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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vs. 아베…'위안부'는 日 정치인의 '늪'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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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vs. 아베…'위안부'는 日 정치인의 '늪'인가?

[서남 동아시아 통신] 하시모토 도오루의 추락

하시모토 도오루 '일본유신회' 공동대표(오사카 시장)가 추락하고 있다. 지난해 말 중의원 선거에서 54석을 차지해 일약 제 3당으로 약진한 일본유신회는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는 불과 수 석의 획득에 그칠 전망이다. (일본유신회는 총 44명의 후보를 내보냈지만 8명을 당선시키는데 그쳤다. 편집자)

하시모토의 정계 진출 이후 시민 사회는 그의 포퓰리즘적 수법과 독선적인 스타일에 대항하여 '하시즘'(하시모토+파시즘)이라는 조어로 비판했지만, 그의 인기와 정치적 입지는 견고하기만 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5월 이후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일련의 발언으로 '미디어가 키운 몬스터'는 일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하시모토 공동대표를 궁지에 몰아놓은 것은 과연 그의 '그릇된 역사 인식'인가.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 시기에 이러한 발언으로 의도했던 계산과 오산 그리고 그것이 왜 과거와 현재의 '위안부'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알려진 것처럼 하시모토 공동대표는 5월 1일 미군 기지 시찰시 해병대 사령관에게 '더 많이 풍속을 활용했으면 한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동월 13일 아침 간이 기자 회견에서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든지 안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당일 저녁에는 1일의 풍속 장려 발언과 미군 사령관의 반응에 대해서 공개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미 국방성은 '언어도단이고 모욕적'이라고 비판했다. 하시모토는 일본외국특파원협회 회견을 자처해 반전을 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거기에서는 '위안부' 발언은 제쳐두고 풍속 장려 발언에 대해서만 사과했다.


이 소동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정치가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 또 하나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과거의 '위안부'에 대한 '역사 인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일본 우파 세력은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아시아에 있어서의 역사 문제를 놓고 해결하려 하는 것인데, 이는 함께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아베 신조 총리의 전철을 되돌아보면 명확해진다.

아베는 1997년부터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인정한 '고노 담화'에 대해서 "강제성을 검증하는 문서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담화의 전제가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2006년 9월 총리에 취임한 아베는 2007년에 3월 1일의 기자 회견에서 "당초 정의 되었던 강제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없었다"고 하여 본격적으로 '고노 담화' 흔들기에 나선다.

이때 "집에 들어가 데리고 가는 것"을 "협의의 강제성", "가고 싶지 않은데 그러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광의의 강제성"이라고 설명했는데, '고노 담화'가 전제로 하는 "협의의 강제성"을 부정한 것이다. 4월 16일에는 츠지모토 기요미 중의원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고노 담화 때까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 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하는 각의 결정을 하게 된다.

직후, '위안부'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미 하원 위안부 결의안이 진행되는 속에서 방미하게 된 아베 총리는 미 의회 및 미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때 사과하는 대상인 틀린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는 것이 '한반도'에서 '군 및 관헌'이 직접 집에 쳐들어가 노예 사냥하듯 끌어내어 유괴, 납치를 하는 등의 '강제'라는 표현이 기술된 '공식적인 문서'가 '1993년' 이전에는 '정부가 발견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의 권위자 요시미 요시아키 박사가 제시하듯 중국, 동남아 등 '한반도 외'에서 '폭행, 협박'을 통해 연행했다는 '공문서'는 '1993년' 이후에 다수 발굴되고 있다.

아베 정권은 국회에서 '위안부'에 대한 질의가 있을 때마다 '고노 담화'를 내세워 명확한 입장을 회피해 왔다. 이미 '고노 담화'는 강제성이 훼손된 '광의의 강제성'에 기반을 둔 것임은 물론이다. 일본 정부는 철저한 조사를 마다한 채, 극히 제한된 '협의의 강제성'의 신빙성을 근거로 형해화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하여 국제적인 시선과 자신들의 역사관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아베 정권과 역사관에서 근접하는 하시모토는 '고노 담화' 비판을 답습하고 그 수정을 요구했다. 나아가 5월의 '위안부' 발언으로 폭주하는 바람에 아베 총리는 다시금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해야 했다. 참의원 선거까지는 하시모토를 극우로 내몰아 거리를 두고 자신은 형해화한 '고노 담화' 뒤에 숨을 심산이다.

▲ 위안부 정당화 발언을 한 일본유신회 하시모토 공동대표. ⓒ서남포럼

하시모토에게 불행했던 것은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를 내세워 개인의 의지를 국가의 의지로 뒤덮을 수 있었던 반면,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라는 점이다. 더구나 '역사 수정주의'의 선봉에 서왔던 아베와는 달리 '위안부'에 대한 확고한 자신의 역사적 입장과 지식 그리고 국제 감각을 갖추지 못한 채, 세력 확장을 위해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와 손을 맞잡은 것이 하시모토의 패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하시모토에 대한 비판은 보수파에서도 신랄하다. 보수계 월간지 <신쵸45>(2013년 7월호)는 '하시모토 도오루가 지는 날'이라는 특집을 꾸몄는데, 저명한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논픽션 작가)인 호사카 마사야스는 하시모토가 '위안부'에 대한 기초적 지식을 결여하면서 발언을 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외 논자들의 비판의 근거도 전통 문화에 대한 부정, 반지성주의, 대외적 발신력의 부재였다. <요리우리신문>(2013년 6월 28일) 외부 칼럼이 지적한 것도 그의 '역사 인식' 자체가 아니라 국제적인 시선에 대한 신중하고 전략적인 대응의 필요성이었다.

결국 하시모토 추락의 원인은 '고노 담화'를 부정하려는 '역사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국제 무대에서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국제 인권 감각의 문제인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는 아베 총리가 노련했다. 아베노믹스의 효과로 아베 정권 지지율이 고공 행진하는 속에서 보수층을 노린 차별화의 시도가 하시모토의 '위안부'를 둘러싼 발언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아베 정권은 '종전 70주년'에 맞춰 새로운 담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참의원 선거에서는 압승하여 장기 정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아베가 이끄는 자민당은 전체 242석의 절반인 121석을 새롭게 뽑는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65석을 획득했다. 편집자) 아베 총리는 장차 일본의 '역사인식'을 규정하는 2015년의 '아베 담화'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화요일, 일요일 동시 게재합니다. 현무암 홋카이도 대학원 준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 연구원)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2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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