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의정서가 만료되는 2012년을 앞두고 그럴싸한 결정 없이 총회장을 나가기엔 큰 부담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결과는 '더반 플랫폼(Durban Platform)'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판도라의 상자이다. 그것도 일부 국가는 이미 비행기를 타고 떠난 상태였고 일부 국가는 시간에 쫓겨 제대로 검토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주요 언론에서는 2020년까지 교토 의정서를 연장하고 2020년 이후 새로운 체제, 즉 포스트 교토 체제에 진입하자는 제안이 더반 총회의 핵심 의제인양 다뤘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에 놓인 이런 일괄타결(all or nothing) 입장에는 중대한 모순이 숨겨져 있다. 미국의 불참으로 1차 의무 감축 기간에 치명상을 입은 교토 의정서가 더반에서 사실상 생명을 다했기 때문이다. 더반은 교토 의정서의 무덤이 돼버렸다.
▲ "더반 총회를 믿을 수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가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장 밖에서는 다양한 행사와 시위가 진행되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
총회가 열리기 전 더반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기댈 것이라곤 주요 국가들의 도덕적 양심이 아니라 기후변화협약 총회를 점령하자는 새로운 흐름 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희망이 있었다면 최근 이곳에서 겪은 기후 재앙이었다.
기상 관측 이래 최근 15년간 무려 13년이나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될 정도로 지구 온난화는 현실이 되었고, 그 피해는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곳 더반에서도 11월 평균보다 두 배나 많은 비가 내렸고, 총회 개막 전날 폭우와 홍수로 10명이 사망하고 700만 가옥이 파괴되었다. 다른 대형 기후 재난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었을까. 기후 변화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아프리카 땅에서 기후 정의가 조금이라도 실현되길 바랐지만 욕심이 지나쳤나 보다. 현재와 같은 유엔 체제로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점차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됐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표하는 아프리카 그룹은 2013~2017년을 교토 의정서 2차 의무 감축 기간으로 설정하고 이 기간 동안 1990년 대비 최소 40퍼센트를 감축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최빈국, 군소 도서 국가, 중남미 좌파 국가(ALBA)와 공동의 입장을 발표하면서 선진국들을 압박했다. 일부 국가들은 중국과 인도의 의무 감축 역시 강하게 주장하는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코펜하겐, 칸쿤 총회에 이어 더반 총회 역시 이미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정해진 협상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똑같은 배우들이 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두꺼운 협상문 초안은 두 달 전 파나마에서 제출된 여러 제안들의 편집본에 지나지 않았다. 각색된 대사가 있었다면 유럽연합(EU)이 총회 전에 제안했던 소위 '더반 로드맵'이었다. 선진국뿐 아니라 중국과 인도 등 주요 배출 국가도 2020년부터 의무 감축에 참여하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2015년까지 관련 협상을 마치자는 제안이었다. 이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유럽연합은 2020년까지 교토 의정서를 연장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큐 사인이 떨어지자 배우들은 이런 일괄타결 장단에 맞춰 연기를 시작했다. 결국 협상 2주차 막바지에 접어들자 협상 최종 문안은 '모든 국가들'이 참여하는 '법적 장치'를 발족하는 것으로 수정됐다. 미국의 입장이 반영돼 변경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졌지만, 미국은 여전히 교토 의정서 2차 연장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는 결국 2007년에 모든 국가들이 합의한 '발리 로드맵'을 위반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현재 의무 감축을 규정하는 유일한 국제 조약인 교토 의정서가 만료되는 2012년 이후에 공백 없이 새로운 의무 감축에 돌입한다는 '발리 로드맵'의 무늬만 지켰기 때문이다. 과연 2차 연장이 2013년 이후 5년간 바로 시행될 수 있을지, 무엇보다 미국, 일본, 캐나다, 러시아가 의무 감축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에서 교토 체제가 유지될 수 있을지, 이런 핵심적인 문제를 남겨두고 이제 공은 내년 카타르 총회로 넘어갔다. 따라서 2차 감축 기간과 감축 목표 그리고 감축 대상에 대해서 어떤 실효적인 결정도 이뤄지지 않은 채 총회가 마무리된 것이다. 의정서 개정과 각국의 인준 과정을 감안하면 교토 의정서는 빈 껍질이 돼 버린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2차 연장이 불투명해지면서 2020년까지 배출 감축을 각국의 자발적 의지에 맡겨 시급한 의무 감축 행동이 지연되는 것이다. 2015년 늦어도 2020년까지 탄소 배출이 정점을 지나 배출 절대량이 감소되어야 한다는 과학적 연구들과 비교하면 2020년 이후의 행동 계획은 너무 늦다. 또 교토 의정서를 거부한 미국처럼 기후 행동에 소극적인 국가들이 새로운 조약을 승인한다는 보장도 없다.
