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만 놓고 보자면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3차원 공간은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고 사는 세상이니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라도 그냥 느끼고 아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4차원 공간은 어떻게 생겼을까? 4차원 공간의 형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식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모습'을 떠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뇌가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공간에 적합하게 진화해온 탓이니 이게 정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공간의 투영이 바로 2차원 공간이니 그 곳에 대한 설명은 아주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편평한 종이 한 장 위에 펼쳐진 세상을 생각하면 된다. TV 화면이나 그림자를 생각해도 좋다. 만약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삶은 어떤 양식을 띄게 될까? 그런데 막상 상상을 하고 설명을 하려니 그것도 쉽지는 않다.
문득 2차원 공간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있다면 입과 배설구가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입과 배설구가 독립되어 있다면 구멍이 두 개가 되는데 그 말은 이미 그 생명체는 둘로 나눠져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생명체가 단일하게 유지되려면 그리고 먹고 배설해야 한다면 구멍이 하나인 폐곡선 형태를 유지해야만 할 것이다. 그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흥미로울 것 같지만 언뜻 그 모습이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림자는 있을까? 2차원 태양이 있다면 물체의 1차원 그림자가 생길 텐데 어디에 투영될 것인지 헷갈린다. 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르지만 그저 평범한 공상에 가까운 것들이다.
1차원 공간은 상상하기에 좀 쉬울까.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면 그들은 평생을 모두 한 줄로 늘어서 있어야 할 것이다. 한 명이 움직이면 따라서 모두 움직여야할 것이다. 바로 옆의 사람 둘만 평생 보고 살아야할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 전에 어떻게 서로 만나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을까? 결국 옆 두 사람과만 숙명적인 만남을 해야만 할 것인가? 1차원 세상에 대해서도 쉽지 않은 물음들이 피어오른다.
그럼 간단하게 점을 생각해 보자. 크기가 없으니 그냥 그 세계가 전체 세상일 것이다. 하나가 전부인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더 막막해진다.
에드윈 애보트가 1884년에 지은 <플랫랜드>(윤태일 옮김, 늘봄 펴냄)는 놀라운 책이다.
"요즘은 공간, 시간, 상대성, 혹은 4차원이라는 말들이 일상 용어가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1차원, 2차원, 3차원 그밖의 다차원에 대해서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이 <플랫랜드>는 아인슈타인이 등장한 이후인 '상대성 시대'에 창작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지금(1952년)으로부터 70년 전에 쓰였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이 그저 조그만 아이였을 때이고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개념이 알려지기 대략 25년 전이다."
▲ <플랫랜드>(에드윈 애보트 지음, 윤태일 옮김, 늘봄 펴냄). ⓒ늘봄 |
<플랫랜드>는 차원의 개념을 작품 속에 과학적으로 녹였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충분히 하드코어 과학 소설(SF)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차원에 대한 어설픈 공상을 해봤다. <플랫랜드>에서는 2차원 공간에 (실제로는 3차원 공간이지만) 살고 있는 '스퀘어'라는 (실제로 그의 모양은 정사각형이다) 화자를 통해서 점 공간부터 2차원, 3차원 공간, 심지어는 4차원과 그 이상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여기 커다란 종이가 펼쳐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종이 위에서 직선,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그리고 다른 도형들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종이 위로 솟아오르거나 밑으로 가라앉을 수는 없습니다. 마치 확실하고 선명한 윤곽선을 가진 그림자가 종이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죠. 그 정도를 상상했다면 여러분들은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스퀘어가 사는 2차원 공간인 (그곳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플랫랜드에서는 사람들의 모양이 신분에 따라서 여러 다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다. 예를 들면 스퀘어는 전문가 집단에 속해서 정사각형 모양을 갖는다. 중간 계급은 정삼각형, 더 낮은 지위의 사람들은 이등변 삼각형의 형태 갖고 있다. 지위가 낮게 설정되어 있는 여성은 거의 직선에 가까운 모습이다. 귀족들은 육각형부터 시작한다. 변의 수가 많을수록 더 높은 귀족이 된다. 변이 너무 많아서 그 구분이 어려워지면서 원에 가깝게 되면 동그라미 계급이 되는데 성직자가 이 계급에 속한다. 가장 높은 계급이다.
