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읽는 능력은 최고지만 '글'을 읽는 능력은 꼴찌라는 것. 이런 상황이 기사의 홍수라는 우리의 언론 환경과 만났을 때 대대적인 뉴스 오독이 벌어진다. 당내 민주주의 문제였던 통합진보당 사태가 "종북 분자 퇴출"이라는 극단적인 구호로 이어지고, 우연히 사선으로 잘린 만장깃대를 들었던 집회 참여자들은 '계획된 죽창'을 든 과격분자로 낙인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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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김종배 지음, 쌤앤파커스 펴냄). ⓒ쌤앤파커스 |
팟캐스트 '이슈 털어주는 남자' 덕분에 요즘은 '이털남'으로 더 잘 알려진 그가 지난 7일 <프레시안>과 쌤앤파커스가 공동 주최한 강연회에서 독자들을 만났다. 이날 저녁 서울시 용산구 서울역사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강연에서도 그는 거듭 독자의 주권을 강조했다. 어떤 정보 앞에서든 쉽게 웃거나 울지 말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삐딱선'을 타라는 것.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된 그의 강연을 정리했다. <편집자>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자의 비애
얼마 전 모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어가 마지막에 내게 '한 방'을 날렸다. 요즘 책이 잘 나가느냐고 묻기에 외교적으로 "그런 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이 책은 아마 잘 안 팔릴 거예요"라는 거다. 이유를 묻자 "양쪽 진영에서 전부 욕 얻어먹기 좋은 책"이라고 답하더라. 소위 진보, 보수 언론을 가리지 않고 비판을 했는데, 차라리 한쪽 편을 들었으면 언젠가 그쪽으로부터는 보호를 받겠지만 이건 양쪽 다 '깠으니' 외롭지 않겠느냐고.
사실이 그렇다. 어느 한쪽 진영에 몸을 담고 그 목소리를 높이면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난 그걸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 초년 기자 시절 어느 선배는 내게 "넌 그 반골 기질 때문에 쫄딱 망할 거다"라며 독설하기도 했다. 그런데 난 이 '편들기'가 문제적이라고 본다. '편' 자체는 문제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왜 문제가 될까?
2년 가까이 <프레시안>에서 글쓰기 강좌를 맡아 왔는데 한 번은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수강을 했다. 이 분이 논술 수업 때 학생들더러 집에서 구독하는 신문의 사설을 오려 와 수업 시간에 발표하라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수업 방식을 포기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보는 집 아이와 <한겨레> 보는 집 아이가 논술 시간에 서로 싸우더라는 얘기다.
진영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개인이 이념을 갖고 성향이 갈리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관점만 있어도 된다면 신문이 여러 개 있을 필요도 없다. 사회는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가 상호 경쟁하면서 발전하기 때문에, 진영 대결도 그 진영의 가치를 대변하는 신문 간 논조의 다양성도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그 '진영 대결'을 함에 있어 방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게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를 쓰게 된 동기이자 나의 근본적인 믿음이다. 페어플레이가 이뤄지지 않는 주된 책임은 일차적으로 뉴스를 전하는 언론에게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대결을 제대로 하려면, '나는 어느 진영에 속해 있다'는 귀속감을 느끼는 사람부터 진영 논리에 갇히지 말고 사안을 다각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진영 논리의 포로가 되지 않고 뉴스를 보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 시사평론가 김종배. ⓒ프레시안(최형락) |
우리는 뉴스에 속고 있다? '억견'을 주의하라!
작년 연말 서울 어느 구에서 4강 코스의 인문학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 구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실이다 보니 수강생의 나이와 이념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30대에서 70대까지 있었고, 자신이 '극 진보'라 주장하는 분도, '보수적 가치의 신봉자'라 주장하는 분도 있었다.
10·26 서울 시장 보궐 선거 치른 이후에, 수강생들에게 누굴 찍었냐고 물으면서 선거와 관련된 보도 내용을 주고 '이제부터 주장은 일체 이야기하지 말고, 보도 내용만 가지고 분석해 보자'고 요구했다.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수강생들이 "속았다"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념에 비추어 표를 행사했는데, 실제론 너무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다. 그러면서 내게도 "너도 기자 출신 아니냐"며 언론 욕을 하더라. 이 분들은 왜 '속았다'고 느꼈을까?
