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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 "숫자로 밀어붙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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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 "숫자로 밀어붙이자!"

[해방일기] 1947년 5월 30일

1947년 5월 30일

1947년에 입법의원에서 선거법을 심의하면서 법안 이름을 '보통선거법'(보선법)이라 했다. 선거라는 제도는 아득한 옛날부터 있던 것인데, 예전의 선거권에는 신분, 성별 등 제약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모든 제약을 철폐하는 '보통선거권'의 이념이 보편화되면서, '보통선거'라야 진짜 선거요 진짜 민주주의란 관념을 사람들이 갖게 되었다. 선거법을 처음 제정하는 남조선에서 법안 이름을 '보통선거법'이라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입법의원의 (자칭) 우익 세력이 선거권 연령 제한을 만25세로 주장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젊은 사람일수록 불의에 대한 참을성이 적고 진보적 성향을 많이 갖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다. 한민당-이승만 세력은 젊은 층의 투표를 싫어했다. 돈과 주먹의 힘으로 권력을 쥐는 데는 젊은 층의 참여가 방해가 되었다.

보통선거권의 개념이 맹아 단계에 있던 18세기 중엽(1755~69년) 코르시카공화국에서 선거권 연령을 25세로 한 일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20세나 21세가 상식이 되었다. 1947년 당시로 보면 민주주의를 시행한다는 나라 중에 25세 이상으로 선거권을 제한하고 있던 나라는 그리스와 칠레 둘뿐이었다. 많은 나라에서는 제한이 20세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보통선거권이 서양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보통선거권이란 인종, 성별, 종교, 재산, 신분 등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무엇보다 성별 문제가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면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여성 참정권이 처음 확립된 것이 1893~94년 대영제국의 뉴질랜드 자치령과 남아프리카 자치령에서였고, 유럽에서는 1906년 핀란드대공국이 처음이었다. 민주주의의 본산처럼 여겨지는 프랑스에는 1944년에야 도입되었다.

보통선거권에 이르는 선거권의 확대는 국가의 국민 동원 필요와 맞물린 일이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19세기 중엽부터 확산된 것은 산업혁명의 결과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난 결과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의 동원 필요는 남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재산, 신분 등의 제한은 철폐되는데도 여성 참정권은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총동원 체제를 겪으면서 완전히 풀리기에 이른 것이었다.

치열한 운동을 통해 쟁취된 여성 참정권을 포함한 보통선거권이 조선인에게 거저 주어진 것은 시대의 유행 덕분이었다. 그런데 남조선 우익 세력은 당시로서 엽기적인 만25세 연령 제한을 들고 나온 것은 정파 이익을 민주주의 실현에 앞세운 자세를 보여주는 일이다.

5월 21일 입법의원에서 보선법 초안의 제2독회 중 제1조 제1항의 25세 제한을 20세로 바꾸자는 동의가 나왔다가 부결되었다. 동의를 지지한 것은 대부분 관선의원이었고 반대한 것은 대개 민선의원이었다. 이 동의가 부결되자 말도 안 된다며 약 20명이 퇴장했고, 그 결과 회의가 법정인수 미달로 휴회되고 말았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5월 23일) 퇴장한 의원들은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동 원문의 통과는 비민주주의적이니 우리는 보선법이 원에서 통과되어도 서명치 않겠고 동 안의 심의 중에는 출석치 않겠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3일)

이튿날 회의에서 서우석 의원으로부터 퇴장 의원들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자는 동의가 나왔다. "원내 질서를 무시하고 원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하였다"는 이유였다. 한민당 중심 민선의원들의 지지로 징계위원회 회부가 의결되었다.(<동아일보> 1947년 5월 23일)

이 징계 문제로 이후 며칠간의 회의는 계속 소란했다. 5월 26일 제81차 본회의에서는 성원(61인) 미달로 보선법안 토의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보선법안 제2독회가 끝나기 전에는 다른 법안의 상정을 금지한다"는 홍성하 의원의 동의가 채택되었다.(<동아일보> 1947년 5월 28일) 우익세력이 다수결을 휘두르는 데 중간파가 보이콧으로 대항하는 형국이었다.

