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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통 최능진, 결국 총살당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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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통 최능진, 결국 총살당한 까닭은?

[해방일기] 1946년 12월 5일

1946년 12월 5일

조미공동 소요대책위원회(조미공위)의 활동에 관한 하지의 성명서가 12월 5일에 나온 것은 11월 2일자 일기에서 소개한 바 있다. 조미공위를 지지하는 내용이지만, 바로 그 전날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이 파면된 일로 보아 그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생각도 붙여 썼다. 조미공위의 활동은 경찰 개혁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고, 경찰 안에서 그 개혁의 방향을 대표해 온 인물이 최능진이기 때문이다.

최능진(1899~1951년)은 분명한 우익 인물이다. 해방 전후 그의 행적은 <위키백과>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1937년 안창호와 함께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 해방 직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9월께 소련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뒤 미군정에 의해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1946년 조병옥의 친일 경찰 등용과 부패에 항의하다가 경찰 간부직에서 밀려났다.

경찰에서 쫓겨난 후에도 극우파에 대한 저항을 계속, 1948년 5·10 선거에서 이승만에 대항해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하려다가 경찰의 탄압으로 후보 자격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 해 가을 '혁명 의용군 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전쟁 중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정전·평화 운동을 벌인 죄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2009년 9월 과거사위원회가 이 선고와 처형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고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 수용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40대 후반의 나이로 해방 공간에서 활동한 최능진은 어떤 배경의 인물이었는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신문 자료에서 약간의 편린을 찾을 수 있었다. 1920년대 미국 유학 기간 동안 샌프란시스코 교민 사회에서 1909년 이래 주간으로 발행해 온 <신한민보>에 여러 차례 모습을 보였다. 귀국 때는 1929년 8월 1일자 동정 란에는 그의 귀국 기사와 그 형의 환송 차 샌프란시스코 방문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최능진 군 31일 귀국"

기보한 바와 같이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에 있는 체육 대학의 전문을 필한 최능진 씨는 평양 숭실 대학의 운동 교수로 인빙되어 7월 31일 고리아 선편으로 귀국하였다더라.

"최능익 씨 계씨 송별하러 왔다가"

라성에 다년 거류하며 상업하는 최능익 씨는 금반 귀국하는 그의 계씨인 능진 군을 전별 (…) 눈물로 작별하고 동일 오후에 회정하였다더라.

형 하나가 미국에 정착해 있었던 것, 그리고 최능진이 숭실학교에 다녔고 귀국 후 숭실학교에서 근무한 것을 보면 기독교 집안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귀국은 1929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만능 주장 선수 최능진 씨 귀국 - 12년 만에 금의환향"

조선 체육계를 지도할 한 개의 별은 나타났다! 그는 평양 출생의 최능진 씨로 씨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스프링필드 국제청년회 체육 대학을 마치고 얼마 전에 귀국하여 방금 숭실전문학교 체육부 주임의 직에 있어 다수한 청년 학생들의 체육을 지도하고 있는데 씨는 말하되 "1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오니 모든 것이 감개무량할 뿐이외다. (…) 앞으로 나는 이 방면에 몸을 바치려 합니다"고 하는데 씨는 일찍이 평양숭실중학에 다니다가 15년 전에 중국 남경에 가서 어학을 공부하며 금릉대학에 다녔고 2년 후에 미국에 건너가 소학교부터 중학과 대학을 거쳐 전기 체육대학을 금년에 마쳤으며 미국에 있는 동안 사커와 미국 럭비는 물론, 배스킷볼과 테니스 등 만능 선수로 다년 주장으로 활약한 우수한 체육가로 씨의 앞이 더욱 기대된다.

그런데 몇 해 후 <동아일보>에 최능진과 관계된 뜻밖의 기사 하나가 보인다. 독립운동가 최능현의 사망 기사다. 최능현이 LA 거주 최능익의 형이라는 사실은 1919년 5월 17일자 <신한민보> "최능현 당로의 헌신 활동"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강서 사천사건 거두 최능현 상해서 서거-병사인지? 정치적 피살인지?"

3·1 운동 당시 평남 강서군 사천 사건의 거두로 상해 등지에 십수 년간 망명해 있던 최능현 씨(52)가 돌연히 지난 18일 별세하였다는 소식이 21일 평양부 창전리 그 실제 최능진 씨에게 왔다고 한다. 최능현 씨는 사천 사건 당시 평양지방법원에서 궐석판결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해외에 망명하여 북간도-북경-남경-상해 등지로 전전하면서 십수 년간 민족운동을 계속하던 이로서 (...)

"재호(在滬: 상해에 있는) 장남은 장개석 장교-장형(長兄)은 옥중에서 반신불수"

최능현 씨의 가정은 현재 강서군 성대면 연곡리에 그 부인 노 씨(49)가 아들 봉주(11)를 거느리고 있다 한다. 딸 둘은 이미 출가하였고 장남 경수(23) 군은 부친을 따라 상해에 가서 군관학교를 마치고 현재 장개석군의 사관으로 있다고 한다. 고향에 부인 노 씨가 데리고 있는 아들 봉주는 최능현이 궐석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대동군 용악산 속에 숨어서 활동하는 때에 잠시잠시 관헌의 눈을 피해 가족을 상면하는 때에 부부 간에 생긴 아들로 부자상면도 못한 터이라 한다.

