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유일한 피폭국'인 일본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당사자인 두 시장의 코멘트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히로시마 시장은 핵무기를 반대하는 한일 양국 시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코멘트했고, 나가사키 시장도 "끔찍한 기사"라고 혹평하면서도 우호 관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의 '평화기념식'에 한국의 평화 단체가 참가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이다.
원자폭탄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담론은 한국에서 견고하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소련의 참전을 의식한 전후 국제 질서의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의도에 대한 도외시와 더불어, 5만여 명에 이르는 당시 재일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망각이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반전 반핵 운동이 고조 되었어도 그것은 반미를 위한 반핵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의 의한 참상이나 피폭의 계속되는 비극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었다. 즉 한국에서 '반핵 사상'은 '히로시마'를 그대로 지나쳐서 분단과 반공주의, '반일'의 탈식민지적 과제, 민주화와 통일 운동 속에서 '일국 평화주의'로서 형성된 것이었다.
분단 시대를 넘어 한국의 평화 운동이 새롭게 전개되는 속에서도, 정치가의 핵무장 발언을 허용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여론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이 '히로시마'를 껴안지 못하는 한국의 반전 평화의 사상적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도 '히로시마'를 일본과의 정치·역사적 인연을 떠나 보편적인 인권 의식으로 반전 평화 사상의 근저에 위치 지우려는 시기가 있었다. 1946년 4월에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피폭자를 조사한 미국 저널리스트 존 허시는 이들의 르포를 담아 <히로시마>를 펴냈는데, 1949년에 일본에서도 출판된다.
▲ <히로시마>(김종건 옮김, 경위사 펴냄, 1949년), <나가사키의 종>(삼일출판사 펴냄, 1949년). ⓒ현무암 |
이 해에는 <나가사키의 종>도 번역·출간되었다. '원폭 작품'의 고전인 이 책은 <경향신문>(1949년 12월 7일)에 "전후 최대 베스트셀러가 된 나가사키에서 피폭한 일본 과학자의 수기"라는 문구의 광고가 실리기도 해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1949년 8월 1일의 초판 발행 한 달 후에는 2판이 나오고, 1950년 2월에는 7판이 발행됐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또 다른 '인공 지옥'이 한반도에서도 생겨난다. 이로 인해 "너무나도 비참한 광경을 보고, 실지로 당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말하는 불행이나 비극에 대해서는, 상당한 만성(慢性)에 걸린" 우리였다. 그럼에도 "무서운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아래에, 또 하나의 지옥…속에서 갈 바 몰라 헤매는 사람들이, 우리를 모진 불행 속에 쓸어 넣은 원수들이라 할지라도, 무한한 동정과 슬픔을 가지고, 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라고 1955년에 발간된 <원자탄 이야기>(신지사편집부 포냄)에서는 확신한다. 한국전쟁 후의 "전쟁의 문화"(존 다우어)가 충만하는 상황에서도 식민지 지배의 고통과 원한을 넘어 '히로시마'에 공감하려 했다.
지난 6일의 히로시마 '평화기념식'에서 히로시마 시장은 핵무기를 "절대악"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는 일본의 안전 보장 체제와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사실 '히로시마'는 일본 정부에 전쟁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물어왔다. 장기간 방치되어 온 피폭자는 지속적인 요구로 1957년 '원폭의료법'이 제정되어 법적 원호 대상이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사선에 기인하는 '특수한 피해'를 구제하는 것으로 사망자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56년에 결성된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협의회'(일본피단협) 등 시민 단체는 사망자의 보상을 포함한 원호법 제정을 꾸준히 요구하지만, 정부는 원폭 피해를 '특수한 피해'로 한정하고 국가 보상에 대해서는 거부해 왔다. 그 근거로 삼은 것이 "무릇 전쟁이라는 것은 국가가 존망을 건 비상사태 하에서는 국민이 그 생명·신체·재산 등에 대해서 그 전쟁으로 인하여 무언가의 희생을 부득이하게 당했다고 해도, 그것은 국가가 전적으로 수행하는 전쟁에 의한 '일반의 희생'으로서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수인(受忍)해야 하는 것"이라는 이른바 '전쟁 피해 수인론(受忍論)'이다.
'수인론'은 전후 귀환한 일본인이 일으킨 재외 재산 보상 청구 소송, 오사카 및 도쿄 대공습 민간인 피해자 소송, 구 식민지 출신자의 군인·군속(BC급 전범) 소송, 중국 귀국자의 국가 배상 청구 소송에도 적용되었다. 규슈 대학의 나오노 아키코가 지적하듯이, 일본의 전쟁 피해자 원호 시책은 국가와의 '특별한 신분 관계'에 있었던 자의 공무상의 피해 및 국가와의 '특별한 권력관계'에 있는 자의 업무상의 전시 재해, 또는 국가에 의해 무언가 '특별'하다고 의미를 부여받은 피해에 대해서 강구되어 왔던 것이다.
최근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일본 기업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가 잇따르고 있다. 일본에서는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들어 청구를 기각해 왔던 만큼, 현재로서는 일본 법정에서 승소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런데 개인 청구권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한국인 BC급 전범' 소송에서 원고가 당시 '일본 국민'이었다는 이유로 '수인론'이 적용되었듯이, '수인론'이 '구 식민지 출신자'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일 협정이 지금까지 제 소송이 '수인론'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은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7월 30일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부산 고법의 배상 판결 이유에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음에도 적당한 피난 장소나 식량을 제공하는 등 구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포함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수인론'으로 인해 기각되는 논리이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특별한 희생'에 대해서 민간 기구(아시아여성기금)를 통해 '위로금' 사업을 벌인 것도 '수인론'과 궤를 같이 한다. '청구권 소멸' 논리를 넘어서더라도 '수인론'이라는 또 하나의 장벽이 있다. '수인론'이 타파되어야 할 이유이다.
대공습 피해자·유족에 의한 집단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국책에 따라 만주에 이주해서 결국 내버려진 중국 귀국자의 국가 배상 청구 소송은 정부의 지원 약속으로 취하되었지만 소송의 기본 정신까지 폐기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본피단협도 원폭 피해에 대한 국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민간인 전쟁 피해에 대한 국가의 보상 책임을 부정하는 보루인 '수인론'을 깨뜨림으로서 가능한데, 한국과 일본의 민간인 피해자의 연대를 통해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히로시마'에 대한 공감의 회복은 그 첫걸음이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두 차례 동시 게재합니다. 현무암 홋카이도 대학원 준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 연구원)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3호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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