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대화는 반환점을 돈 것 같습니다. 근대 이해와 역사 인식으로 나아갔던 대화는 이병한 님의 글을 거쳐 동아시아론의 가치를 되살피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잠시 이병한 님의 지난 글에서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이병한 님은 동아시아론은 지적 유형으로 기울어간 여느 포스트 담론들과 달랐다고 평가합니다. 저는 그런 평가에 이의가 있지만, 마저 논지를 좇는다면 이병한 님은 동아시아론이 세계사의 격변과 호흡을 함께하고, 한반도의 장소성에 착근된 논의였기에 학술 담론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합니다.
아울러 동아시아에 서양의 근대가 이식된 시간은 상대적이라는(따라서 극복 가능하다는) 인식 하에 현 시점을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다른 사회 체제로 이행해가는 '전환 시대', 나아가 동과 서가 반전하는 '반전 시대'로 진단했습니다. 그 미지의 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론이 맡아야 할 역할을 강조하셨죠. 여기까지를 이번에 제가 답할 내용으로 삼겠습니다.
물론 신해 혁명을 복기하면서 '국민 국가'를 넘어선 정치 체제, 아울러 대안적인 동아시아 질서에 관한 고민을 심화했는데, 그 대목은 다음번 대화에서 저도 생각을 보태겠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대국과 소국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검토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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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한국에서 동아시아론이 활성화된 데는 세계사의 격변과 아울러 한반도의 장소성이 주요 배경으로 자리한다고 이해합니다. 한국에서 동아시아론이 활성화된 까닭은 무엇보다 냉전기에 사실상 도서 국가였던 한국에 동아시아론은 지역 구상의 계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겠죠.
냉전기 한국은 대륙으로 통하는 진출로가 차단된 채 해양 국가인 일본과 미국을 매개한 지역 인식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태평양 동맹을 추진하고 박정희 정권은 아시아태평양이사회의 창설을 주도했지만, 국가 외교는 기본적으로 반공을 지상과제로 하는 냉전의 굴레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냉전 체제가 동요하자 역내외에서 한국의 위상을 재고할 여지를 만들고자 새로운 지역구상이 부상했습니다. 노태우 정권기의 '북방 외교론'을 거쳐 김대중 정부는 '햇볕 정책'을 대북 정책의 근간으로 삼고 '동아시아 협력체'와 '동아시아 포럼'을 제안했으며,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는 '동북아 균형자론'과 함께 '동북아 시대 구상'이 제출되었습니다.
아울러 동아시아론이 활성화되면서 한국의 위상과 '장소성'도 재인식되었습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4대 강국의 한복판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고유한 역사 경험과 근대화 과정은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맡아야 할 이유로서 조명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론은 사실상 최원식, 백영서 등의 인문학자들에 의해서 그 싹이 텄지만, 국가 전략의 측면에서 탄력을 받아 사회과학계에서도 강력한 담론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정책적 뉘앙스가 짙게 배인 까닭에 동아시아론에는 '후원 담론'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우고 내수용 담론으로 굳어간다는 인상을 주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등장한 정책적 동아시아론은 장기적 모색보다 단기적 과제에 주로 무게가 실렸습니다. 더구나 역내외의 타국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한국의 상황에 기대어 실천의 당위성을 과도하게 주장했습니다. 정책적 입장에서 사고하고자 한다면 어떤 동아시아상이 바람직한가라는 규범적인 물음은 어떤 동아시아상이 가능한가라는 실질적 조건 위에서 던져져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책적 지원을 받는 동안 동아시아가 '실험적 공간'이 아닌 '실용적 공간' 내지 경제 팽창의 영역으로 기울어갔다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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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상의 각도로 옮겨 한국의 동아시아론이 지니고 있는 한 가지 속성을 끄집어내고 싶습니다. 한국의 동아시아론은 강국들의 주변에 위치해 있다는 한국의 장소성과 역사성으로부터 한국의 입지를 구축해내는 논리를 발견합니다. 중국과 일본(및 미국)의 '주변'이라는 사실을 역전시켜 '매개성' 혹은 '중심성'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주변은 매개이다. 매개는 실상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기 때문에 중심이다."
