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발표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는 대표적인 핵공학자이자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역임했던 인사가 포함되었다. 지난 4·11 총선에서 비례 대표 1번으로 핵공학자를 넣었을 때 이미 암운을 직감하긴 했지만,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참담한 심정이다.
박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핵 발전이나 에너지 정책 관련해 특별한 비전이나 정책을 내놓은 바가 없다. 시대적으로 비전과 정책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안에 대해 언급이 거의 없었던 것도 심각하지만, 당선이 되자마자 보란 듯이 '핵 마피아'로 꼽히고 있는 인사를 선발한 것은 끔찍한 수준의 현실 인식이다.
찬핵도, 반핵도 표명한 바 없다고 둘러댈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에게 투표한 51퍼센트 역시 당선인의 에너지 정책에 찬성했다는 뜻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핵 발전과 에너지에 대한 공약을 명확히 걸지 않았다면 지금 새 정부가 추진할 정책은 당연히 사회적 토론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예민한 사안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형국이 되고난 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건 비겁한 행동이다. 이건 누가 봐도 핵 발전을 확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고, 국민에게는 혹독한 불통의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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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전력난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는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고 따라서 핵 발전이 대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때문에 시급히 추진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양해를 구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당선인에게 닳고 닳은 '구국의 일념'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건 수십 년에 걸친 장기적인 문제고, 따라서 사회가 동의하는 비전이 필요하다. 즉 판단은 국민이 한다.
더 우려스러운 건 문제가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올해는 제6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과 제2차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이 발표된다. 특히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은 작년에 발표되었어야 하는데 아직 계획조차 완성되지 못한 상황이다. 따라서 시간이 없는데다가 박 당선인이 찬핵론자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핵 발전이 중심이 된 이전 계획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태로 나올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기반으로 작성될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정책 결정권자들이 법으로 정해진 시한을 넘기면서까지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부가 무능했거나 누가 새로운 권력이 될 것인가 하는 눈치를 보았거나 둘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대선 후보 중 1인은 사실상 찬핵을, 1인은 탈핵을 걸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1~2년 계획도 아니고 십수 년을 목표로 하는 장기 계획이 누군가의 무능이나 눈칫밥으로 좌지우지된다면 그 자체가 난센스다.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대체 계획을 세우는 목적이 무엇이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일련의 과정과 거의 흡사한 일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정시기였던 1962년에 '원자력 발전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고, '원자력 발전 추진 계획'을 수립했다. 군정 시기답게 국민 동의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것이 핵발전소 밀집도 세계 1위, 전력 사용량 세계 9위, 1인당 사용량 선진국 추월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핵 발전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 결정이야말로 경부고속도로에 버금가는 탁월한 혜안이라며 사또에게 설레발 떠는 이방처럼 성찬할지 모르겠지만, 중앙 집중형 에너지 체계가 지금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핵심 요인이 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대는 변한다. 백 번 양보해서 당시에는 집중된 에너지원이 필요했다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 발전 추진 양상이 군정 시기와 너무 똑같아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국민적 동의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 혼자 판단하고 혼자 추진하는 이런 상황을 다시 5년이나 지켜볼 자신감이 없다. 어쨌든 에너지·기후 변화 문제는 이제 돌려막기가 가능한 수준도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 나치스의 나팔수 역할을 했던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다."
난 우리의 미래를 그들에게 위임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런 시도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이 아닌 '초록 대안'을 찾으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활동의 일부분입니다. ☞바로 가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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