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우리도 오랫동안 경험했던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선거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권위주의 집권 세력이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선거 제도, 과정, 결과를 '조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맛에 맞게 정당과 후보의 자격을 결정하고, 집권당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획정하고 선거구의 크기를 결정하며 최종 당선자를 결정하는 방식을 정한다.
권위주의 체제 선거에서 집권 세력의 횡포는 일반적으로 캠페인 과정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그 방식과 양상이 하도 다양하여 여기서 자세히 논의할 순 없지만 필리핀 선거를 특징짓기 위해 흔히 사용된 "총, 깡패와 돈(3G : Guns, Goons, and Gold)"이 그 핵심이다. 테러, 암살, 폭력, 협박, 후보자 매수, 투표자 매표가 난무하는 것이 동남아의 일반적인 선거 문화이고, 그나마 동남아는 선거 민주화를 통해 그 수단이 '총'에서 '깡패'로, '깡패'에서 '돈'으로, 즉 폭력 선거에서 금권 선거로 옮겨가고 있다.
선거 결과의 조작은 마지막 수단이다. 우리도 과거 자유당 시절 "3인조 9인조 투표, 무더기 투표, 샌드위치 투표, 동행 투표, 4할 투표, 쌍가락지 투표, 유령 투표, 피아노 투표, 올빼미 투표, 금품 살포, 흑색선전, 위계사술, 위장전입, 대리 투표" 등 기상천외의 방법들을 동원했던 경력으로 보면 가히 투·개표 부정의 원조이자 고수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겠지만, 직접 투·개표 과정에서 선거 결과를 조작하고 싶은 유혹은 권위주의 집권 세력에게 항상 존재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유령 투표", 우편 투표 조작, 지워지는 잉크 사용 등이 선거 직후마다 매번 제기되는 전형적인 유형들이다. 제도, 캠페인, 투·개표 과정에서 모든 수단과 방식을 동원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아예 투표 자체를 없었던 일로 치부해버린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1990년 버마(미얀마)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총의석의 80% 이상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자 군부는 권력 이양을 거부하고 수치 여사를 자택 감금해 버렸다.
비교 정치학자들은 선거를 통해 체제가 전환될, 즉 민주화를 이룰 가능성은 없지만 선거가 매우 '중시되는' 체제를 선거 권위주의 체제라고 부른다. 이 권위주의 체제 유형은 민주주의에 가장 근접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동남아 국가들 중에서는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싱가포르를 선거 권위주의 체제로 꼽을 수 있고, 향후 몇 년간 정치적 변화에 따라 버마도 이 체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2013년에는 이 중 두 나라에서 총선이 실시되었고, 그 결과는 머지않아 동남아의 선거 권위주의 체제도 민주주의에 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선 말레이시아에서는 지난 5월 5일, 5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게 되어 있는 헌법상 기한을 꽉 채우고서야 그렇게 기다리던 총선이 실시되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 민주화를 바라는 말레이시아 국민들이나 국제 사회가 이번 총선에 건 기대는 무척 컸었다. 지난 2008년 총선에서 안와 이브라임(Anwar Ibrahim)이 이끄는 야당 세력은 (당시까지) 51년 장기 집권한 여당 연합 국민전선(BN)에 맞서 3대 야당 간의 연합 '국민의 약속(PR)'을 성사시켜 222석 중 82석을 차지, 무려 62석을 늘이는 대약진을 맛보았고, 지난 5년 동안 이번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꿈꾸며 단단히 준비하고 별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PR 추종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의석수를 늘리기는 했지만 과반수 112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89석을 얻는데 그친 것이다. 패배하면 은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던 안와는 "이번 선거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거리로 나섰지만, 이번 선거를 패배가 아닌 사실상 승리로 규정함으로써 정계에 머물 여지를 남겨 둔 것은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
그래도 이번 선거에서 야당 세력이 얻은 큰 수확은 바로 총득표율에서 50.9%를 차지해 과반을 넘고 여당 연합을 3.5% 앞섰다는 사실이다. 장기적, 비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총선도 안와와 야당 연합의 승리였다. 곧 다가올 최종적인 승리의 전주곡이 아닐까?
그로부터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7월 28일 실시된 캄보디아 총선은 말레이시아 총선보다 더 의외의 결과를 전해주었다. 지난 선거에서 29.5%의 득표율로 28.5%의 의석을 차지했던 야당 캄보디아민족구제당(CNRP)이 무려 44.5%의 득표율과 44.7%의 의석 점유율을 획득한 것이다. 반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헹 삼린 총리가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PP)은 득표율 48.8%와 55.3%의 의석 점유율을 얻는 데 그치고 말았다.
선거 직후 야당 총재 삼 레엉시는 부정으로 얼룩진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하고 미국과 유럽연합(EU)도 선거 부정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그 선거 결과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실상 야당의 대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두 나라의 2013년 총선을 비교하는 일은 정치학자들의 몫이지만, 얼핏 보아도 무척 흥미롭다. 집권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선거 제도의 왜곡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말레이시아를 이길 나라가 없고, 3G가 난무하는 선거 과정과 행태에서는 캄보디아를 따라 올 나라를 (일당 독재 국가들을 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싱가포르와 브루나이에 이어 잘 사는 나라고 캄보디아는 동남아 최빈국 중의 하나다. 그런데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를 향해 잰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과연 어느 나라가 먼저 민주화의 문턱을 넘을 것인가?
몇 년 전에 서거한 20세기 후반 미국 최고의 비교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민주화 세력에게 신중히 조언하였다. 아무리 엉터리 선거라 할지라도 꼭 참여해야 한다고. 이런 저런 이유로 보이콧해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그 이유가 많다고 할지라도. 선거를 통해 민주화 세력이 집결하고, 선거 과정과 결과로부터 투쟁 거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여당 연합은 득표율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고 야당 연합의 득표율에 미치지 못했다. 안와와 야당 세력들은 자신들이 사실상 승리하였으며 정치적 정당성은 PR에 있다고 거듭 주장할 것이다. 기대 이상의 승리를 기록한 캄보디아 야당 역시 45%의 지지를 얻은 정당을 무시하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며 캄보디아의 미래는 더 이상 CPP가 아닌 CNRP에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5년 뒤에나 있을 두 나라의 선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두 차례 동시 게재합니다. 신윤환 서강대학교 교수(정치외교학과)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6호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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