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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종말론'은 끝나지 않았다! 진짜 파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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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종말론'은 끝나지 않았다! 진짜 파국은…

[프레시안 books] 리처드 하인버그의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

2012년

말도 많고 탈도 많던 2012년이 이제 며칠 후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날짜를 적으면 무의식적으로 '2012'를 떠올리는 기억도 설날이 지날 때 즈음이면 '2013'으로 조정되기 때문이다. 2012년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통령 선거의 여진도 대통령 취임식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이다.

2012년, 세상이 망하리라는 출처 불명의 예언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유럽 등 제1세계나 그 언저리에서 기생했던 나라들, 예를 들어 일본, 한국 등에 사는 이들의 마음 한 구석의 불안은 여전하다. 그 정체는 이렇다. '우리는 혹시 몰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홉스봄

지난해 10월 1일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타계했을 때, 나는 왠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혁명의 시대>(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펴냄), <자본의 시대>(정도영 옮김, 한길사 펴냄), <제국의 시대>(김동택 옮김, 한길사 펴냄), <극단의 시대>(이용우 옮김, 까치 펴냄)로 이어지는 그의 작업이 아직 미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소년이었던) 20세기를 마무리하면서 읽었던 <극단의 시대>가 그렇다.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이름 붙인 '단기 20세기'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시작해 1991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끝난다. 하지만 나는 <극단의 시대>를 읽을 때부터 이런 시대 구분이 약간은 성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주하는 자본이 낳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파국과 그 대안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의 파국이 왠지 수미일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2008년 세상이 변했다. 세계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고, 만 3년이 넘은 지금까지 여전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만약 홉스봄이 20세기를 한 번 더 개괄하는 작업을 했다면 '극단의 시대'를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시작해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게 훨씬 더 현실에 부합하고, 홉스봄에게도 어울린다.

몰락의 세기

▲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리처드 하인버그 지음, 노승영 옮김, 부키 펴냄). ⓒ부키
그렇다면, 100년이 지난 시점에 누군가가 21세기를 되돌아본다면 어떻게 이름을 붙일까? 또 어떤 책을 낼까? 현재로서는 책 제목으로 "몰락의 세기" 혹은 "파국의 세기"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며칠간 틈틈이 읽었던 리처드 하인버그의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노승영 옮김, 부키 펴냄)는 바로 그 '몰락' 혹은 '파국'에 대한 얘기다.

하인버그는 특히 '석유 생산 정점(Peak Oil)'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낯익은 이름이다. 석유 생산 정점은 근래의 어떤 시점에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고 나서 지속적으로 하락하리라는, 그래서 조만간 우리가 끔찍한 석유 고갈 사태에 직면하리라는 무서운 주장이다. (석유 생산 정점의 시점은 항상 사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하인버그는 국내에도 소개된 <파티는 끝났다>(신현승 옮김, 시공사 펴냄), <미래에서 온 편지>(송광섭·송기원 옮김, 부키 펴냄) 등의 통찰력 넘치는 책에서 석유 고갈 사태 도래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그것이 가져올 문명의 변화를 예고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 하인버그의 목소리는 기존의 책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강경하다.

하인버그는 21세기가 '몰락의 세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①자원 고갈 ②환경 파괴 ③금융 붕괴. 하인버그는 여기저기서 하도 많이 떠들어대서 이제는 식상한, 하지만 인류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이 세 가지 문제가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 구체적인 근거를 기반에 두고 설명한다. 이 책을 읽어야 할 딱 한 가지 이유만 들라면 바로 이것이다.

그간 나도 '석유 생산 정점'(자원 고갈)과 '기후 변화'(환경 파괴)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고, <녹색평론>도 수년 전부터 '금융의 지배'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대안 사회가 가능하지 않음을 설파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그 반향은 적었다. 여러 통찰과 정보를 담은 하인버그의 이 책이 이런 분위기에 경종을 울리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불확실성

여기서 한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꼬리를 문다. 예측 혹은 예언에는 항상 중요한 꼬리표가 붙는다. 바로 '불확실성'이다.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는 하인버그의 예측도 또 "21세기는 몰락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나의 주장도 더 나아가 "지구 온난화가 심각한 기후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대다수 과학자의 주장도 한 가지 가능성일 뿐이다. 현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튈 수 있다.