그리하여 정책적 관점에서 동아시아론이 흡수되었을 때 한국은 다리 역할을 맡는 국가로서 묘사됩니다. 중추 교량 국가(hub bridge state), 가교 국가(bridge building state), 중견 국가(middle state), 거점 국가(hub state), 협력 국가(cooperation-promoting state) 등 내용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모두 중간자 혹은 다리 역할의 발상에서 제출된 국가론들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변성에서 중심성(매개성)을 이끌어내는 논리적 전도는 바로 한국의 동아시아론을 성립케 하는 요소가 한국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서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한국의 동아시아론은 기본적으로 환경에 대한 산물이며, 한국의 동아시아론은 '대(對)-담론', 즉 대-미국, 대-중국, 대-일본 담론입니다. 그러나 대-타이완, 대-싱가포르, 대-몽골 담론은 아닙니다. 그런 지역을 향해서 동아시아론은 그다지 쓰임새가 없으며, 지리적으로 미국보다 가깝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지역 시야에서는 누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담론은 누구를 상대로 하느냐에 따라 논리와 지향이 달라집니다. 지역 지평으로서의 동아시아, 지역 질서로서의 동아시아, 지역 연대로서의 동아시아, '기획의 동아시아', '기억의 동아시아'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복잡하게 교차합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의욕적으로 내놓았던 '동북아 균형자'론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시선에 들기 위해 한국이 발돋움한다는 성격을 지녔습니다. 미국에서 서쪽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대상은 중국이며, 다음이 일본과 북한 순일 것입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냉정하게 말해 그렇게 오가는 대국들(북한은 별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이의 시선에 들어가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라면 경제 협력과 같은 '기획의 동아시아'와 아울러 관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기억의 동아시아'도 활성화됩니다. 중국과의 관계와 비교해 보았을 때 그 차이는 뚜렷합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일궈진 동아시아론은 제국-식민지의 역사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경험을 반추하고 이 지역에서 탈식민, 탈냉전의 실현을 사상적으로 모색하는 해방, 평화, 인권의 가치가 좀 더 짙게 깔립니다. 아울러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동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운동적 관점, 아래로부터의 '지역 연대로서의 동아시아'가 가동됩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공동의 동아시아를 모색하는 데는 '동아'라는 망령이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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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동아시아를 실체로서 품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중국과 같은 지리 공간상의 규모나 외교력도, 일본과 같은 경제력이나 제국의 역사 경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의 동아시아상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한국 속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제약은 한국의 동아시아론이 대-담론으로 성장하는 동시에 내수용 담론으로 기우는 이유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사고의 제약 조건은 바로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동아시아가 실체일 수 없기에 한국 사상계에서는 동아시아를 사고의 지평이자 기획의 단위로 삼으려는 강한 동기가 부여됩니다.
노무현 정부가 물러나자 동아시아론은 정책적 지원이 끊겨 '후원 담론'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했으며, 그간 구축되어온 동아시아상은 '신아시아 외교'라는 이명박 정부의 모호한 외교 구상 속에서 뒤틀리고 말았습니다. 신아시아 외교가 신냉전적 양상을 연출하는 동안 외형적으로 성장한 동아시아론에서는 거품이 빠졌습니다.
호황이 끝나고 거품이 빠지면 현실은 초라한 속살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동아시아론은 그렇게 될 것인가요. 그러나 가혹한 풍토는 억센 사상을 낳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원 담론이라는 지위를 잃은 지금, 한국의 동아시아론은 진정 사상적으로 자립해야 하는 환경에 내몰린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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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동아시아론이 요청된 사상사적 주요 의의의 한 가지는 이병한 님이 말하듯이 이식된 근대에 관한 성찰에 있었습니다. 동아시아를 지역 범주만이 아니라 사유 지평으로 삼으려는 논자들은 서구적 근대가 초래한 국가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억압, 독점, 차별, 착취 문제에 관한 비판의 시각을 조형하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이식된 근대로 역사적 상흔과 현실적 갈등을 간직한 이곳에서 동아시아론은 근대 이해의 성찰적 계기를 마련했으니 그 사상적 가치는 쉽게 저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서구적 근대 극복'의 필요성을 내놓더라도 "왜 동아시아인가"는 여전히 해명해야 할 물음으로 남습니다. '서구적 근대 극복'을 실현할 만한 자원과 역량이 동아시아에 존재하는지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동아시아를 서구적 근대의 대안으로 내놓는다면 서구적 근대에 관한 인식은 단순화되고, 동아시아는 물신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국가의 억압성, 민족주의의 폐쇄성, 자본주의의 착취적 속성 등의 부정적 면모를 서구적 근대에 안배하고 동아시아 가치를 그 대안으로 내놓는다면 근대성에 관한 몰이해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 관한 사고가 경화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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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이병한 님처럼 '동과 서의 반전'을 사고하기에 앞서 역내 국가들 사이에서 가로놓인 '동아시아의 균열'을 주시하고자 합니다.
