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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눈감은 대한민국 미술, 그 심장을 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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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현실 눈감은 대한민국 미술, 그 심장을 쏘다!

['현실과 발언' 1980-1990] 김정헌 전 문화예술위원장

오윤의 판화에서 박재동의 만평에 이르기까지,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목판화 걸개그림부터 대추리를 메운 벽화에 이르기까지, 싸우는 사람의 곁에는 언제나 그림이 있었다. 그것을 이르는 '민중 미술'은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 사전 속에 박제돼 있지만 '민중과 함께 한 그림'인지, '민중의 현실을 반영한 그림'인지, 혹은 '1980년대 미술 운동'의 고유명사인지 그 정의는 제각각이다.

미술평론가 이대범에 따르면, 민중 미술의 역사적 논의는 관념적 출발로 1969년 '현실동인'을 상정하고, 실질적 시작으로 1979년 봉기한 '현실과발언', '광자협(광주자유미술인협의)', 그 끝은 199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 미술 15년 1980~1994년' 전으로 본다. 이 '민중 미술 15년' 전은 제도권에선 상당한 평가를 받았으나 민중 미술 '장례식'이란 비판도 받았다. 민중 미술의 복잡다단한 역사와 성과를 제대로 조망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 속에서 '현실과발언' 한 그룹이 제도권 내 민중 미술이란 단어를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1979년 태동, 1980년 창립전을 갖고 10년 동안 존속한 현실과발언은 당시 그 의미를 둘러 싼 싸움의 중심에 있었다. 그 말은 곧 민중 미술 운동 그 자체의 중심에 있었다는 말도 된다. 최근 출간된 이들의 역사책 격인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현실문화 펴냄)는, 많은 이들이 그저 '붓으로 하는 팔뚝질'이라 생각했던 민중 미술의 좌표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1980년대로 돌아가서 한 번, 2012년 현재적 의미에서 또 한 번.



▲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 현실과 발언 30년>(김정헌·안규철·윤범모·임옥상 엮음,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2010년 현실과 발언 창립 30년 기념전을 계기로 기획된 이 책은 1부에서 평론가들의 눈으로 한국 민중 미술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고, 2부에서 2010년 전시에 참여한 동인들의 작품을 조망한다. 3부엔 현실과 발언 10년의 약사와 전시회 도록들을 그대로 실었다. 650쪽 넘는 분량이지만 한 운동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들이 겹쳐 흥미진진하다. 한 패의 역사를 기념하기보다 운동의 혼란을 담아내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화가가 꼭 짱돌을 들어야 하나"라는 의문부터 "왜 좀 더 현장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가"를 고민했다는 고백까지, 예술 운동의 필연적인 긴장 관계도 발견된다.


'프레시안 books'는 현실과 발언의 핵심 동인 중 한 명이자 이 책의 공동 편집자로 참여한 김정헌 전 문화예술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게 민중 미술의 역사와 현재적 의미, 현실과 발언 내외부에 있었던 논쟁들에 대해 물었다. 그는 민중 미술이 "특수한 시점 발동했던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개념"이라며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다음은 25일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 사무실에서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프레시안 :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떻게 탄생했나.

김정헌 : 재작년이 '현실과 발언' 탄생 30주년이었다. 그해 7월 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 창립 30년 기념 전시를 했다. 30~40대 젊은 비평가들이 전시를 기획했는데, 이들이 현실과 발언을 평가하는 글을 쓰면서 책 만들자는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출판 비용 부족 등 난관으로 우물쭈물하다가 전시를 치른 지 1년 반 만에 책을 내게 됐다.

프레시안 :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현실과 발언이 해산한 직후인 19990년에 낸 <민중 미술을 향하여>(과학과사상 펴냄)와 비교해서 보면 더욱 흥미롭다. 어떤 의미로 책 제목을 지었나.

