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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왜 '2012년 종말론'에 열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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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왜 '2012년 종말론'에 열광하는가?

[프레시안 books] 맬컴 불의 <종말론>

종말론은 인간의 역사에서 유행의 자리를 빼앗겨 본적이 없다. 어쩌면 올해가 그런 유행의 최고가 되어야 할까?

비의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힌 이들은 2012년으로 끝나는 마야의 달력을 쳐다보며 그렇게 믿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에서 정말 요란스럽게 종말의 시간이 엄습한 적도 있었다. 종말과 새 세상에 대한 희구보다는 당장 나올 스마트폰 신제품에 대한 열망과 관심이 더 큰 오늘 날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요란스럽게.

헨리 올덴버그는 17세기 영국왕립학술원의 사무국장이었다. 학술 애호가인 그는 당시 네덜란드의 시골에 처박혀 있는 친구에게 유럽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당혹스러운 동향에 대해 자문을 구한다. 올덴버그가 보낸 편지의 수신인은 스피노자이며, 편지는 '세계적인 위기를 가져올 법한 중요한 발표'에 대해 묻고 있다.

"이 발표에 따라 2000년 이상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스피노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 잡은 자가 사바타이 제비다. 발터 벤야민과의 우정으로도 유명한 유대 전문가 게르숌 숄렘이 제비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터키의 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유대 종교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재능과 카리스마와 조울증이 그의 마음 안에서 소용돌이 쳤다.

이 소용돌이는 심리적 불안감이 야기하는 신비적 체험 속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이어서 그의 신학적 견해는 랍비들의 공분을 사 고향에서의 추방이라는 징벌을 야기했으나 그의 운명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추방당한 제비는 이후 예루살렘에서 나탄이라는 젊은이를 만나게 되는데, 이 젊은이는 가자에서 머무는 동안 어떤 신비적인 환상을 경험한다.

그러고는 나탄은 사바타이 제비가 메시아라고 확신하고 이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제비도 나탄의 설득 끝에 비로소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게 된다. 매우 의미심장한 1666년을 한 해 남겨두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1666년은 요한계시록을 해독한 자들에 따르면 바로 재림이 이루어질 해였던 것이다.

메시아가 된 제비가 1666년 6월 18일에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종말의 날짜를 선포하자, 이 운명의 날을 앞둔 흥분한 유대인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약속의 땅으로, 그러니까 이스라엘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온 유럽이 현세의 종말이 이루어지는 1666년을 향해 돌진하며 들썩거렸다.

그런데 모든 일은 정말 어이없이 끝나버린다. 이내 충격적인 소문이 퍼졌으니, 사바타이 제비가 술탄에게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제비가 진짜 메시아인지 시험해 보고자 한 술탄은 궁수들에게 그를 향해 활을 겨누게 했다. 화살이 날라들 것이며 제비가 진짜 메시아라면 그는 화살을 멈추게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제비에겐 기적도 죽음도 찾아오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오기 직전 그가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철회하고 이슬람교도로 개종했기 때문이다. 이후 제비는 오스만제국의 말단 관리로 살다가 알바니아로 쫓겨나 죽는다.

헨리 올덴버그가 스피노자에게 자문을 구하는 저 편지를 보낸 것이 바로 이 1666년을 앞두고 전 유럽이 혼란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스피노자는 현세의 종말을 향해 광란과 함께 전진하는 유럽인들의 행렬을 보고 무엇이라 답했을까? 매우 애석하게도 올덴버그에 편지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장은 오늘날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종말론이 무엇인지, 그에 열광하는 인간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스피노자를 대신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종말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가령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철학자들에게 종말론은 미래에 대한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점괘, 믿음에 종속된 것이며, 증거 없는 계시의 결과로서, 전적으로 당연히 억견에 속한다."

이 구절은 종말론이란, 계몽이라는 인간 이성의 프로그램을 따르는 일에 꾀가 나, 미신을 향해 땡땡이치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다. 이성의 질서 속에서 종말론은 자신이 차지할 자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종말론의 진정한 의미는 이성과 그것이 이룬 철학 바깥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적극적인 암시를 주기도 한다. 레비나스의 구절을 조금 더 읽어보자.

