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파견된 구조 요원들은 실종자 수색·구조 작업을 펼치고 있고 적십자 등 NGO도 피해 주민을 돕기 위해 나섰다. 얼기설기 대충 만든 허름한 판자촌 같은 시골집이라 지진에 속절없이 무너진 데다 지진의 진앙이 산간 지역이라 산사태로 이어질 위험도 있어 다들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 아체 지진을 보도한 인도네시아 신문 기사와 지진 피해 현장. ⓒ김이재 |
인도네시아는 '불의 고리'로 불리는 환태평양 지진대에 자리 잡고 있어 강한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지진은 기반 시설과 건물을 파괴할 뿐 아니라 지진 피해자에게 큰 충격을 남긴다. 한번 지진을 경험한 사람들은 조금만 땅이 흔들려도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언제 또 지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인도네시아 학술원에서 한-인니 외교 관계 수립 4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 포럼을 자카르타에서 마친 후 수마트라의 아체, 메단 지역을 답사할 계획이었던 한국동남아연구소 회원은 긴급 회의를 열었다. 여진의 위험을 고려하여 목적지를 술라웨시 섬 토라자로 하루 만에 변경하는 신속한 대응으로 베테랑 동남아 연구자의 내공을 발휘하였다.
수마트라 섬에서는 북서부 아체뿐 아니라 서부 지역에서도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2009년 서부 수마트라의 주도, 파당에서 지진이 발생해 10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여 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학교, 주택, 상가 건물이 붕괴하면서 파당 지역의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할 정도로 도시는 초토화되었고 특히 시멘트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의 피해가 컸다.
이번 아체 지진에서도 이슬람 사원이 붕괴돼 코란을 읽고 있던 어린이 6명이 숨지고 14명이 매몰되는 등 아랍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구현한 모스크 건축물이 지진에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마트라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메카, 메디나로부터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섬이다. 특히 수마트라 서쪽 끝 아체 지역은 동남아시아에서 최초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곳으로 유명한데, 강경한 이슬람주의자가 많으며 인도네시아 중앙 정부에 맞서 오랫동안 분리 독립 운동을 벌여 왔다.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지위와 활동을 인정하고 트렌스젠더 여성의 하지도 허용할 정도로 유연한 인도네시아 무슬림 문화 속에서 수마트라 섬 끝 아체 지역은 보수적이고 강경한 이슬람주의자들이 밀집된 특이한 곳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수마트라 섬에는 아체 지역의 강경한 무슬림뿐 아니라 좀 더 유연한 무슬림, 기독교를 주로 믿는 바탁 족, 불교·도교 문화를 유지하는 중국계, 정령을 믿는 원시 부족 등이 함께 살아간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47만5000제곱킬로미터로 남북한 합친 한반도 면적의 2배가 훌쩍 넘는다) 수마트라 섬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20여 개의 언어가 사용될 정도로 다양한 종족이 공존하는 다문화 지역이다. 특히 수마트라 섬 서부 지역에 기반을 둔 미낭카바우 족은 독실한 무슬림이지만 여성들의 정치·경제·사회적 참여가 눈부시고 그 어떤 서구 사회 못지않은 양성 평등 문화가 뿌리 깊다.
미낭카바우 족은 현대화된 대도시 속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큰 모계 사회를 유지하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미낭카바우 여성들이 만든 파당 음식은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미낭카바우 남자들 역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데, 초대 부통령 모하마드 하타를 비롯해 정치인, 외교관, 학자를 많이 배출하는 등 인도네시아 근·현대사에서 미낭카바우 남자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 사회 참여가 활발한 미낭카바우 여성들. ⓒ김이재 |
모계 사회인 미낭카바우 족의 전통이 살아있는 부킷팅기 지역은 지진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편이다. 서부 수마트라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시멘트가 풍부한 지역으로 유명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은 소뿔 모양 지붕의 미낭카바우식 가옥은 시멘트 사용을 최소화한다. 지진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격자로 나무를 촘촘히 엮어서 벽과 지붕을 올리는 등 자연스러운 내진 설계가 기본이다. 쾌적한 기후에 토양도 비옥하지만 화산에 둘러싸여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낭카바우 족이 오랫동안 축적한 지혜의 산물인 것이다.
▲ 내진에 강하게 설계된 소뿔 모양 지붕의 미낭카바우식 가옥. ⓒ김이재 |
반면 2004년 아체 지역에서 발생한 쓰나미는 무슬림 여성들에게 더 가혹한 재해였는데, 그 사연이 눈물겹다. 재앙이 덮치자 우선 자기 한 몸을 우선하여 생명을 구한 남성들과는 달리 여성들은 아이와 노약자를 먼저 챙기느라 제대로 대피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독실한 무슬림 여성으로서 어려서부터 수영을 전혀 해 본적이 없었던 데다가 치렁치렁한 무슬림 복장을 갖춰 입고 있었으니 밀려오는 파도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아체 지역의 데야 마플람 (Deyah Mapplam) 마을의 경우 4500명 주민 중 270명만 생존했는데, 그 중 여성은 70명 정도에 불과했다.
무슬림 여성의 피해가 컸던 아체의 재앙은 재난 복구 과정에서도 반복적으로 재연되고 있었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살아남은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마을 재건 과정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확률은 더 낮아진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그렇지 않아도 강경한 무슬림이 많은 아체 지역에서 여성들의 정치·사회적 권한은 후퇴하고 남성 중심적인 공간·사회 구조가 더욱 강화될 우려가 있다.
아무리 철저히 대비를 한다고 해도 지진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무서운 자연재해이다. 예측·예방이 거의 불가능해 일본같은 초일류 선진국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재해 아닌가? 지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겨내야 할 절망과 고통 또한 만만치 않다. 재해 생존자의 트라우마는 평생 지속되는데, 특히 1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2004년 쓰나미는 아체 사람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로 남았다.
해안가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는 등 인명 피해가 컸고, 더운 날씨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해도 인력 부족으로 시체를 수습할 수도 없는 참혹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내를 잃고 우울증에 걸린 남편, 사랑하는 자녀를 떠나보내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부모의 슬픔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 같다.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 1차 피해도 크지만, 2차, 3차 피해도 만만치 않다. 특히 지진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관광 산업이다. 공장이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생산량을 줄여 손해를 최소화하고 상점도 일정기간 문을 닫을 수 있지만, 관광업은 충격과 변화에 취약하다. 건물과 시설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가운데 종업원들의 인건비는 고정적으로 나가는 상황에서 위험한 지역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까지 굳어지면 손해는 걷잡을 수 없다. 침체된 경기를 살려보려 반다아체 시에서 고육지책으로 '쓰나미 투어'를 운영하는 역발상 마케팅도 펼쳐 보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아 보인다.
지진 피해를 입어 허름한 가건물에서 공부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던 수마트라 어린이들이 떠오른다. 재해 현장만 일부러 찾아다니는 긴급 구호 전문가 한비야 씨 수준은 못 되더라도, 피해를 입은 아체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경기 회복을 도울 겸 수마트라 섬으로 '착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두 차례 동시 게재합니다. 김이재 경인교육대학교 교수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3호에 실린 글입니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