5월 29일 제84차 본회의에서 '소수파' 5의원 징계안이 나오자(당시 언론에서는 보선법을 급히 추진하는 쪽을 다수파, 반대편을 소수파라 불렀다.) 의사 진행이 불가능한 충돌 상황이 되었다. 사회를 맡고 있던 윤기섭 부의장이 타협 기간을 갖자며 1주일 휴회를 선언하자 보선법 추진파에서는 이것을 보선법 처리를 늦추기 위한 '꼼수'로 보았는지 임시의장을 뽑고 회의 속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입법의원은 의원선거법을 시급히 통과시키자는 민선의원 측의 주장과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등 특별조례를 먼저 통과시키자는 관선의원 측의 대립으로 기왕부터 논쟁을 거듭하던 중 제2독회에서 선거권자는 25세 피선거권자는 30세로 하자는 민선의원 측의 주장이 다수결로 통과되자 선거권자를 20세 피선거권자를 25세로 하지 않으면 청년층을 무시하는 보수적 규정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 하여 관선의원 18명은 강경히 반대를 표명하는 동시에 이 조항을 고치지 않는다면 의원선거법 초안 토의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여 왔던 것이어니와 이에 있어서 민선 측에서는 종시 타협을 거부하고 또 의원선거법을 통과시킬 때까지는 다른 법안은 상정하지 말자는 동의를 가결하였기 때문에 4, 5일간의 본회의는 회의중간에 유회를 거듭하여 오자 이 사태를 의장 등 간부 측에서도 수습할 수 없다 하여 29일 제84차 본회의 때에 비공식으로 양편의 타협을 꾀하고자 1주일간 휴회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민선 측에서는 이것은 의원선거법통과를 방해하는 처치라 하고 민선의원 전원과 김법린 장면 김익동 엄우룡 황신덕 박현숙 등 6·7명의 관선의원은 자기네까리 박용희를 임시 의장으로 선출하고 유회 혹은 유회 대책을 비공식으로 토의하고, 또 입법의원으로서의 기괴한 정경은 이 뿐만에 그치지 않고 나중에는 싸움이 벌어져서 관선의원 박건웅과 민선의원 간에 싸움이 일어나자 장면이 말리는 중에 홍성하가 박건웅에게 재떨이를 던지는 바람에 얻어맞아 부상까지 날 뻔하였다.

이렇게 싸워가며 하는 비공식토의에서는 원법 제3조(휴회 중에 재석의원 4분의 1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는 3일 이내로 회의를 개최함)를 적용하여 속개하도록 연명으로 건의할 것을 결의하고 30일에 의장에게 이를 통고하였다는 바 이 결의대로 3일 후에는 원법에 의해서 회의를 열지 않을 수도 없겠고 양편의 싸움은 쉽사리 풀릴 것같이 보이지 않는 만큼 이 혼란과 추태는 어느 때나 해소될 것인지? 내주일 월요일의 본회의는 극히 주목되고 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5월 31일, 6월 01일)


보선법 추진파는 물불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기에 나섰다. 러치 군정장관이 보선법 조속 제정을 강력히 왔을 뿐 아니라 5월 13일 이승만이 보선법 제정을 천연하는 자는 "독립을 지연하는 죄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언명한 것이 그 배경이다. 입법의원 의장단인 김규식, 최동오와 윤기섭은 이에 대항해 의장, 부의장직뿐 아니라 의원직까지 그만두겠다는 사면원을 제출했는데, 그 요지는 6월 4일자 <동아일보>에 이렇게 보도되었다.

