오 세트가 살림의 전부였다. 바람없는 대구의 여름을 선풍기도 없이 날 참인 것 같아서 “더워서 글이 써지겠냐?”고 묻자 그는 “많이 더우면 뻘거벗고 바닥에 가만히 누버 있심더”라고 한다.

게으른 중처럼 묵은 빡빡머리를 하고 있는 점을 빼면 그는 일 년 전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일 년 전 내가 대구에 머물 때 그는 대구에서 제일 큰 음반가게에 데리고 가기도 했고, 집에 불러 그 동안 사 모은 오디오 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 생긴 자그마한 스파게티 전문점에 가서 저녁을 사 주면서 “이런 가게 하나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신이현은 파리의 가정집에 들어가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고 있었다. 또 언젠가는 대학가 근처에 카페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대구는 장정일이 나고 자란 곳이다. 덥고 춥고 사방이 산으로 막힌 곳, 논쟁 좋아하고 고집센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곳에서 장정일은 뿌리를 내리고 싶어한다. 집에서 버스 타면 20분 거리의 시내에 나와 CD를 사고 영화를 보고 지기를 만나거나, 그의 말대로 “목욕통에서 두어 시간 노는 것”이 일상이다.

그는 집을 나와 멀리 가는 것을 불편해 한다. 나는 그가 여행 가는 걸 본 적이 없다. 등산도 딱 한 번 서울에 있을 때 북한산에 같이 간 적이 있을 뿐이다. 그는 아주 익숙한 뒷골목을 배회하는 소년처럼 논다. 모두 똑같아 보이는 곳에서 조그만 차이를 찾아내서 ‘대구 100배 즐기기’를 한다. 이전부터 소박하지만 실속있는 음식점을 잘 찾아냈던 그는 이번에 만났을 때는 청도의 역전에 있는 추어탕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추어탕을 직접 끓여서 그 자리에서 퍼주는 그 식당은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한꺼번에 나가는 공사판의 식당 같았다. 외양도 허름했지만 밖에서 제각각 기다렸다가 몰려들어가는 광경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맛있는 3천5백 원짜리 추어탕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날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차를 몰고 청도까지 가서 추어탕을 먹고 대구로 돌아온 것이 전부다. 글을 써서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서 내고, 그의 소설이 대구 사람보다는 서울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서울에 있는 영화사나 출판사 사람들이 계약하러 대구에 내려오는 일이 종종 있다는 점을 빼면, 그의 생활은 영낙없이 동네에서 이발소를 하거나 편의점을 하는 대구의 평범한 아저씨다. 나는 그가 어떤 식으로든 포즈를 취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는 가만히 있거나 바로 액션을 취한다. 연(然)하지 않고 직선으로 달려가는 그의 행동은 온갖 호의와 친절과 우아함으로 장식된 렌즈 속에서는 불행히도 굴절된다. 볼록렌즈이거나 오목렌즈이거나 그는 한동안 일그러진 채 비춰졌고,

지금도 그를 비추는 초점은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깝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는 그런 흔들림에 동요하지 않는다. 자신이 스스로 초점이 되는 것, 그리고 렌즈가 거기에 맞출 때까지 기다리는 것. 내가 대구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타자의 자리로 여기지 않는 것.바람 한점 없는 대구의 한여름을 그는 카센터의 기능공처럼 보내고 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쭈쭈바를 빨면서 스포츠지의 연예면을 보는 것, 차가 없어지지 않는 한 일거리 떨어질 일 없고, 남녀가 동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연예면은 무궁하리라는 느낌속에서.

나는 그 느낌을 불혹(不惑)이라 부르고 싶다. 나이 사십에 그는 비로소 세상을 앎의 대상, 알아야 하는 적으로 여기는 하나의 세계를 탈출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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