김정헌 : 직접 이 제목에 관여한 건 아니라 내 입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상황이 정치적인 것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는데, 예술은 거기에 묶이고 끝나선 안 되고 그걸 넘어서는 영감과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출판 기념회 자리에서 백기완 선생이 축사를 하셨는데 "정치적인 걸 넘기는 뭘 넘어, 그 안으로 들어가야지!"라며 백 선생다운 한 말씀을 던졌다. (웃음)

▲ 김정헌 전 문화예술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미술, 작업실을 박차고 나오다

프레시안 : 1969년에 '현실동인 제1선언'이 있었고, 그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현실과 발언이 1979년에 탄생했다. 현실동인은 무엇이었으며, 그 뿌리가 10년 만에 열매를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김정헌 : 현실동인은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발하여 김지하가 오윤, 오경환, 임세택 등과 함께 만든 단체다. 서울대 미술 대학 선후배 사이였던 오윤, 오경환, 임세택이 문리대의 김지하하고 가까웠고, 특히 오윤이 그 형(김지하)과 사이가 돈독했다. 그때 김지하 형이 그 미대 친구들에게 멕시코 민중 벽화라든가 여러 가지를 많이 보여줬다.

그렇게 그 셋이 눈을 뜨면서, 현실동인을 결성해 3인전을 개최하려고 했다. 당시 나는 군대에 가 있었는데, 주간지에 그 친구들 얘기가 나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농부를 멕시코 벽화에 오버랩한 느낌의 그림도 실려 있었다. 그런데 전시회가 학교랑 중앙정보부에 의해 제지당했다. 결국 김지하가 쓴 선언문만 남았다.

그러고 한동안 잠잠했는데, 1970년대 말에 와서 '4·19 혁명 20주년이 되는 1980년에 미술인들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길로 오윤, 최민 이런 친구들이 사람을 모으러 다녔고, 그들과 가까웠던 나도 30대 후반 나이에 참여하게 됐다. 현실과 발언이란 이름도 없었던 때였지만 뜻이 같은 이들이 서른 명 정도나 모였다. 화단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출신 대학별로 뭉치는 경향을 벗어나 학교를 중퇴한 사람, 그림 교육을 안 받은 사람, 기자나 출판 관계자까지 다 모였다.

프레시안 : 현실과 발언을 봉기시킬 당시, 동인들이 가진 문제의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

김정헌 : 그때가 유신 정권 말기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나오던 차에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죽었다. 세상이 좀 달라지러나 했는데 사태가 점점 악화되더니 12·12 쿠데타로 전두환이 권력을 잡았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프레시안(최형락)
무엇보다 미술계 내부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컸다. 그때까지 한국 미술계에선 소위 서구식 모더니즘이 지배적인 중심 세력이었는데, 그런 형식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 혹은 나쁘게 말하면 '불만 세력'들이 있었다. 또 한편으론, 현실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예술을 하려는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가진 태도를 문제 삼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까지 한국 미술계는 사회와 아무 연결점이 없었다. 전부 대학에서 '순수한' 예술이란 관념만 배우고 나왔다. 예술을 통해 다른 세상을 꿈꾸고 희망해야 하는데, 미대 나와서 다들 사회완 담 쌓고 화실에만 처박혀 있었다. 그런 것들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들에게 모이자고 하니까 다들 반겼던 거다.

앞서 문학 쪽에서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1974년 11월 창립,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개편)를 결성해 유신과 독재에 반대하는 등, 예술인도 나름의 투쟁에 나서고 있었다. 예술인이 싸우는 방법이 꼭 투쟁적 활동이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실이란 무엇인가', '현실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 '발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발언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리얼리즘 미술을 재조명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대중과 소통을 목표로 운동을 전개했다.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또한 밖으로부터의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 왔고 심지어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 왔습니다. (…) 우리들 자신도 대부분 이제까지 각자 외롭게 고민하는 것만이 최선의 자세인 듯 (…) 공동적인 문제 해결과 발전의 가능성을 포기해버리려 하지 않았나 합니다." (현실과 발언 창립선언문)

▲ <마케팅 1 : 지옥도>(오윤, 1980). ⓒ오윤

작품 빼앗기고 작가 잡혀가고…

프레시안 : 당시 미술 운동이 터져 나오게 된 계기로 미술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정헌 : 현실과 발언 봉기 이전에 미술인들이 탄압을 받았다기보다,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탄압이 전개되었고 지속적으로 싸워야 했다. 전시회 탄압은 물론이요 교외로 MT 갈 때 경찰관들이 쫓아오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앞서 말했듯 현실동인은 3인전조차 개최할 수 없었고, 현실과 발언 역시 창립전부터 제지를 당했다. 1980년 10월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작품들이 심상치 않음을 발견한 관장이 운영위원회 몇 명 모아다가 회의랍시고 해서 '전시 불가!' 딱지를 붙여 버렸다. 우리가 고집을 부리며 전시회장에서 안 나오니까 미술실 전력을 끊어버리더라.

