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신자유주의의 대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 <예종에의 길> 등 많은 저작을 통해 이미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얼마나 자유롭고 정의로운 체제인가를 비수학적인 문장을 통해 설득력 있게 설파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전국경제인연합과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를 중심으로 시장 경제와 정의의 관계를 논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복거일의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도 그런 책의 하나이며, 공병호의 많은 책들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오히려 그 동안 시장 경제와 정의의 상관관계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은 진보 개혁 진영이 아니었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수적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자본주의 시장과 정의(正義)의 관계에 관한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합리성과 공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 자유주의자들은 완전 경쟁 시장, 자유 경쟁 시장에서는 각자가 모두 이기적으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이 적절하게 작용하여 사회 전체의 이익이 달성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완전 경쟁이 달성되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야말로 가장 정의롭고 공정한 체제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한국 사회처럼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고 자살률 세계 최고, 비정규직 비율 세계 최고, 행복도 세계 최하위의 나라를 과연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재벌이 빵집과 순대 사업에 진출하여 영세 자영업자를 몰락시킨다고 비판 받는 재벌 공화국을 과연 정의로운 시장 경제로 볼 수 있는가? 과연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공정한 것일까?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이정전이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책 <시장은 정의로운가>(김영사 펴냄)를 출간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시장의 정의 문제를 연구했고 이미 1994년 시장의 정의를 다룬 책 <분배의 정의>(집문당 펴냄)를 냈었다. 최근 2년 사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가 인기를 끌고 더구나 복지 국가 논의와 함께 시장 경제에 있어 분배 정의의 문제가 다시 한국 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자 이정전이 재차 시장은 정의로운가를 묻는 책을 쓴 것이다.
복지보다 우선적인 것은 공정·공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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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은 정의로운가>(이정전 지음, 김영사 펴냄). ⓒ김영사 |
먼저 보수적인 시장주의자(자유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복지 국가는 아주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 체제이다. 왜냐하면 복지 국가는 '개미처럼 열심히 땀 흘리고 저축하여 부를 축적한 이'들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그 돈을 게으른 배짱이 같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 개혁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복지 국가를 어떻게 볼까? 과연 그들은 복지 국가를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운동이라고 보고 있을까? 별로 그렇지 않아 보인다. 많은 진보 개혁 인사들이 복지 국가는 사회 정의와 공정·공평의 구현과는 무관한 것으로 본다.
예컨대 민주통합당 대표 한명숙과 차기 대선 주자로 꼽히는 문재인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복지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특권과 특혜의 철폐이며, 따라서 공정과 공평의 회복'이라고 발언하였다. 즉, 복지 국가를 향한 운동은 별로 사회 정의를 향한 노력도 아니며, 별로 공정·공평의 구현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최근 <한겨레>(3월 5일자)에 실린 성공회대학교 교수 김동춘의 칼럼을 보자. 그 칼럼의 제목은 "복지라고? 천만에, '공정'이다"이다.
"복지가 우리 시대의 과제라고들 한다. 맞는 이야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공공복지 꼴찌, 극심한 빈부 격차, 노인 자살률 세계 1위를 자랑하는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벗어던지려면, 증세와 조세 개혁, 복지 확충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 그러나 복지 담론은 매우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 (…) 나는 한국이 정말 살 만한 나라, 품위 있는 나라, 인류 문명에 기여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공정·공평의 원칙이 지켜지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오늘 2040 세대의 78퍼센트는 부모의 지위가 계층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패자 부활이 없는 사회,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사회가 그들이 보는 한국이다. 이처럼 사회가 여지없이 파괴되었는데, (복지) 예산으로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불공정에 신음하고 있는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일할 의욕을 느껴야 한다. 우선 망가진 사회를 바로잡은 다음 그 바탕 위에서 우리는 복지·평화·공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공정한 시장은 정의로운가?
그렇다면 민주통합당과 김동춘은 어떻게 복지 국가의 도움 없이도 99퍼센트의 사람들을 그 불공정 상태로부터 구제할 수 있을까? 김동춘을 비롯한 이른바 공정·공평론자들이 제시하는 최선의 공정·공평 회복 방안은 바로 '공정 시장' 원칙의 구현이다.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수단이 바로 재벌 개혁 등 이른바 경제 민주화이다.
그런데 과연 공정 시장은 공정 분배를 낳을 수 있을까? 달리 말해서, 공정한 시장은 과연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이정전의 이 책을 읽은 나의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사회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상벌 체계가 존재한다. 각종 법과 관습은 대표적인 상벌 체계이다. 법과 관습이 철저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곧 상벌 체계가 잘 확립되어 있다는 뜻이고, 그만큼 정의로운 사회이다.
