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명성에 걸맞게 이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에 진행된 진화를 둘러싼 거의 모든 주제들을 유려한 필치로 꼼꼼히 다루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면서도 결코 수박 겉핥기식의 얼렁뚱땅이 없다. 진화와 관련된 최신의 연구 성과들까지 글 속에 녹여 낸 저자의 솜씨는 놀랍다.
경쟁, 포식, 기생, 공생과 같은 진화론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들을 저자의 전작, <호모심비우스>(이음 펴냄)를 통해서 익히고 이 책을 통해 최근의 논의들까지 공부하면 진화론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진화론 전반에 관한 우리말로 된 입문서, 교과서를 갖게 되었다.
이 책은 대중들을 상대로 한 과학책이 지녀야 할 미덕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 정확한 과학적 사실들, 그리고 오랜 연구에 바탕을 둔 입장과 통찰이 있다. 하지만 개념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는 좀 더 명확하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가설, 원리, 진리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저자는 진화론을 '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원리'가 되기까지의 검증 과정, 그리고 '원리'의 작동 과정을 우리나라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아직도 '자연 선택설'이라고 부는 사람들이 있지만 앞으로는 그런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다윈의 자연 선택에 관한 설명은 더 이상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지난 150년 동안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 당당히 이론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반드시 '자연 선택론' 또는 '자연 선택의 원리'라고 부를 것을 주문한다. (31~32쪽)
▲ <다윈 지능>(최재천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
생명의 기원을 두고 창조론을 믿는다면 믿는 사람의 자유이지만 그것은 과학의 영역 바깥에 있다. 신의 손길을 두고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은 무용한 일인 탓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자연적인 조건들의 어떤 조합에서 생명이 탄생했다고 믿고 그 조건들이 어떤 것이었을지를 따져 알아간다면 그것은 과학이다. 가설을 세우고 합리적인 의심을 통해 검증하고 그 검증을 통과한 것들은 이론의 지위를 획득한다.
물론, 이론이 진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끝없는 회의 앞에서 온전할 수 있는 지식 체계를 인간이 구축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17세기에 유행했던 극단적인 회의론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어느 선 아래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던 사회적인 합의가 근대 과학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만, 근대 과학의 유래 없는 성공이 과학과 진리를 등치시키려는 경향을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진화론, 혹은 자연 선택 이론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과학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스스로 진리라는 것을 증명한 과학 이론은 어디에도 없다.
미국의 엣지 재단과 <뉴욕타임스>는 연례 행사로 새해가 되면 사회 명사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는다. 2005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 답을 내놓아 화제가 되었다. 당시의 질문은 '비록 당신이 증명할 수는 없지만 진리라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도킨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모든 생명, 모든 지성, 모든 창조성 그리고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디자인'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다윈주의적 자연 선택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다윈주의적 진화를 거쳐 디자인이 생겨났다. 진화 이전의 디자인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우주가 의도를 갖고 설계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자연 선택을 거친 진화에 대한 강한 신념을 표시하는 글이지만 여전히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의 믿음이다.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은 훌륭한 과학이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 이론을 통해서 새로운 통찰을 얻어 자연을 탐구했다. 이런 사실에 이론이 없지만 나는 여전히 진화론이 진리의 위치를 두고 종교나 다른 믿음의 체계들과 다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다툼이 생긴다면 그것은 싸움의 당사자들이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이 가진 인식론적 위치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있는데 애플이 발표한 '아이북스2'와 관련된 소식들이 들려왔다. 단순히 새로운 버전의 프로그램을 출시한 것이 아니라 교과서의 혁명을 이룰 것이란 선언, 분석들이 이어졌다. 스티브 잡스의 유지라거나 학생들을 위해 15달러 이하로 교과서를 구매할 수 있도록 협의 중이라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 속에 감추어진 상업적인 의도를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오래된 '아이패드1'을 꺼내 업그레이드를 단행하고 아이북스2를 실행했다. 기계 탓인지 약간 버벅대긴 하지만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반응하는 해리 포터 속의 책이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아이북스2 위에서 보여질 새로운 교과서의 샘플로 제공된 책은 에드워드 윌슨 재단에서 발행한 <지구 위의 생명>. 이 책에서 윌슨은 <해리 포터>의 덤블도어 교장 선생님처럼 인자한 표정으로 생명과 생태학에 대해서 말로 설명을 하고 있다. 움직이는 윌슨의 영상 아래 다음과 같은 소개가 붙어 있었다.
개미를 전공한 곤충학자로서 윌슨의 경력은 생물학 중에서도 하나의 분야에서 했던 깊은 공부가 어떻게 과학과 사회에 대한 혁신적인 통찰로 이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고전적인 증거이다.
이 설명은 그대로 이 책의 저자 최재천에게 적용이 된다. 개미를 전공한 곤충학자에서 시작해서 갑각류, 어류, 조류, 영장류까지 그 연구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인간의 문제까지 천착하는 그의 모습이 스승인 윌슨과 정확하게 겹쳐 보인다. 이 책에서 언급했듯이 최근에 집단 선택과 진사회성의 진화의 문제 같은 주제에서 윌슨과 학문적 견해 차이가 생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통찰을 사회적인 문제들에 적용하고 다른 분야 사이의 통섭을 시도하는 면에서 둘의 행보는 비슷한 길을 간다. 어찌 보면, 저자의 행동 반경은 윌슨을 훨씬 뛰어 넘는다.
실제로 그는 진화론과 행동 생태학 연구에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이 사회의 이슈였던 호주제, 노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대안을 제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삼성경제연구소 펴냄)나 <여성 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궁리 펴냄) 같은 주장들은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가 직접 만나는 사람들도 과학, 문학, 인문, 예술을 망라하고 기업과 공공 기관의 사람들까지 범위가 아주 넓다. 이론적으로만 다른 분야 간의 통섭을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각 분야의 사람들과 직접 부딪혀가면서 통섭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늘 하는 걱정은 어떤 이론이든 한 분야에서 얻은 지식이나 통찰이 다른 분야에서 적용되거나 일반적인 이론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길지도 모르는 과잉과 관련된 것들이다. 실제로 이 분야에서도 진화론-사회생물학-우생학의 이상한 조합이 사회의 다른 분야로 넘쳐 들어가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을 만들기도 했다는 것. 좋은 함의를 끌어내기 위한 또 다른 노력들도 어떤 부작용이 함께 올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불안감이다. 하지만, 이 넘침이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전망들은 내심 기대도 된다.
이 책은 '다윈 지능'에 대한 책이 아니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나왔던 진화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통섭의 시대, 공감의 시대를 맞이한 지금, 우리에게는 다윈 지능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이 책에서는 아직 미완의 기획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다윈 지능'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이 책에서 이야기한 풍성한 이론과 통찰들에 기대어 열어갈 새로운 기획을 연다는 의미이리라. 여기서 시작하는 이 책과 저자의 새로운 모험을 가슴 두근거리면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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