그때 누가 초를 사왔고, 다들 깜깜한 곳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작품을 확인하기도 했다. 결국엔 장소를 동산방 화랑으로 옮겨 11월에 다시 개최했다. 화랑 주인이 '젊은 사람들이 전시 좀 하겠다는데 왜 그걸 못 하게 하냐'면서 마음을 써 줬는데, 그분도 막상 우리가 작품 가져왔을 때 '기관 놈들'이 올까봐 겁 잔뜩 먹고 그랬다. (웃음)

가장 심했던 건 1985년이었을 거다. 이른바 '힘전 사태'다. 젊은 친구들이 아랍미술관에서 '한국 미술 20대의 힘' 전을 기획했는데, 정부가 이걸 좌경용공으로 몰아 강제로 전시를 중단시키고 무지하게 탄압했다. 작품이 발로 밟히거나 압수당했고, 작가 스무 명 정도가 연행당하기도 했다. 사태 이후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문제의식이 생겼고, 공식적인 저항 미술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게 1986년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였다.

재밌는 건, 이때 미술가들을 탄압했던 이들로 인해 처음으로 '민중 미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던 이원홍이 지방 강연에서 "일부 문화 예술의 내용이 투쟁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면서 이런 이름을 갖다 썼다. 그게 힘전 사태와 때를 같이 하는데, 미술계의 운동을 '예술이 이데올로기 도구로 전락했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면서 그에 대한 강경 노선을 취했던 거다.

"당시 정부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상실된 국가적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유화 국면을 전개했다. 그러나 유화 국면은 정부의 의도와 다르게 광주 민주화 운동의 폭력성의 목격으로 침체된 민중 문화예술 운동의 재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1985년 정부 여당의 총선 패배는 유화 국면을 철회하고 그간 성장한 민중 문화예술 운동에 대한 강경 노선을 전개토록 했다.

(…) 이('힘전 사태')에 대한 언론의 보도와 일부 평론가들의 개념 작업을 통해 '새로운 미술 운동'은 '민중' 미술로 축소 귀결됐다. 민중 미술은 당시의 급변하는 정치적 변동을 고려한다고 해도, 정치적 대항으로 예술을 수단화했다는 점, 그리하여 순수한 예술의 지위를 특정 계급의 목적을 위한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추락시켰다는 것으로 평가됐다. 이후 이러한 개념을 근간으로 '민중 미술'로 공식화되고 미술계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통됐다." (이대범, '포스트 민중 미술, 무엇에 대한 포스트인가',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88~89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권력이 두려워했다는 건 그만큼 운동에 힘이 있었단 이야기일 것 같다.

김정헌 : 창립전 때부터 파장이 컸다. '현실을 이렇게 드러내는 방법도 있구나' 하고, 관객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갓 미대 나온 후배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학교에서 들어본 바 없는 미술이었으니까.

한국에 리얼리즘 전통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근대화 이후 유독 한쪽(서구 모더니즘 계열)만 받아들인 경향이 컸다. 외면당하고 단절되어 왔던 리얼리즘 계통 작업들이 현실과 발언을 계기로 봇물처럼 터져 나온 거다. 그 사람들이 후에 모여 '임술년' '두렁' 등 여러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런 파장이 예술계를 넘어 사회로 퍼져나갔고, 10년 이상 지속적인 문화 운동으로서 자리 잡아 갔다. 외국에서도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미술 운동이었다.

프레시안 :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2부엔 30주년 기념전에 참여한 동인들의 작품 사진·도판과 간단한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읽어보면 활동에 참여한 이유나 활동 후의 평가가 제각각이고, 비판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현실과 발언이 활동할 당시, 동인들에게 일치된 지향점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는가.