그리스어로 독사(Doxa)라는 단어가 있다. "사람이 감각 기관을 통하여 얻은 감각적 지식을 토대로 어떤 대상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품게 되는 견해"란 뜻이다. 독사는 객관적 검증을 거치지 못했기에 주관적이며, 완전한 지식이 되지 못한다. 이를 한자로는 억견(臆見)이라고 한다. 왜 '가슴 억(臆)' 자를 썼을까 곱씹어 봤는데 정말로 명 번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보와 지식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형성되는 견해라는 뜻이다.
억견은 이해관계나 경험의 소산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전쟁을 겪은 분들에게 '빨갱이'는 치 떨리는 단어다. 그분들에게 '북한과 대결을 끝내고 평화적인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한들, 과연 그게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회의적이다. 자기 경험으로 만들어진 선입견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특히 직접적인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유불리만 따지지,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뉴스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세상을 가슴으로 읽고 받아들이는 것은 열정 혹은 '주인 된 자세'를 뜻할 수도 있는데 왜 문제인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는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다'라는 속담을 생각해 보자. 결국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거짓말을 믿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쓰레기'와 '독극물'
ⓒ프레시안(최형락) |
2004년 6월, 언론이 '쓰레기 만두소'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적이 있었다. '만두소 업자들이 단무지를 만든 뒤 폐기처분하는 자투리를 수거해 오염된 우물물로 세척·탈염한 뒤 만두소를 만들어 유명 만두·호빵 제조업체와 음식점 등에 납품했다'는 경찰의 발표 때문이었다. 언론은 이를 즉시 '쓰레기 만두소'로 명명하고 이 만두소가 모든 해악의 원인인 것처럼 과장해서 묘사했다. '아이들 먹는 간식'을 무엇보다 신경 쓰는 부모들 사이에서 분노가 들불처럼 번졌고 만두 제조업체는 하나 둘 문을 닫았다. 급기야 한 만두 제조업체 사장이 경찰의 발표 일주일 뒤 반포대교에서 투신자살했다.
이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면 좀 더 나은 보도를 위한 진통이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앞서도 유사한 사건으로 '포르말린 통조림 사건'이 있었다. 골뱅이 등 통조림 제품에서 사체 부패 방지용으로 쓰이는 포르말린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검찰 발표가 나오자 언론은 검증 없이 대서특필했다.
해당 업체 업자들은 기소됐고 관련 업체뿐 아니라 유통 업체들까지 줄줄이 문을 닫았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천연 상태의 원료에 포르말린 구성 물질인 포름알데히드가 자연 생성될 수 있는 점'을 간과한 채 충분한 증거도 확보하지 않고 관련자들을 기소했다는 검찰 수사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결국 법원은 '포름알데히드가 검출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자연 상태의 식품에도 원래 존재하고 인위적으로 첨가했다고 볼 수 없다'며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이미 '독극물 통조림'이라는 언론의 헤드라인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이 판결이 첫 언론 보도의 자극만큼 크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이런 식으로 언론이 검증 없이 받아쓰고 일이 커진 뒤 피해자가 생기고 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정확한 사실관계 해명은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근본적인 원인은 과열 경쟁하는 언론에 있지만, 수용자들도 강렬한 정보 앞에서 가슴만 내밀다 보니 문제가 커진다. 뉴스는 원래 '단면'이다.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세상의 많은 일들을 단면으로 쪼개 파편으로 전달한다. 이것을 입체화시키는 게 수용자들의 몫이다. 모두 먹고살기 바빠 전해주는 대로 떠먹게 되지만, 이 입체화를 하지 못하면 결국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게 거짓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계획된 죽창'
어떤 사안도 하나의 '팩트'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조각난 사실들이 묶여서 만들어진다. 그 파편들은 제각각 일면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뉴스 속에서 만나고 엮이고 길항하면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 관계가 제대로 맺어져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게 바로 '합리적 의심'이다. 팩트들이 이치에 맞게 맺어져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2011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안철수 현상'을 예로 들어 보자. 한 번의 정치 활동 없었던 안철수 원장이 갑자기 차기 대선 주자로 떠오른 이 현상 뒤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을 텐데,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이 때문에 안철수 현상이 일어났다'고 결론 내린다면 그건 제대로 된 분석이 아니다.