"예언적 종말론의 특별한 현상은 확실히, 철학적 증거에 동화됨을 통해, 사유의 영토에서 시민의 권리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이성적 사유와 그것 위에 구축된 체제들 바깥을 가리켜 보이는 과제를 떠맡는다. 미리 말하자면 종말론은 현실의 사악한 정치권력 구조가 합리적인 두뇌들이 고안한 여러 가지 변명으로 무장하고 있을 때,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합리적 대화의 장 자체가 이미 주도적인 권한을 가진 자들을 위해 불균등하게 조절되어 있을 때, 그리하여 진정으로 모든 것의 종말과 함께 새로운 판을 희구하는 것만이 해결책일 때, 바로 미지의 바깥을 엿보게 하는 일을 해준다.

그러므로 종말론이 오늘날 무엇보다도 '정치적 맥락'에서 각광받으며 급진적 위반과 혁명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령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사케르>에서 사바타이 제비에 주목하는 것도 그런 정치적 맥락에서이다.

"토라의 완성이란 그것의 위반과 일치한다. 이것이 바로 가장 급진적인 메시아주의 운동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확신하는 내용으로서, 예컨대 사바타이 제비의 메시아주의 운동은 '토라의 완성은 그것의 위반이다'라는 구호를 내건 바 있다."

사바타이는 현실을 지배하는 성서의 완성은 오히려 성서를 위반하고 와해하는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보다 명확하게, 현재적 정치의 완성은 현재적 정치의 파괴를 통해 이루어진다라고 바꾸어 쓸 수 있다. 이런 메시지가 그토록 빈번히 정치적 격변기에 출현했던 종말론적 사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메아리친다.

▲ <종말론>(맬컴 불 엮음, 이운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가령 오늘 우리가 소개하는 책 <종말론>(이운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종말론을 조명하는데, 17세의 종말론 사상의 정치적 배경에 대해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패배하고, 스페인에 대항하는 네덜란드 반란군이 처음 몇몇 전투를 승리로 이끈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명의 종교 저술가들이 자신들의 천년 왕국 이론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구교와 그 정치적 세력의 광범위한 몰락을 사유하고 새로운 정치의 터전을 전망하기 위한 정치 사상적 장치가 17세기인 유럽인들에게는 천년 왕국이었던 것이다.

이 책 <종말론>은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및 근대의 종교, 역사, 철학 등등 종말론에 대해 이루어진 광범위한 논의들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종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종말론 사상의 전개 과정 전반을 조망하기에 매우 좋은 입각점을 제공해 준다. 현대 사상의 종말론적 면모 역시 잘 드러내고 있는데, 가령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에 등장한 유명한 테마 '인간의 종말' 역시 종말론의 시계(視界)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의 맥락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급진적인 정치 운동으로서 종말론이 현대 사상에 불어넣고 있는 활력이리라. 가령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대표적인 종말론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명할 수 있는 자크 데리다에 대해서 이 책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것이 데리다가 여기서 묘사한 대로 묵시적 언어의 효과들이다. 직접적인 대화적 발화의 한계를 벗어나면서 그들은 합리적인 논쟁의 행위를 위해 규정된 법칙들을 역시 위반한다."

합리적 논쟁이 애초에 불평등한 권력 구조에 의해 조건 지워진 장일 때, 그리하여 더 이상 그로부터 정치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갈 수 없을 때 종말론의 언어만이 낡은 세계의 전면적 전복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데리다가 말하듯 "메시아적인 것은 우리를 소환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태의 일상적 흐름을 중지시키게 한다."

칸트는 "모든 변화가, 그리고 이와 함께 시간 자체가 멈추는 때가 올 것이라는 관념은 상상력에 불쾌감을 준다"라고 썼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종말론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진정한 쇄신이 파괴와 비약이라는 불편함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인류는 늘 문명이 낳은 모든 좋은 약들의 어두운 뒤편에 감추어져 있는 종말론이라는 독한 물약의 마개를 흥분 속에 열고 또 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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