"과반 보선법안 제2독회 토의 시에 있어 선거권 및 피선거권 보유 연령을 25세 및 30세 이상으로 규정된 조항을 그대로 가결한 것은 3백여만의 청년들의 공민권을 박탈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시대에 역행하는 비민주주의적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으매 여사한 입법부 내에 안연히 의석을 차지하고 있을 수 없으니 입의 의원을 사면시켜 주기 바란다."

보선법 추진파 의원들의 요구에 따라 6월 3일 재개된 본회의에서 다시 임시의장을 뽑는다고 투표를 하여 김붕준 의원이 당선되었으나 본인이 거절하여 다시 투표를 한 결과 변성옥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안재홍 민정장관의 서한이 보고되었다.

"25세 이상 남녀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안은 세계 민주주의 입법사상에 배치되고 조선현실에도 적합치 않는 것이라고 인정되니 선거법이 그대로 통과되어도 군정장관으로서는 이를 거부할 의사라는 것을 전달한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6월 05일)

그 이틀 후에는 러치 자신이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문) 입법의원에서 선거연령문제로 분규가 많은데?
(답) 선거자격을 25세로 한다는 것은 나도 동의치 않는다. 20세나 21세로 한다면 그만큼 널리 인민의 의사와 권리를 반영 또는 확보할 수 있는 까닭이다.
(문) 입법의원은 반드시 인민을 대표한다고 볼 수 없는데?
(답) 그 의견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렇기에 보선법이 속히 통과되기를 바라고 있는 바이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6월 6일)


김규식 등 의장단은 6월 9일 제88차 본회의에 나와 사의를 철회했다. 그리고 연령 문제가 걸린 보선법 제1조는 후일 토의할 것으로 미뤄놓고 보선법 토의를 계속하기로 했다.(<조선일보> 1947년 6월 10일) 러치의 강경한 태도 앞에서 보선법 추진파도 연령 문제에 양보할 뜻을 비쳤기 때문에 파국을 피하는 타협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5월 14일자 일기에서 선거권 연령 문제를 언급할 때 떠오르는 생각을 적은 것이 있다. 미성년자라 해서 선거권을 주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맞는 일일까, 갓난아이까지 모두 선거권을 주고 미성년자는 보호자(부모)가 대신 행사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몇 해 전부터 널리 검토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 후 알게 되었다.

<Wikipedia>의 "Demeny voting" 조에 이 움직임이 소개되어 있다. 미성년자에게도 선거권을 주자는 것은 인구학자 폴 데미니가 1986년에 발표한 의견인데 여기에 '데미니 투표권'이란 이름을 붙여 제창하는 운동이 2000년대 들어 확산되고 있다. 미성년자의 투표권을 부모가 절반씩 대신 행사하게 하자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아동투표권(Kinderwahlrecht)이란 이름으로 2003년 이 원칙의 도입이 투표에 붙여졌다가 부결된 일이 있고 헝가리에서는 연립정권이 도입을 한 때 고려했다고 한다.

사회의 노령화에 따른 선거의 노령화 때문에 이 원칙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특히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도 이해가 간다. 2011년 3월 히도츠바시대학 세대간연구소에서 이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선거의 노령화는 정책의 선택에 있어서 기성세대가 혜택을 누리고 사회의 빚을 늘리는 방향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젊은 층의 선거권에 더 비중이 커야 선출된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이 사회의 장래를 더 많이 생각하는 정책노선을 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데미니 투표권이 환영받는 것이다. 아동투표권이 실현될 경우 정치에서 환경에 대한 배려가 늘어나고 청소년층의 참여의식이 자라날 것이라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 아동투표권 도입은 미성년자를 자녀로 둔 30대와 40대의 선거권을 대폭 늘려주는 결과가 될 것이니, 그 연령층에게 인기 없는 정당의 '결사반대'가 예상된다. 그러나 아동투표권이 실행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갓난아이의 부모들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한 선택을 생각하는 모습. 초등학생의 부모들이 아이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들어갈 때 민주주의의 모습이 더 완벽해질 것이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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