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대선 때는 복지 국가로 가는 게 그렇게 쉽게만 보였었다. 그때는 후보들 모두 너나없이 '복지 국가'를 이야기했다. 공약만 놓고 보면 별반 차이가 눈에 띠지 않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불과 1년도 안 지났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 1년 전 그런 대선을 치른 나라 맞는가 싶을 정도다. 손에 닿을 것만 같았던 복지 국가는 마치 신기루처럼 다시 저 멀리로 사라져가고 있다. 이토록 실현하기 힘들다는 것을 1년 전에는 어찌 그리 쉽게들 떠들었나 싶다.
이참에 우리는 '복지 국가'란 말을 다시 뜯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간 이 단어에서 '복지' 쪽만 주목했다. 한데 그 때문에 간과한 게 있다. 바로 뒤의 그 '국가'라는 말의 무게다. 복지 국가는 어쨌든 어떤 '국가'다. 복지 국가 아닌 다른 어떤 국가에서 복지 국가라 불릴 만한 상태로 변화한 국가. 이렇게 변화한다는 것은 과연 어느 정도 난이도의 과제인가? 우리는 이 물음을 채 실감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그러면서 기존 국가에 이러저런 복지 제도를 덧붙이기만 하면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무엇으로 복지 국가를 바라본 게 아닌가?
복지 국가가 등장하기 전에 모든 국가는 두 가지 얼굴로 대표돼왔다. 하나는 계급 국가다. 현대적으로 바꿔 말하면, 자본 국가 혹은 기업 국가다. 자본 국가에게 국가의 주된 기능이란 자본 소유자의 이익을 관철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고전적 표현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집행 이사회" 노릇이다. 이 이사회에서 정말 생각도 못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사 자신들을 포함한 주주들의 배당 몫을 줄이는 짓이다. 고소득자나 기업 이윤에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일은 '내란 음모'나 마찬가지다.
실은 복지 국가도 이러한 자본 국가의 속성에서 아주 벗어난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복지 국가들에서는 자본 소유자의 이익이 어떤 식으로든 보장된다. 하지만 그 관철 방식에는 역시 차이가 있다. 복지 국가에서 그 방식은 '자기 제한'적이다. 국가는 여전히 자본 소유자의 이익에 신경 쓰지만 그럼에도 노골적으로 편드는 일만은 '자제'한다. 그래서 때로는 고율의 누진세도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집행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를 끼워 넣는 것도 감내한다. 말하자면 복지 국가는 '자제하는' 자본 국가다.
자제한다는 것, 쉽지 않다. 대오각성한 인간이라면 그게 쉬울지 모르겠지만, 자산 소유자들이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면 그때 세상은 이미 자본주의가 아닐 것이다. 결국 자제력은 자제하지 않을 경우 닥칠 어떤 제재의 위협이 항존할 때 생기는 것이다. 회초리를 휘두를 세력이 버티고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전 세계의 역사적 경험에서 그런 세력이란 곧 노동 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중 세력이었다. 시민 사회 내에 이런 힘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자본 국가는 '자제하는' 자본 국가, 즉 복지 국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이런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 시기에는 분명히 그렇다. 다만, 선거 때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표심의 형태로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의 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작년에 그토록 '복지 국가'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거의 열병이 지나고 나면 그 자리에는 자본의 구조화된 권력 외에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대선 공약을 폐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자신하는 것이다. 4년 뒤 선거는 그 때 가서 다시 고민하면 된다. 당장이야 파업할 노동조합 하나 없는데 무슨 걱정인가. 이런 현실에서, '자제하는' 자본 국가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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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전통적인 또 다른 얼굴은 전쟁 국가다. 국가는 아득한 옛날 처음 등장할 때부터, 그러니까 고주몽과 박혁거세 시대부터 계급 국가이자 또한 전쟁 국가였다. 좀 더 21세기 풍으로 말하면, 안보 국가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분단 국가다. 아무튼 준전시 상태에 있는 한반도의 두 국가뿐만 아니라 인류사에서 모든 국가의 가장 원초적인 기능은 바깥의 다른 무장 세력에 맞서 군사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국가를 둘러싼 모든 문명의 외피를 걷어내면 남는 것은 결국 깡패 집단이거나 혹은 그런 깡패들에 맞서는 자경단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전쟁 국가의 전통과 복지 국가라는 새로운 현실 사이의 관계다. 20세기 중반에 서유럽을 중심으로 복지 국가가 등장하는 상황을 보자.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만 해도 유럽 주요국들은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전쟁 국가들이었다. 전쟁의 폐허는 이런 상황을 바꿔놓았다. 서유럽 국가들은 상호 대치 상태에서 벗어나 이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집단 안보 체제의 우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냉전을 배경으로 안보 국가의 성격이 잔존했지만, 예전에 비해 그것이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지는 않게 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 복지 국가가 실현된다.
미국과 비교해볼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의 발전 수준으로만 놓고 보면, 미국이 서유럽에 앞서면 앞섰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국에는 복지 국가가 실현되지 못했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변수로는 국내 노동 운동과 좌파 세력의 약세를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또한 잊어선 안 될 것은 미국이 전쟁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유럽이 거기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미국이 더욱 전쟁 국가화된 덕분이었다. 이런 전쟁 국가의 강화와 복지 국가는 병행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960년대 한때 린든 존슨 정부가 둘을 함께 추진했다가(베트남 전쟁과 '위대한 사회') 둘 다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적이 있다. 그때 이후 미국은 전쟁 국가의 강화 쪽으로만 일로매진하고 있다.
분단국인 대한민국은 지금 전 세계에서 안보 국가의 성격이 가장 강한 나라들 중 하나다. 이런 상황이 복지 국가 실현을 더욱 간단치 않게 만든다. 가장 단순한 이유는 국방비 지출 때문에 복지 예산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증세로 재정 규모 자체를 늘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안보 국가의 성격이 강할수록 국가의 역할에 대한 대중의 기대 수준은 낮아지게 된다. 국가의 주된 기능이 대외 안보에 있다는 게 상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 복지는 가외의 기능, 즉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어쩔 수 없는 역할로 치부되고 만다. 따라서 복지 확대 공약의 위반이나 그 축소에 대한 대중의 반감도 국가 기구가 능히 감당할 만한 수준 그 이상은 아닐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필요하면, '내란 음모'(혹은 '여적죄'?) 혐의 하나쯤 만들어내 반발을 다스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대한민국을 복지 국가로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은 일로 다가온다. 하지만 사기를 저하시키자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의 도전 과제를, 그리고 우리의 적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박근혜 정부의 정체를 분명히 알자는 것이다.
'독재자의 딸'이니 '부정 당선자'니 하는 것은 변죽만 울리는 짓이다. 그렇게 말하고 말기에는 이 정권이 딛고 선 역사적 필연성이 너무나 단단하다. 이 정권은 바로 대한민국 국가의 강력한 연속성을 상징하며 체현한다. 이 정권의 다양한 얼굴 뒤에는 자본 국가와 안보 국가의 질긴 생명력과 관성이 도사리고 있다. 정권의 힘도, 그 한계도 모두 이 사실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실체다. 복지 국가는 오직 이 자본/안보 국가가 무대의 뒤로 밀리는 정도만큼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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