"만약, 우리 친구가 점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다면 우리는 그의 선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게 되지요. 만약 그가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면 그 선은 점점 작아지고요. 하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직선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동그라미 뭐든지 상관없어요. 직선, 그것으로만 보일 뿐 아무 것으로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즉 계급을) 식별하는 문제가 플랫랜드에서는 심각하고 절실한 문제가 된다. 사실적이면서도 상상을 넘어서는 그 흥미진진한 내용은 책을 읽을 미래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플랫랜드의 기후, 주택, 계급 사회 문제, 범죄, 특히 서로를 알아보는 그들만의 온갖 방법에 대한 모든 디테일이 <플랫랜드>에 담겨있다. 심지어 플랫랜드의 고대 채색 풍습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 상상력이 놀랍고 공감이 간다. 모던하다.
스퀘어는 3차원 공간에서 온 '구'의 도움으로 3차원 세상인 스페이스월드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는 모두들 2차원 공간인 플랫랜드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도 3차원 세상의 일부라는 진리를 알게 된다. 스퀘어는 이런 사실을 조심스럽게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내가 즉시 체포되어 최고위원회로 압송되었다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7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감옥에 있습니다."
스퀘어는 그의 3차원 공간 스페이스랜드의 경험담을 <플랫랜드>에서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의 말을 믿지 않거나 믿으려고 하지 않거나 은폐하는 플랫랜드의 감옥에서.
<플랫랜드>는 2차원 공간 플랫랜드라고 하는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계급 간 권력 다툼과 종교적인 억압이 어떻게 구축되고 진실을 외면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면에서는 정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때가 때니 만큼, <플랫랜드>가 더 그렇게 읽혔다.
스퀘어가 꿈속에서 경험한 점으로 이루어진 무차원 세상인 포인트랜드 이야기는 통합진보당 당권파들의 모습처럼 읽혔다.
"저 쪽 비참한 피조물들을 보세요. 점은 우리처럼 하나의 존재이지만 무차원의 심연 속에 제한되어 있어요. 그 자신이 바로 그의 세상이며 그의 우주입니다. 그는 길이도 너비도 그리고 높이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는 둘이란 숫자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복수(다수)에 대한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죠. 왜냐하면 그 자신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이기 때문에 거의 무에 가깝답니다."
무차원 속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세상 모두라고 외치고 있는.
"동그라미들은 승리의 고삐를 끝까지 늦추지 않았습니다. 노동자 계급은 남겨두었지만 제비뽑기를 통해 열 명 중 한 명을 죽였습니다. 정다각형의 의용군들이 즉시 동원되었습니다. 불규칙도형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을 때에는, 정삼각형이라 해도 군법회의를 통해 처형해 버렸습니다. 사회정화위원회에서 정확히 측정해 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군인과 기능공 계급의 집은 1년 가까이 방문 사찰을 받았습니다. (…) 이리하여 계급 간의 균형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색채 환각 폭동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얼굴이 읽혔다. 방송국 파업 현장의 방송인들의 얼굴도 읽혔다. 사찰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누군가가 읽혔다.
"여러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나 혼자만이 볼 수 있었던 비밀문서에 의하면 지난 두 번의 밀레니엄이 시작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물론 의회 밖에서까지 이런 사소한 일에 대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고회의 의장은 3차원 스페이스랜드에서 온 '구'의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 이렇게 태연하게 말하고는 목소리를 높여서 경비대를 불렀다.
"경찰들을 체포하고 그들에게 재갈을 물려라. 네 의무가 무언지 알겠지?"
경찰을 포함해서 진실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고 감금하는 의장의 모습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잔혹함을 읽었다. 은폐되는 진실 이야기에서 방송국을 장악하고 왜곡 보도하는 그들의 얼굴이 읽혔다.
그래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스퀘어의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우리도 최소한 그런 마음은 먹고 살자. 그래야 언젠가는 진리를 설파하고 실천도 할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모든 평면과 플랫랜드의 확고한 실체들이 그저 병든 상상력의 산물이며 모든 한갓된 꿈의 근거 없는 허구에 불과해 보일 때에도 진리의 대의명분을 위해 내가 견뎌야 할 순교의 일부분입니다."
플랫랜드에 납작하게 엎드려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세상에는 '높이'도 있다고 외치고 싶다. 평면을 벗어나서 높이 날아올라 우리들의 현실을 직시하자고 이야기 던지고 싶다. 모두 함께 스페이스랜드로 가자고. 진실을 되찾자고. 내가 속편을 쓰게 된다면 제일 먼저 2차원의 감옥을 부수고 스퀘어를 구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세상이 진리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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