이미 기후 깡패 국가들이 의무 감축 방식을 자발적 감축 방식으로 대체하길 원하는 상황에서, 교토 의정서라는 마지막 희망을 버리고 더 느슨하고 비효과적인 감축 체제를 출범시키지 않으리란 확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코펜하겐 이후 선진국이 2020년까지 자발적으로 감축하겠다고 약속한 13~17퍼센트는 2도 상승 제한을 위해 스스로가 결정한 25~40퍼센트에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그 결과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지구가 4도 이상 상승해 파국적인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경고는 회의장의 자료 문서에서만 강조될 뿐이었다.
2020년 이후 모든 국가들이 포함된 단일 트랙에 대해 인도가 극구 반대하고 미국이 협상 시한 고정과 법적 구속력 있는 합의 방식을 거부했지만, 결과적으로 주요 국가들이 유럽연합의 의도에 동조해 '더반 플랫폼'으로 결정되었고, 이런 로드맵을 이행하기 위한 임시 기구(Ad-hoc Working Group on Durban Platform for Enhanced Action)도 승인되었다.
이렇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그리고 코펜하겐 총회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선진국 내의, 개발도상국 내의 긴장과 갈등으로 여러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지만,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대한 그리고 1퍼센트가 99퍼센트에 대한 승리로 끝이 났다. 더반 총회는 표면적으로 전부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아무 것도 없지 못할 프레임에 갇혀 버렸다.
총회 직전 캐나나 환경부 장관은 잃어버린 지난 4년의 본질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무수한 공분을 자아냈지만, "교토 의정서는 과거다"라는 그의 발언은 '더반 플랫폼'의 전조였다. 무엇이 나오든 이 틀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토 의정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미래의 불확실한 감축 약속이 아니라 교토 의정서를 강화하고 의무 감축 국가를 재분류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협상 결과라 자축하기에는 세계 곳곳의 현실을 모르는 비현실적인 로드맵만을 남겼다.
기후 정의 진영과 일부 국가들은 코펜하겐에서부터 계속 속아왔지만 더반에서는 좋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농성하고 점령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그 힘은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비록 더반 곳곳에서 시위와 퍼포먼스가 2주 동안 진행되었고, 아프리카 그룹, 군소 도서 국가와 중남미 좌파 국가는 전 세계 사회 단체에 합세해 기후변화협약 총회 점령 운동(OccuoyCOP17 General Assembly)에 동참하고 연대 전략을 구사했지만, 끝내 제2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막지는 못했다. 결국 기후 게임의 연장 승부에서 역전 끝내기 홈런은 없었다.
기후 변화로 가장 큰 피해를 받고 있는 아프리카 땅에서 교토 의정서가 죽었다. 결국 더반 기후변화협약 총회는 이 세상을 대학살(genocide)과 생태계 파괴(ecocide)로 몰고 갈 것이다. 파국적인 상황을 막을 수 있도록 감축량의 부족분을 채우고 감축 공백기를 없애야 하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명쾌한 정답은 있다. 애정남에게 물어보자. 이렇게 답지 않을까? '오염시킨 놈이 치우는 겁니다. 이제 다른 말하기 없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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