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글을 쓰며 영화를 되새기다보니 새삼 섬뜩한 느낌도 든다. 그러한 첨단 수사 기법에 의해 파악되는 사생활은 어느 누구의 것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에 의해 잠재적 범죄자 혹은 범죄 관련자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의 사생활은 수사기관에 의해 언제든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수사기관의 감시가 공공의 적인 범죄자에만, 수사를 위해 꼭 필요한 정보에만 국한될 것을 보장할 수 있는가.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활용되어온 수사기관의 역사, 수사기관 스스로의 수사권 오·남용의 역사, 그리고 <1984>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된 현실은 수사기관의 감시에 시민들의 끊임없는 감시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미 정부의 개인정보 수집과 사찰에 관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는 이러한 확신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은행과 통신사, 인터넷 회사, 정부가 하나의 초대형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라는 예측은 미래학자의 책에 머물지 않고 현실화되고 있다.
▲ 미국 정부의 개인정보 수집과 사찰 실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 |
지난 6월 11일 우리 경찰청은 이동통신사 3사에게서 수사에 필요한 이용자의 신상정보와 통화내역 등 자료를 전산으로 제공받는 시스템을 구축해 12일부터 운용할 것임을 발표했다. 이동통신사의 전산 체계와 경찰의 형사사법정보시스템이 곧바로 연결돼 개인의 통신사실 정보를 경찰이 필요한 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찰은 그동안 이동통신사들이나 주요포털업체들에게서 '통신자료'와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서면으로 요청하고 서면으로 받아왔다. '통신사실확인자료'는 휴대전화 이용자의 전반적인 휴대폰 사용 내역을 말하고, '통신자료'는 이용자의 개인 신상정보를 말한다.
'통신사실확인자료'는 통신비밀보호법에서 법원의 허가를 얻어 통신사에게 제공을 요청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통신사실확인자료 요청에 대한 법원의 기각률은 1%미만이라고 한다. 통신사실확인자료 요청이 있으면 사실상 거의 법원의 허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긴급한 사정이 있으면 제공 요청만으로도 자료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신상정보인 '통신자료'의 경우는 법원의 허가나 이용자의 동의도 필요하지 않다. 이동통신사는 수사기관의 요청에 반드시 응해야 할 법적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의 요청이 있기만 하면 통신자료를 제공해왔다. 수사기관에 통신자료가 제공되더라도 이용자 개인에게는 통보조차 되지 않는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 5월 수사기관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현황을 발표했다. 그 안에는 주목하고 우려해야 할 수사기관 통신 정보 제공 현황이 들어있지만, 발표 다음날 일부 언론에서 수사권 남용에 대해서 잠깐 우려 섞인 보도를 하고 나면 그 뿐이다. 금세 잊혀지고 만다.
위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에 의해 수사기관에 제공된 전화번호 수는 1276만 5110건이나 된다. 이 전화번호 수를 사람 수로 환산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약 30%다. 수사기관이 전 국민 30%의 통신내역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은 '수사상 필요'라는 이유만으로 설명도, 납득도 되지 않는다. 또한 같은 시기 통신자료 제공에 의해 제공된 전화번호 수는 402만 3231건으로 전년 대비 53.7%나 증가했다. 이러한 수치는 그 자체로 부당하게 통신자료가 제공됐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전산화 이전에도 수사기관이 제공받는 통신사실확인자료나 통신자료는 그 양이 막대했다. 더욱 편리해진 전산망 구축을 통해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등 제공 요청이 더욱 늘어날 것임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전산시스템 도입으로 경찰은 현재보다 더 많은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요청하게 될 것이고, 사건수의 증가는 법원의 심리부담을 높여 통신사실확인자료 요청에 대한 부실한 통제로 이어질 수 있다.
수사는 양날의 칼이다. 범죄자 검거를 위해서는 효율적 수단들이 개발돼야 하겠지만, 권리 침해를 수반하는 수사의 본질적 성격상 그러한 수단들의 한계와 문제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이뤄져야 하고, 제도적 제어 장치들이 마련돼야 한다.
이미 과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수사기관 통신자료 제공에 대해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나 아무런 제도적 보완책도 이뤄지 않은 상황에서, 전산망을 통한 통신 자료 등 제공이 이뤄진다면 이로 인한 사생활 침해는 제어할 방법이 없어진다. 경찰청은 수사의 효율성과 편의성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기본권 보호라는 기본 원칙으로 돌아와 통신수사 전산화를 재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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