지역은 고정된 경계와 구조를 가진 지리적 실체가 아니라 주체의 문제의식과 행위의 방향성에 따라 유동하며, 지역을 구획하고 인식하는 것은 공간을 정치적·지적으로 지배하는 일과 관련되며, 바깥에서 명명된 지역명이라도 그것을 둘러싼 복잡한 내부 경합이 발생합니다.
그런 까닭에 동아시아는 모호할 뿐만 아니라 균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역내외의 국가들은 다양한 양상으로 동아시아에 자신의 기획을 투사하며 경합합니다. 더구나 동아시아라는 지평이 각국에서(각국의 각 분야에서) 갖는 비중도 다릅니다. 나라마다 동아시아상은 교차하고 갈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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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연구자를 만나보면 중국에서 '동아시아'는 그다지 실감어린 개념이 아니라는 말을 듣습니다. '동'아시아라는 지리적 한정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어디엔가 속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아시아일 것이며, 그때 아시아는 유럽, 아메리카와 맞먹는 규모로서의 아시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국의 굴기'는 동아시아 범주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동인이며, 중국 역시 1990년대 초부터 다자주의를 모색하며 동아시아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에게 동아시아는 미국과 일본의 대중국 견제에 대처하기 위한 중요 전략 지대입니다. 중국에게 동아시아 정체성은 한국보다 옅지만 미국과의 긴장 관계로 인해 동아시아라는 지역 지평은 점차 무게를 더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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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 관한 일본의 지리적 상상에는 과거 대동아 공영권의 지리적 감각이 묻어있어서인지 한국보다 넓고 거기에는 동남아시아가 들어옵니다. 일본에서 '동아시아'가 테마인 심포지엄을 참가하면 한중일 관계가 중심에 놓이더라도 보다 다양한 지역의 연구자들이 참석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탈냉전기 일본은 동아시아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동아'의 죽음을 목도한 전후 일본은 인국과의 적극적인 관계 구축을 유보해왔으며, 동아시아라는 지역상은 유예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부흥과 재강국화에 따라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상은 부활했고, 탈냉전기에 들어서는 '동아'에 관한 연구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상계만이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동아시아 논의는 빈발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도 수차례에 걸쳐 등장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메이지유신으로부터 150년 정도라고 여긴다면 그 동안 일본발 동아시아론은 주요하게 세 차례 등장했습니다. 최초의 것은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19세기 후반의 아시아 연대론, 다음은 1930년대 후반의 동아협동체론이며, 현재 동아시아 공동체론이 세 번째 일본발 동아시아 구상입니다.
시기마다 주장의 양상은 다르지만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늘 중국과의 관계가 일차 관심사였으며, 그것은 탈냉전의 국면에 들어선 현재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현재 중국의 부상이 가속화되어 역내 경제 통합의 구심점이 되고 중국 역시 적극적인 행보에 나서자 일본은 체계적인 대중국 구상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다자 제도의 결속을 통해 통제하려는 일본의 동아시아 구상에서 미국은 육중한 존재감을 갖습니다. 미일 동맹은 일본 외교의 근간이며, 미국에게 "노"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미국을 떠날 수는 없는 일본에게 동아시아 구상은 미국의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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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미국은 다른 대륙에 속해 있지만, 동아시아의 '주인 같은 손님'이자 사실상 동아시아를 이루는 중심축입니다. 현재 한국, 일본, 중국 그리고 북한마저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도열해 있습니다. 한국은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미일 동맹으로 경제를 재건해 '기러기 대형의 선두'로 나섰습니다.