안철수라는 인물의 캐릭터는 1년 전에도, 5년 전에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같은 캐릭터가 왜 하필 지금에 와서 떴을까? '안철수 같은 캐릭터는 처음이었다'고 분석하면 이 시기적 특수성이 해결되지 않는다. 반면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라고 분석한다면, 이 역시 늘 존재해 왔던 것인데 왜 하필 '안철수'라는 인물을 통해 발현되는가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들과 함께 그 외의 많은 것들이 결합된 상태에서 조명해야 안철수 현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고(思考)'다.
2009년 봄 화물연대가 총파업을 선언하고 정부 대전청사 앞에서 민주노총과 함께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화물연대의 박종태 광주지회장이 대한통운 택배 배송 화물차주들에 대한 대량 계약 해지에 반발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로 촉발된 대회였다. 여기에서 노동자들은 박종태 지회장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수백 개의 만장을 들었는데, 나흘 후 이 만장깃대가 <조선일보>에 의해 '계획된 죽창'으로 보도되면서 후폭풍을 일으켰다.
ⓒ조선일보 |
이 전국노동자대회 도중 집회 참가자와 경찰 간 충돌이 빚어졌고 이 과정에서 일부 집회 참가자들이 만장깃대를 휘둘렀는데, 이에 경찰이 620개의 죽봉을 압수한 결과 몇 개가 끝이 뾰족한 죽창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대전경찰청의 말을 받아 '만장용으로 만든 죽봉과 확연히 구분된다'라고 보도했을 때 거기엔 '장례식은 명분일 뿐이고 애당초 폭력 시위를 할 목적을 갖고 있었다'라는 함의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에 당시 한나라당의 어떤 의원은 국회에서 '죽창'으로 전경을 찌르는 장면을 시연하기도 했고, 사람들은 화물연대를 비판했다.
나는 이 보도를 보고 실소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우리 집 앞에 대나무 밭이 있었는데, 그걸로 여러 가지를 만들면서 대나무를 베어보아야 했다. 대나무를 한 번이라도 베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낫으로 벨 경우 직각으로 내리치면 대나무가 쪼개지기 때문에 사선으로 내리쳐야 한다. 낫으로 벨 경우 모두 '죽창'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보도 속엔 '부적절한 관계'가 있다. '계획된 죽창'으로 단정하기에 근거가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먼저 경찰이 압수한 죽봉 620여 개 가운데 끝이 날카로운 것은 단 20여 개에 불과했다. 비율은 고작해야 3.2퍼센트인데, 계획적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엔 턱없이 왜소한 비율이다. 화물연대가 바보인가? 폭력 시위를 할 목적이었다면 왜 스무 개만 죽창으로 만들었겠나.
아주 간단히만 생각해 보아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인문학 교실에서 수강생들이 화를 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왜 내가 이 단순한 걸 놓쳤을까 싶었던 거다.
ⓒ프레시안(최형락) |
'싸가지 없는' 독자가 되자
잘 아는 언론계 선배 중 하나가 동창회에서 여고 시절 단짝이었던, 연예인이 된 친구 한 명과 오랜만에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연예인 친구가 어머니에게 "동창회에서 연락 끊겼던 단짝 아무개를 만났는데 기자가 되어 있었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걔 학교 다닐 땐 엄청 착했는데…"라고 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기자에 대해 흔히 갖는 이미지 중 하나가 '싸가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욕이 아니라, 맞는 평가라고 생각한다. 기자는 정보를 주는 사람에게도 '저게 대체 무슨 꿍꿍이로 나한테 정보를 주나' 의심해야 하는 존재다. 취재원이 말하는 대로 받아쓰면 오보가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의심의 대상에 올려놓은 다음 검증을 한 뒤 '사실이다'라고 판단했을 때 보도해야 한다. 또 무대 위에 올라 온 사람의 공식적인 모습과 무대 뒤 천연의 모습에 간극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인간의 이중성을 자주 접하다 보니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생길 수가 없다. 사람을 잘 믿지 못하니 '싸가지 없다'는 소리도 듣는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삐딱선'을 타야 그나마 오류를 줄일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이는 독자 입장에서도 다를 바 없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지 않으면 뉴스에 놀아나게 되어 있다. 여러분들이 뉴스를 활용하는 게 아니라, 뉴스가 여러분을 활용하게 된다.