제로 성장은커녕 (식상한 래퍼토리긴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상상도 못할 성장의 시대가 눈앞에 펼쳐질 수도 있다. 그러면 몰락은커녕 세계는 한 번 더 유토피아의 단꿈에 취할지 모른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력이 지구 기후를 뒤흔들기에는 미미할 수도 있고, 그 효과로 오히려 지구의 (주로 북반구에 사는) 상당수 사람들이 좀 더 따뜻한 기후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

물론 정반대도 가능하다. 불확실성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낙관론자는 항상 정반대의 가능성은 무시한다. 바로 그 불확실성 때문에 하인버그 등이 예고한 것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파국이 닥칠 가능성이 존재하리라는 사실 말이다. 자원 고갈 혹은 기후 변화를 둘러싼 현재의 논쟁이 기형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왼쪽 끝이 존재한다면 오른쪽 끝도 존재한다.

카산드라의 비극

더욱이 세상은 쓴 소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작년(2012년)에 흥미롭게 읽었던 댄 가드너의 <이유 없는 두려움>(김고명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은 공포에 취한 세상의 비합리성을 꼬집는다. 기억해 둘 만한 정보와 통찰이 많은 책이지만, 나는 "공포가 세상을 덮었다"는 전제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다.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한 대다수는 시종일관 긍정의 메시지를 설파하는데 앞장선다. 특정한 사건, 예를 들자면 후쿠시마 사고 등을 계기로 부정의 메시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점이 있긴 하지만 금세 사그라진다. 왜냐하면, 세상은 지독히 보수적이어서, 현재를 문제 삼는 태도나 그런 노력에 끊임없이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유 없는 두려움"의 실체다.

그런 점에서 하인버그를 비롯한 비관론자는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미래를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대중에게 환영을 받기는 더 어렵기 때문이다. 트로이의 멸망을 얘기했던 카산드라는 옳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몰락의 윤리학

나는 종종 자원 고갈, 기후 변화와 같은 불확실성이 큰 문제를 놓고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간단한 사고 실험을 제안한다.

여기 '베짱이'와 '개미' 두 공동체가 있다. 베짱이 공동체는 매사에 이런 식이다. "기후 변화는 사기야! 자원 고갈은 과학기술이 해결해! 자본주의 위기, 웃기시네!" 반면에 개미 공동체는 정반대다. "불확실하긴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지! 계속 삐걱거리는 자본주의를 언제까지 믿어야 하는 거야!"

21세기가 저물 무렵, 역사는 두 공동체 중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까? 다행히 인류 문명이 아무런 문제없이 지속된다면 두 공동체는 모두 생존할 것이다. 가끔 베짱이 공동체가 개미 공동체를 놓고서 "호들갑 떨더니 꼴좋다" 하고 조롱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야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카산드라가 예고한 것처럼 21세기에 파국의 연쇄가 계속되면, 그래서 세상이 달라지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조금이라도 파국에 대비한 개미 공동체는 생존할 가능성이 크겠지만, 베짱이 공동체는 파국 속에서 속절없이 희생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베짱이 공동체와 개미 공동체, 둘 중 누가 불확실한 세상에 제대로 대응한 것일까?

이런 사고 실험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하인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예측에서 시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이 책의 진짜 목표는 올해 일어날 수도 있고 10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결국 일어나고야 말 성장의 종말을 더욱 정확하게 예측하여 점수를 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이 사회가 효과적으로 적응하여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41~42쪽)

우리는 지금 이런 식의 '몰락의 윤리학' 혹은 '파국의 윤리학'을 얘기할 때다. 이 책은 몰락을 준비하는 새로운 윤리학의 출발점이 될 만한 책이다. 앞에서 언급한 베짱이 공동체와 개미 공동체의 사고 실험을 염두에 두고 나도 그런 새로운 윤리학의 가능성을 이렇게 정리한 적이 있다.

"그저 '현재처럼 미래에도 모든 일이 잘 될 거야'라고 되뇌는 사람은 낙관론자라기보다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해를 끼치는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진짜 낙관론자는 항상 최악의 상황에 준비하면서,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이들이다. 즉 현재의 비관론자가 최후의 낙관론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들 진짜 낙관론자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미처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한 이웃에도 손을 내밀 수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이타주의자다. 지금 이 시대야말로, 로맹 롤랑이 말하고 안토니오 그람시가 강조했던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가 절실한 때다."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사이언스북스 펴냄), 9~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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