김정헌 : 일단 미술이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과 소통을 해야 한다는 지향점, 그래서 미술가로서 현실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발언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 같았던 듯하다. 현실과 발언의 특징 중 하나는 그 안에 최민, 윤범모, 성완경 같이 고급 담론을 얘기할 수 있는 이론가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는 점인데, 그들이 있었기에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었다. 세계를 보는 시각이랄까, 그런 것들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었다.

1985년도쯤 되면 나나 몇 사람들은 민미협에 들어가거나 해서 좀 더 직접적인 운동을 중요시했고, 반대로 애초에 성향 자체가 작가주의적인 사람들은 현장보단 자기 작품, 리얼리즘 미학을 구현하는 데 몰두하면서 각자의 길로 발전해 나갔다.

프레시안 : 어떤 예술 운동에서나 창작이 먼저냐, 현장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에 드러난 현실과 발언의 운동에서도 그런 면이 보였는데….

김정헌 : 가령 김봉준이나 그가 활동했던 '두렁'은 '산 그림'을 표방하면서 현실과 발언이나 민미협의 주류와는 달리 활동 방법 면에서 현장을 좀 더 중시했다. 광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홍성담 주위의 친구들도 미술관 활동을 지양하면서 정말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청년 학생들과 따로 민미련이란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조직이나 흐름이 있으면 그 안에서 이념적으로 조금씩 분화되는 현상은 당연한 것 같고, 오히려 그렇기에 민중 미술 운동 전체가 확장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분단 국가라는 현실에서 미술가, 활동가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염두에 두고 조직을 이끌어서, 문화 예술인들이 보다 사회에 관심을 갖게 하고, 정치적 감각을 기르게 도와주고 또한 국민들을 끌어와서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저 개인의 작업을 하는 것보다 저에게는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김용태)

"그렇게 머리띠를 두르고 세상을 향해서 주먹질을 하는데, 정말 각혈을 해가면서. 이것만 가지고는 되질 않는 거라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주먹질이나 머리띠를 질끈 동이는 거를 자기 안으로도 향해서 해야 된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거예요." (정동석)

"그런데 공격을 했던 그 제도 미술과 뭐가 다르냐는 거예요. 그 이전에 추상 그림 일색이던 것에 소재 혹은 주제를 담아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죠." (박불똥)


"80년대 후반에 정부의 압박이 들어오니까 몇몇 사람들은 미술적 발언이 아니라 사회적 발언까지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민예총도 만들고 민미협도 만들고 했어요. 개인적으로 그런 것을 만드는 것까진 좋은데, (…) 화가가 돌멩이 들고 거리에 나갈 이유는 없다 생각했어요. (…) 일부는 그것이 아니다, 현장에 나가야 한다 했고…" (심정수)

세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프레시안 : 현실과 발언, 개인적으론 어떤 의미였나? 작업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도 듣고 싶다.

김정헌 : 동인 중에서도 내가 제일 많이 바뀌었을 거다. 오윤 같은 친구는 원래부터 어떻게 세상을 드러낼 것인가 방향성이 있었는데, 나는 현실과 발언 활동 전까지 방법론에 있어 정확한 논리가 정해져있지 않았다.

내가 미대 다닐 때 선생님들은 한 달에 한 번쯤 실기실에 들러서 "저쪽이 너무 튀는데, 좀 죽여"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존재였다. 그게 왜 튀면 안 되는지, 왜 죽여야 하는 건지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자기들이 보기에 기술적으로 못나 보이면 지적하는 역할이었다. 미술이 세상에 왜 필요한지 한창 궁금할 땐데, 얘기해 주는 분이 없었다. 그런 데 불만을 가득 품고 대학을 졸업했다.

1977년에 처음 개인전을 했는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업적 성과를 못 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의례적인 관심 이상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러다 현실과 발언을 만났다. 동인들과 토론도 하고 논쟁도 참여하면서 생각이 많이 트였다. 미술이 결국 세상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어떻게 비유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현실과 발언 회원들은 현실의 이미지들을 충돌시켜 충격을 주는 비유 방법을 썼고, 그런 이들과 토론을 하면서 내 상상력도 발동됐다. 그러면서 <풍요로운 생활을 창조하는-럭키 모노륨>(1980년) 같은 작품이 나온 거고. 이 그룹의 세계는 석고 데셍부터 시작하는, 그런 미술적 방법론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묘사력이 떨어진다느니 하는 의견에는 개의치 않는다.