ⓒ프레시안(최형락) |
하루 보도되는 뉴스가 적으면 300개, 많으면 500개나 된다. 이걸 하나하나 감별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는 뉴스 딱 하나만이라도 잡아서 따지고 들어가 보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이성을 믿어 보라. 어떤 뉴스를 보고 단순히 넘어가지 말고 '뭔가 장난 치고 있나' 의심을 해 보면 하루나 이틀 뒤에 '이 보도엔 문제가 있다. 사실은 이러하다'는 후속 보도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거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삐딱선'을 타게 된다. 그렇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중심을 잡게 될 것이다.
글쓰기, 벌거벗는 일
이 책은 뉴스 비평에 그치지 않고 3부에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글쓰기를 돕는 챕터를 함께 실었다. 왜 뉴스 비평에서 멈추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할까 한다.
글쓰기 강좌를 하며 느낀 건데, 술자리에서 정치 평론을 하면 꼭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말을 통해서 주장을 펼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인상, 목소리, 눈짓, 손짓, 때론 주변의 호응 같은 '부속 장치'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걸 글로 쓰면 그 주장의 한계가 들통 난다. 술자리 달변가들더러 그 주장을 글로 써보라고 하면 그만큼의 글이 나오지 않는다.
주장만 늘어놓아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게 글이다. 화자의 결론이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나온 것인지 검증하기 위해선 주장이 아니라 근거를 봐야 한다. 헌데 글을 써보면 주장에 맞는 근거를 대기는커녕 그 둘이 모순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보통 어떤 주제에 대해 써 보라고 하면 인터넷 검색을 한 뒤 자료를 버무려서 가져 오는데, 거기에는 계통이 없는 경우가 많다. 유의미한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게 과연 그 사람의 견해일까? 그저 어디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식이라면 사회적인 소통은 불가능하다.
앞서 진영 대결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씀 드렸다. 이 대결이 발전으로 이어지려면 당연히 소통과 토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토론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받치고 있는 근거가 옳은지 따지는 작업이다. 집에 비유하면 기둥이 근거고 지붕이 주장이다. 상대방의 주장과 내 주장이 다를 때, 그 둘을 맞세우면 밤을 새워도 토론은 이뤄지지 않는다. 반드시 '근거'가 중심에 와야 한다.
근거를 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혹은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하는 방법은 바로 글이다. 글은 자신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을 비추어보는 방법이다.
여러분들도 뉴스를 보다 '꽂히는' 사안이 있으면 그와 관련한 주장하는 글을 한 편 써 보길 바란다. 사안을 얼마나 촘촘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글을 통해 검증해 보라. 내 속살에 때가 얼마나 끼어 있는지 금방 드러날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마지막으로, 앞서 진영 논리에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을 했지만, 나 역시 진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네 색깔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보수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횡행하는 보수적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거기서 얼마나 열린 자세를 갖고 있느냐에 있다. 이 세상엔 완벽한 진리도, 완벽한 오류도 없다. 어떤 입장, 주장도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아니다. 어떤 입장이든 일말의 진실과 오류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선이나 절대악이라는 이분 구도로 치닫는 순간 우리가 대화해야 할 상대는 타도 대상이 된다.
여러분 모두가 사회의 일원이자 뉴스 수용자로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안을 언제나 삐딱하게 봐 주었으면 좋겠다. 다소 귀찮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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