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린 친구에 밀려 낙방한 이들은 심기일전을 다짐하며 자신의 자기소개서와 면접 내용을 곱씹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탈락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서점에 가서 '이 책'을 빼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나온 <면접 잔혹사>(이충섭 지음, 청림출판 펴냄)는 포스코에서 17년간 인사를 담당한 지은이가 5만 명이 넘는 구직자들을 면접하며 체득한 '면접 노하우'를 풀어놓은 책이다. 부제가 "살벌하고 통쾌한 실전 사례로 취업 전쟁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취업 관문 앞에서 번번이 고비를 마시는 이들이라면 혹하지 않을 수 없다.
'멘토'를 자청한 친절한 '면접관' 씨
지은이가 전하는 핵심 전략은 '기본과 원칙'이라는 기본 원칙이다. '면접은 대기실에서부터 시작된다', '집단토의 평가 포인트는 배려, 경청, 기록', '잘난 사람보다는 사회성이 좋은 사람', '그 사람들과 골고루 눈을 맞춰라',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스럽게', '첫 직장, 환상을 버려야 잡는다' 등 기본을 지키는 것이 곧 차별화 전략이라고 말한다.
<면접 잔혹사>의 강점은 배울 점과 버릴 점을 보여주는 풍부한 실례 그리고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본 지은이의 진심 어린 평가다. 그는 단순한 평가를 넘어 때로 개입도 마다치 않는다.
내가 만약 구직자라면 봉사 활동을 하면서 느낀 복지 정책의 문제점과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언급하겠다.(66쪽)
▲ <면접 잔혹사>(이충섭 지음, 청림출판 펴냄). ⓒ청림출판 |
구직자들에 대한 연민도 느껴진다. 지은이는 작가 소개문에서부터 "고액 컨설팅을 받는 현실 속에서 어렵게 취업 준비를 하는 구직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스펙에 쫄고, 빽에 기죽고, 나이에 밀린" 구직자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그의 마음이 행간마다 드러난다. 아래와 같은 일화도 있다.
반칙이긴 해도 이런 구직자들에게는 그 자리에서 내가 생각한 모범 답안을 들려주고 이를 토대로 다시 이야기하도록 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낙방을 하더라도 다른 회사 면접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꼭 알려주고 싶었다.(163쪽)
가족과의 에피소드를 묻는 말에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얘기할 만한 게 없다고 답한 구직자에게 지은이가 취한 행동이다. 오죽 안타까웠으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다. 지은이가 때로 '판관'을 넘어서 '멘토'로 느껴지는 이유다.
면접 모범 답안? 노, 땡큐!
어느새 '멘토'가 된 면접관은 '기본과 원칙'이라는 방향 제시를 넘어 '모범 답안'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약점을 빙자한 장점인데, 도전 정신을 어필하는 차원에서는 의미 없는 대답이다. 모범 답안은 다음과 같다. "저는 이공계 출신이라 수학은 자신 있지만 영어, 특히 회화에는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취업을 위해 반드시 영어회화 능력을 갖추자고 결심했고…"(36쪽)
온갖 실례들을 통해 모범 답안을 보여준 지은이는 또 동시에 '무작정 따라하지 말라'며 구직자들의 '모방 면접'을 경계한다. 그는 '채용 담당자가 반하는 블로그 꾸미는 방법'을 이야기해 놓고, "채용 정보로 돌아다니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195쪽)"고 말한다.
지은이가 뽑은 좋은 사례들은 모두 합격 판정을 받은 예들이다. 합격에 목마른 구직자들에게 모방 심리가 작동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도 실컷 합격 사례를 소개해놓고 '어디 가서 써먹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이쯤 되면 아리송하다. 이 책을 계속 보는 게 과연 도움이 되는 걸까? 지은이는 온갖 실례들을 늘어놓지만, 그 가운데 구직자들이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건 없다. 문제 아래 정답이 빤히 나와 있는데도 그 정답을 옮겨 적으면 안 되는, 난감한 상황인 셈이다. 사실 지은이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이미 이 책에 나와 있는 모범 답안들은 쓸모없는 것들이다. '정보'라는 것의 속성 탓이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모두에게 유익하다면 그것은 이미 정보로서 효용가치가 없다. 특히 서바이벌 상황에선 더욱 그러하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정보는 진짜 정보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매해 날개 돋친 듯 판매되는 '면접 매뉴얼'들이 과연 구직자들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됐을지는 의문이다. 지은이의 선한 집필 의도와는 다르게 말이다.
친절한 취업 매뉴얼 덕분에 구직자 개개인의 수준은 향상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면접 수준도 상향평준화된다. 결국 변별력이 사라진 면접장에는 또 다른 유형의 면접이 생겨나고, 다시 고액 취업 컨설팅이 활개를 치고…. 취직의 길은 다시 또 멀어지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면접 잔혹사>뿐 아니라 모든 자기 계발서가 지닌 '존재론적 딜레마'다. 친절한 자기 계발서에 함부로 열광해선 안 되는 이유다.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움에의 강요'
'면접 매뉴얼'이 갖는 딜레마는 또 있다. 면접 매뉴얼은 면접의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심지어는 '자연스러움'마저 가르친다.
질문이 설령 예상했던 것이었고 답변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더라도, 몇 초쯤 잠시 생각하는 듯한 시간을 갖고 말문을 여는 편이 낫다. 그렇지 않으면 예상 문제를 뽑아 달달 외워온 답변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면접관은 이 모든 것을 간파하면서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답변하라. (98쪽)
잠깐 사담을 하자면, 나는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시력이 안 좋아 눈을 흘겨 뜨고 다녀선지 카메라 앞에서도 웃는 모습이 영 어색하다. 아무리 사진관 아저씨가 "김치 치즈 스마일"을 외쳐도 표정은 경직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온 사진들은 나도 모르는 새 찍힌 사진들이다. 자연스러움은 연출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오는 법이다.
자연스러움마저 계산하는 면접 매뉴얼을 읽다 보면 "애교를 글로 배웠다"던 어느 시트콤 장면이 떠오른다. 애교를 글로 익힌 극 중 배우의 어색한 몸짓은 코믹 그 자체였다. 스스로 자연스럽게 체득하지 않은 방식은 제 것이 아닌 태가 나기 마련이다.
면접 스킬만의 얘기가 아니다. 자기 계발서 대부분이 그렇다. '직장 생활 잘하는 법', '사랑스러운 애인이 되는 법' 등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돼야 할 많은 것들이 '매뉴얼화'되고 있다. 언젠가 정말로 '애교 부리는 방법' 매뉴얼 북이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방송사에서 대학을 채 마치지 않은 어린 학생을 선발한 이유는 뭘까. 이 합격자는 아직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경험해본 적도 없으며, 취업을 위해 사설 학원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아마도 면접관들은 이 합격자에게서 매뉴얼에 길들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발견한 게 아닐까. 그것이 더욱 이 학생을 돋보이게 한 매력이 아니었을까.
이제 그만 당신의 손에 들린 매뉴얼을 놓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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