자유 시장도 상벌 체계의 일종이다. 정상적인 자유 시장에서는 좋은 상품을 값싸게 생산하는 기업이 돈을 벌게 되는 반면, 저질 상품을 비싸게 생산하는 기업은 망한다.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자유 시장이 상을 내린다는 뜻이고, 망한다는 것은 자유 시장이 처벌한다는 뜻이다. 자유 시장 즉 완전 경쟁 시장은 명백한 책임 추궁을 바탕으로 하는 '공정한 보상·처벌 시스템'이며, 따라서 자유 시장은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이 복거일과 공병호, 하이에크와 프리드먼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들 우파 신자유주의자들과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스스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 또는 '좌파 신자유주의자'임을 자임하는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김대호는 공정한 자유 시장 즉 완전 경쟁 시장을 회복하는 것이 복지 국가보다 논리적, 시간적으로 우선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정한 자유 경쟁 시장의 구현을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재벌처럼 완전 경쟁 시장의 실현을 가로막는 특권·특혜 세력을 척결하고 해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완전 경쟁 시장의 실현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거부할 사안이 아니다.
그리고 김대호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좌파 신자유주의, 또 진보적 자유주의자로 분류하는 안희정, 송영길 같은 많은 개혁파 정치인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찬성하면서 복지 국가에 반대한다. 복지 국가보다 공정·공평이 우선적이라고 역설하는 진보적 자유주의 정치인과 지식인 역시 대동소이하다.
보수적 신자유주의와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갈라지는 유일한 분기점은 독점과 경제력 집중 즉 재벌에 대한 태도에서 뿐이다. 즉, 보수적 신자유주의자들이 독점과 경제력 집중 역시 자유 시장 경쟁의 자연스런 결과이므로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하여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들은 독점과 재벌을 완전 경쟁 시장을 저해하는 '왜곡 요인'으로 보면서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벌 축소 또는 재벌 해체를 통해서만 '합리적인 자유 시장' 즉 '공정한 자유 시장'을 만들 수 있고, 그래야만 정의와 공정·공평이 넘치는 공정 사회 또는 공정 국가가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정 시장이 곧 공정 사회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정전은 이 책에서 '자유 시장은 본래 정의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제4장).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자유 시장의 완전 경쟁을 전제로 하는 한계 생산성 이론과 성과주의, 능력주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98년 이래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이 진행되면서 동시에 도입되고 확산된 것이 기업들에서의 성과주의, 능력주의 문화이다.
그런데 그것은 기업들에 있어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문화를 낳았다. 이정전에 따르면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의 두 원칙 모두 사람들이 이기적이며 경쟁과 금전적 보수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주된 동인이 된다는 전제 아래 주로 경제적 생산성을 최대한 높인데 주안점을 주는 원칙이다"(127쪽). 그리고 성과주의, 능력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경제 이론이 바로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 생산성 원리이다.
진보적인 '공정 시장'의 이름으로 '합리적 자유 시장'이 1998년 이래의 경제 민주화 과정에서 도입되자 한국 경제에서 임금 격차, 소득 격차가 격심해졌다. 투입 노동 대비 낮은 한계 생산성을 보이는 하층 노동자에게는 과거보다 더 낮은 임금을, 높은 한계 생산성을 보이는 고급 관리자와 경영자들, 특히 금융권 직원들과 펀드 매니저에게는 높은 봉급을 주는 것이 정당하고 정의로운 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저소득 노동자(워킹 푸어)와 고소득 임직원 간의 소득 격차는 이른바 민주화 이후 과거에 비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과연 이것을 공정한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치명적 착각은 공정 시장=공정 사회로 착각한다는데 있다. (이들은 결국 사회=시장이라고, '자유로운 시장=자유로운 사회'라고 착각한다). 그렇지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2008년 가을 발발한 세계 금융 위기와 관련되어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낳았다. 그리고 그 책에서 샌델은 '자유 시장은 과연 공정한가?'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개인의 권리와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자유 지상주의의 사고에서 벗어나 공동의 선과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공동체의 미덕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독자들을 유도했다. 달리 말해서 그는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에 팽배한 자유주의적 사고(보수적 자유주의건 진보적 자유주의건)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면서,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서는 자유 시장 그 자체에 대한 국가적 규제와 제한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정의·공정이란 무엇인가?
법조계 인사들은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실천 이성 도덕률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특히 진보 개혁에 속한 법조계 인사들의 경우 더욱 그러할 것이며, 이들 역시 대부분 복지 국가보다는 정의·공정의 회복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경제 현실에 직면하였을 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법조계 인사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점은 무엇이 정의인지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하이에크와 복거일 같은 보수적 자유주의자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야말로 가장 정의로운 체제라고 말한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시장 그 자체를 불의와 착취의 체제라고 비판하며 오로지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정의로운 소득 분배와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장은 자유로운가>의 제7장에서 시사되듯이, 정의와 공정·공평의 의미는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각기 다른 정치 경제 사상과 세계관에 따라 달라진다. 실질적 평등(실질적 공평·공정)보다는 형식적·절차적 평등(절차상의 공정·공평)을 더욱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들은 흔히 '복지보다 우선적인 것은 공정·공평'이며, '복지 국가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특권과 특혜의 철폐'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나와 같은 복지 국가론자들은 복지 국가야말로 공정·공평을 달성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며, 더구나 재벌의 특권과 특혜를 철폐(완전 경쟁 시장의 창출을 위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특권과 특혜를 실질적으로 철폐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복지 국가라고 생각한다.