▲ <풍요로운 생활을 창조하는-럭키 모노륨>(김정헌, 1980). ⓒ김정헌
프레시안 :
미대 교수들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당시 '학생들'은 어땠나. 요즘은 미대에서 사회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은 매우 적은 걸로 알고 있다. 오히려 그런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김정헌 : 미술 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는 교수가 없었으니, 그때도 학생 대부분이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졸업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서 미술의 사회적인 의미나 영향력을 고민한 사람들은 학내의 배움이 아니라 다른 매체를 통해 그런 관점을 얻게 된 거다. 내 경우엔 1966년에 나온 <창작과비평>이 그런 역할을 했다. <창작과비평>을 읽으면서 '아, 우리가 하는 건 미술이 아니야'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런데 그렇다고 꼭 모두가 운동이나 사회 참여를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 작업만 열심히 하겠다'는 사람한테 '안 돼!'라고 윽박지르거나 비판할 수도 없는 거고. 작업에 몰두해서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만 있다면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세상이란 게 우리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좋은 세상이 아니다. 제아무리 자유스런 영혼을 갖고 있다 해도, 그래서 자기 세계에 빠질 수 있다 해도, 이 세상이 온전치 못하잖나. 예술가라면 그 현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에 대해 당연히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유네스코에선 예술가의 활동을 공익 활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수입이 일정하게 보장이 안 되어 있어도 세상을 '좋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서. 그런 맥락에서 이들에겐 어떤 책임이 존재는 거라고 본다.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싫어'라고 외치는 건 일종의 책임 방기다. 거기서 미술이 아닌 방법으로 대응하는 방법도 있지만, 미술로서 대응하는 방법도 있다. 현실과 발언 활동은 그 수많은 선례 중 하나일 것이다.

프레시안 : 현 시점에서 현실을 둘러싸고 미술가들이-운동으로든 작품으로든-발언을 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민중 미술'이란 말을 쓸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이 개념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그것은 1980년대 한국, 어두운 시절에만 존재할 수 있었던 미술 운동에 붙은 고유명사인가 아니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현실 참여적인 미술 활동을 일컬을 수 있는 말인가.

ⓒ프레시안(최형락)
김정헌 :
리얼리즘은 장르를 불문하고 항상 예술 내에 존재하는 중요한 입장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만 쓸데없이 '예술에 서사를 포함시키면 안 된다'며 리얼리즘을 예술이 아닌 선동으로 몰아갔는데. 아무튼 민중 미술을 사실주의에서 구상(具象)을 표현한다는 의미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현실에 항상 관계를 갖으면서 열려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서의 리얼리즘으로 해석한다면, 특수한 시점 발동했던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본다.

리얼리즘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그걸 통해서 더 좋은 세상을 구현해보고자 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어떤 노력의 이름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적 정신의 욕구 가운데 그런 영역이 있지 않나. 어떻게 보면 예술의 역할 가운데 종교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거다. 물론 종교처럼 절대적이고 커다란 의미는 아니지만, 예술은 또 하나의 세상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정신을 해방시키니까 말이다.

물론 민중 미술이라는 용어가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좀 더 확장시킨다면 삶의 한 방식으로서의 리얼리즘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어 그대로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미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진짜 민중들의 미술이라면 나는 사는 꼴로 봤을 때, 그걸 할 수도 없었을 거고. (웃음)

"현실과 발언이 촉구하고 얻어낸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성취이자 표현의 자유를 확장한 것이었으며 민중 미학의 탐색을 통한 우리 예술의 토종성, 뿌리 찾기를 한 것이다. (…) 그러나 가장 당면한 현실 자본주의를 어떻게 인지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과제는 항상 남아 있는 것이며, 우리 예술 사유와 상상력의 분수령, 길목의 갈림길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에 순응하면서 비판하며 체제 미술로 잔존할 것인가? 아니면 전면적인 변혁, 자본주의적 도시 문명을 뒤엎는 삶을 꿈꾸기 위하여, 또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어떤 창의력을 발동하여 민중 정신을 확장할 것인가?" (원동석)

마을, 또 다른 캔버스

프레시안 : 많은 이들이 2010년 문화예술위원회 '한 지붕 두 위원장' 사태를 기억한다. 해임과 출근 투쟁, 복직 등 일련의 과정 속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김정헌 : 스트레스 많이 안 받았는데…. (웃음) 겉으론 별 거 없는데, 내상을 분명히 입긴 입었을 거야. 그래도 '재미있게' 지나왔다고 생각한다. 화도 나는 척 했다가, 국회 국정감사에서 두 위원장이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매스컴이 신들 났었지.