미국의 최대 채권국으로 성장했지만 중국은 경제발전의 고삐를 늦추지 않기 위해 최대 시장인 미국과의 관계를 조율하고 있으며, 미국과 적대 관계이지만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을 가장 고대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역내 관계의 한복판에는 역외에 있는 미국의 존재감이 뚜렷합니다.
경제적으로 한중일은 미국의 적자를 메워주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이 경제 위기에 처한다면 달러화를 벌어들일 수출 시장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군사적으로는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은 일본과 한국에서 안보 틀의 핵심이며, 문화적으로 이 지역에서 미국 문화에 대한 종속 정도는 심각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부상이 곧 미국의 퇴장 내지 영향력 감소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 정부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열린 지역주의, 제도화 수준이 낮은 공동체에 머물고 있는 까닭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핵심은 중국입니다. 통상 나이 리포트(Nye Report)로 알려진 논문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 사이의 경제적 충돌이 안보 협력 체제를 훼손해서는 안 되며, 양국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제어하기 위해 긴밀한 군사 공조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 패권 도전국으로 지목하고 중국을 견제하고자 미일 동맹, 한미 동맹, 타이완 군사 협력, 호주 및 싱가포르와의 동맹 관계를 기반으로 동아시아에 전략적 비중을 높이고 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 신태평양 공동체(New Pacific Community)를 선언하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정상 회의로 격상시킨 것도 중국 주도의 동아시아 블록화를 제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전략적 공간을 활용하여 호주, 뉴질랜드, 동북아와 동남아를 연결하고, 나아가 인도와 유럽연합(EU),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로 이어지는 경제적·안보적 벨트를 구축해 중국을 포위하는 구상이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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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냉전 이데올로기는 누그러들었지만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다양한 가치 내지 이데올로기가 활용되면서 냉전 이데올로기는 사라진 냉전감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신태평양 공동체' 선언에는 '민주주의'가 공유가치로 명시되었으며, 일본도 '자유, 민주, 인권, 법치, 시장경제'를 동아시아공동체가 체화할 가치로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가치(내지 이데올로기)는 중국을 견제하는 포위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호주, 뉴질랜드, 인도를 동아시아 공동체에 끌어들이고자 경주하는 까닭도 이러한 국가들을 결속하여 이른바 '자유와 번영의 호'를 형성해 가치외교로 중국을 압박하기 위함입니다.
아울러 중국 위협론도 부추기고 있습니다. 지리적 규모, 경제력과 외교력 등 중국의 압도적 존재감에서 파생되는 경계심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일당지배, 인권 문제, 소수 민족의 독립 문제 등 정치 사회 체제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기는 등 냉전 이데올로기는 해제된 냉전 감각이 활용되고 있으며, 신냉전적 대립 구도가 연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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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동아시아 상상은 나라마다 갈라지고 동아시아상에는 균열이 가있습니다. 역내의 국가들은 함께 동아시아 공동체를 입에 담지만 동아시아는 지역의 수준에서 국민 국가를 확대재편성하는 계기로 활용되고 있으며 동아시아상은 갈라지고 있습니다. 애초 동아시아는 바깥에서 주어진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경제 권역으로 패권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지역에는 '동아시아 공동의 번영'이라는 수사로는 감출 수 없는 적대 관계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분단, 과거사 문제, 양안 문제, 영토 분쟁 문제가 상존하여 한국과 북한, 한국과 일본, 중국과 타이완, 북한과 일본,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갈등이 잠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내 국가들은 직접적인 횡적 연결망을 구축하지 못한 채 미국과의 양자 관계를 중시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가 동아시아 지역 질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역내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될수록 미국이 동아시아에 내재하는 환경이 조성됩니다. 그리하여 미국의 존재는 동아시아라는 지역 질서를 실체화하지만 지역 연대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협력은 요원합니다. 그러나 바로 성사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요청되는 것이 지금의 형국입니다. 그리하여 긴장 관계로 맺어진 이곳에서 동아시아론은 연대를 일궈내기 위해 직관적인 협력의 요청보다 복잡한 성찰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남은 저의 발언을 동아시아의 연대를 사상적으로 모색하는 일에 할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근대 이해, 시대 인식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도 더 구체화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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