<시장은 정의로운가>에서 이정전은 '공정 시장'이란 경쟁 절차의 공정성(즉 기회의 평등)을 의미할 뿐이며, 따라서 공정 시장은 소득 분배의 공정성(즉 결과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장이 더욱 공정해질수록(즉 더 완전 경쟁 모델에 가까울수록)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의 확산에 따른 불평등한 소득 분배, 승자와 패자의 빈부 격차 심화는 불가피하다. 공정한 시장은 필연적으로 불공정한 사회, 불평등한 사회를 낳는다. 이렇듯, 시장에서의 정의·공정과 사회에서의 정의·공정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정의에 대한 또 하나의 환상이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한 가지 통일된 정의의 원칙이 확립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를 잘 지켜야만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 사람들은 우리 삶을 여러 영역으로 가르고 각 영역별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정의의 원칙을 선별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이정전은 경제 영역과 가정·친목 영역 그리고 정치 영역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의 정의·공정 원칙이 적용되는 현상을 관찰한다(제9장). 경제 영역에서는 대체로 자본주의적 시장 원리(성과주의와 능력주의)가 관철되는 것을 흔히 정의·공정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가정이나 친구, 남녀 관계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우애와 협동, 희생과 배려의 정신에 기반을 둔 일종의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의·공정의 원리가 작동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1원 1표가 아닌 1인 1표의 원리가 작동하는 정치의 영역에서는 장자크 루소의 평등 주권 원칙이 정의·공정의 원리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정전은 경제 영역(시장 영역), 사회 영역(가정과 친구 관계 등), 정치 영역이 서로 다른 정의·공정의 원리에 따라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공생하는 것을 가장 바람직하게 여긴다.
"경제 영역에서는 성과주의에 입각해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생산을 많이 하도록 하고, 정치 영역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서 분배(복지 국가적인 소득 재분배)를 고르게 하고, 사회화 영역에서는 필요의 원칙에 따라 알맞게 쓴다면, 우리 사회는 잘 조화된 사회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회야말로 정의로운 사회요, 일찍이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이 꿈꾸던 이상적 사회이다." (279쪽)
리카도와 마르크스, 스미스와 하버마스의 공존?
그렇지만, 과연 이정전이 꿈꾸듯이 경제 영역, 정치 영역, 사회 영역이 잘 조화되어 서로 다른 차원의 정의·공정 원리들이 잘 균형을 이루면서 공존·공생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정전의 이 책은 경제학을 뼈대로 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벤담과 밀, 칸트와 롤스, 공자·맹자와 묵자, 그리고 마르크스와 하버마스 등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종횡무진 누빈다. 그리고 플라톤이 꿈꾸던 '정의로운 사회'와 하버마스가 꿈꾸는 '의사 소통의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정전의 전작인 <경제학을 리콜하라>(김영사 펴냄)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점이지만, 이번의 새 책 <시장은 정의로운가>에서도 반복되는 문제점이 있다. 즉, 저자는 한편으로는 '자유 시장에서 모든 소득 분배는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신고전파 경제학과 한계 생산성 이론에 맹비판을 가하면서도, 이상하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리카도(헨리 조지)와 마르크스, 스미스와 하버마스처럼 서로 정면으로 대립되는 사상가들을 좋게 칭찬하면서 그들이 마치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양 화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마치 이들 대가들이 한결같이 정의롭지 못한 불로소득을 비판하면서–신고전파 경제학과는 달리-노동 정의와 분배 정의를 추구한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리카도와 조지 그리고 밀과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토지 소유자들의 소득만을 불로소득으로 비판하면서 자본 소유자들(자본가들)의 소득은 '정당하고 정의로운 공정한 근로 소득'으로 간주한 데 반하여,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의 모든 소득 역시 일종의 불로소득으로, 따라서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 소득으로 본다. 토지 사유자만이 아니라 자본의 불로소득(개인 소득 및 법인 소득)에 대해 중과세하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본 것은 복지 국가를 위한 소득 재분배를 주장한 영국의 존 홉슨(1858~1940) 역시 비슷했으며,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시 대동소이했다. 그리고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모두 한결같이 FTA와 같은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을 원리적으로 지지한 데 반하여, 마르크스와 케인스 같은 이들은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 논리의 허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시장 경제와 정의·공평에 관한 사상의 대가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그들 간의 공통점을 찾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들 사이의 차이점과 치열한 논쟁점을 드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작금의 한국 사회처럼 한미 FTA와 복지 국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 등을 놓고 보수적 자유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 복지국가론과 반자본주의론이 각자 자기 나름의 정의·공정 개념을 제시하면서 치열하게 논쟁하는 국면에서는 그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이정전이 이런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책을 빨리 새로 준비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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