프레시안 : 요즘은 무엇에 빠져서 지내는가.

김정헌 : 위원회 시절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게 '마을'이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이 2006년쯤에 '생명의 숲' 활동을 지원하면서 백운면(제천 백운면, 진안 백운면)의 마을 조사 사업을 시작했는데, 내가 자문 위원을 하고 싶다고 해서 관계를 맺게 됐다. 그 활동을 통해 마을 운동을 하는 많은 분들을 만났고, 위원장 해임 후 이참에 마을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곳 문래동에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 사무실도 열었다.

문래동에 입주한 건 땅값이 싸서만은 아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모인 동네라,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아 일부러 왔다. 마을이 꼭 농산어촌 마을만을 말하는 게 아니잖나. 도시 쪽에서도 부각되고 있다. 그 시작으로 근방 옥상에서 텃밭 가꾸기를 하고 있는데, 반응이 정말 좋다. 도시, 특히 아파트에선 커뮤니티란 게 아예 사라졌지만 텃밭 같은 매개가 있다면 훌륭한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박원순 서울시장에게도 커뮤니티 재생에 관심이 많다는데, 이걸 꼭 권하고 싶다.

궁극적인 목표는 관치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의 마을들을 자치·자립의 마을로 만들어나가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미술 했을 때 또 다른 세상을 상상했던 게 이 지점에서 맞닿는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에 마을 답사기인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연재하기도 했다. 예술가가 마을에 들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김정헌 :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 동네의 유래, 이런 게 아니라 주민들이 살아 온 이야기 말이다. 노인들은 '마을 발전'이라는 말을 꺼내면 '이대로 죽을텨~' 하면서 손사래를 치는데, 자기 살아온 삶을 누가 들어주고 그게 서사화되면 얘기가 다르다. 자기 삶에 자긍심을 갖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데 있어 굉장히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예전 같으면 노인들이 동네 사랑방에 모여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그랬지만, 요샌 풀어놓을 데도 없다. 지금 예술가들이 바로 그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고, 폐교의 교실 한 칸에 아카이빙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 훌륭한 일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젊은 예술가들이 돈이나 기관에 예속되지 않고 활동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자유롭게 그리고, 쓰고, 노래하고 싶지만 기본적인 생계도 어렵다는 한계에 좌절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립을 도모하는 움직임도 있다. 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김정헌 : 지난 16일에 박승옥(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공동대표)을 불러 여기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조합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릴 가졌다. 어떤 결핍과 어려움을 나누고 공생을 모색한다는 데 있어 조합은 고민해볼 만한 대안이다.

기업에선 돈 많이 낸 사람이 우선권을 가지지만, 조합은 전혀 다른 논리로 돌아간다. 조합원들이 평등한 관계 속에서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민주적인 체제다. 그래서 요즘 주변의 젊은 예술인들도 조합을 만들려는 논의에 한창이다. 마침 지난해 12월에 다섯 명 이상이면 조합을 만들 수 있는 협동조합 기본법도 통과됐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정헌 : 최근 난생 처음으로 정당에 가입했다. 녹색당이다. 내가 마을에 가게 된 것도 그렇지만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의 영향이 컸다. '탈레반' 같은 구석이 있는 친구지만 (웃음) 그 친구가 하는 말들이 맞는 것 같다. 정치 세력화를 위해서라기보다, 이런 중요한 원칙에 대해서는 힘을 좀 가져야겠다는 생각에서 가입했다. 생태적 삶으로의 전환은 이미 기존의 정당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창당하려면 5000명 모아야 하는데, 이미 2200명 넘게 모였다고 한다. 관심 있는 분들 동참하시길 바란다. (웃음)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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