그 실형 되는 최능찬은 역시 동생 능현과 함께 사천 사건에 가담하여 1심에서 사형, 복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반신불수가 되어 수 년 전 집행 정지로 출옥되어 있는 중이며 실제 최능진 씨는 연전 미국에서 돌아와 숭전 교수로 있다가 최근 사직하고 실업에 종사하는 중이라 한다. (<동아일보> 1933년 8월 24일자)

기사 중의 '사천 사건'이란 강서구 반석면 사천 장터에서 1919년 3월 4일 일어난 것으로, 수원 제암리 건과 함께 3·1 운동의 대표적 유혈 참극이었다. 최능찬-능현 형제는 이 사건의 중심인 반석교회의 장로들이었다.

최능진의 집안은 이처럼 항일 운동의 명문가이며 또한 기독교계의 명문가였다. 최능진 본인은 17세 때부터 13년간 미국에서 공부했고, 게다가 일류 스포츠맨이었다. 스펙으로 봐서 미군정이 보물처럼 아낄 사람인데, 어째서 조병옥에게 밀려나고 결국 사형까지 당하게 된 것일까? 형 둘이 항일 운동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실제 처형은 당하지 않았는데, 스무 살 손아래의 막내가(짐작이다) 해방된 나라에서 처형당하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한국민주당(한민당)에 맞서고 이승만에 맞섰기 때문이다. 이것도 짐작이다. 하지만 1946년 12월 4일 파면당한 후 그와 조병옥-장택상 사이의 공방을 보면 이 짐작에 의문의 여지가 별로 없다. 최능진은 조병옥의 사직 요청에 대한 회답 형식의 공개 편지를 5일 발표했다.

"소직(小職)은 국립경찰을 위하여 初志를 달성치 못하고 탐관 모리만을 전념하는 귀하에게 국립경찰을 일임하고 나아감은 양심이 용허치 않는다.

1) 나는 경찰 협화를 방해한 일 없고 귀하 같이 매일 모리배 등과 작반하여 요정 출입에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과 귀하 같이 악질 인물을 고관대직에 채용하고 순수한 독립운동자를 무경험자라고 배척하는 귀하의 인사 행정에 반대한다.
2) 귀하는 나를 경찰 사기 진작에 유해하다니 탐관·모리·직권 남용 등을 위주로 하는 경찰관을 용퇴하라고 호령한 것이 사기를 잃게 하였는지? 그리고 이번 영남 폭동 사건에 대한 책임을 느낄 줄 모르는 귀하의 처사가 사기를 진작하는 것인가?
3) 명령 불복종에 관하여는 일제 시대의 일본의 충신을 군정지사로 소개하여 군정청으로부터 1200~300만 원을 인출하여 귀하의 요정 유흥비를 전담한 자를 위하여 가옥명도 강요와 불법 구타를 감행한 데 대한 고소 사실을 불문에 부친 사실과 한 공안국장에 대한 인권유린 불법 감금에 관한 고소 사실을 귀하가 휴지화하여 버린 것도 소직이 묵인하였다. 그러나 다만 불복한 것은 귀하가 김계조 석방 운동을 소직에게 요청하였을 때 거부한 일이 있을 뿐이다.
4) 이상 귀하는 국립경찰을 더럽힌 죄를 사직하여 민중에게 사과하며 귀하의 불의(不義)소득은 전재동포에게 돌리고 축첩은 독신자를 위하여 해방키를 바란다." (<자유신문> 1946년 12월 7일자)

최능진은 6일에도 출근해서 "조 부장 같은 이에게 경찰을 맡길 수 없다"며 등청해서 자리를 지켰다. 조병옥은 미군 헌병의 손을 빌려 최능진을 쫓아내고 반박 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이를 공개 서한으로 알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문서의 발표에 대하여 상당한 고려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쨌든 나의 부덕한 탓으로 안다. 최 국장은 파면된 후도 직장을 안 나가서 하오 4시 축출하였다. 이번 서한 문제에 대하여서는 방금 미군 세 사람으로 조직된 사문위원회에서 나의 요청에 의하여 조사하고 있는데 추후에 자세한 것을 발표할 것이다.

발표 문서 중 김계조 석방 운동을 운운하나 이에 대하여 최 국장에 이런 요청을 한 일은 없고 당시 경무국장이던 참페니 대좌를 통하여 보석 의견서를 낸 일이 있을 뿐 물질적으로 받은 일은 없다. 이 문제는 이미 윔스 소좌의 사문에 의하여 규정된 사실이다. 또 전과 3범의 사람을 고관대직에 임명하였다 함은 알지 못하는 일이다. 그리고 1200~300만 원의 거금을 받았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7일자)

김계조 사건은 1946년 1월 6일자와 3월 11일자 일기에서 설명한 일이 있다. 해방 공간 경제 사범 중 가장 파렴치한 사건에 끼어들었다니, 지금까지도 조병옥의 인상이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더 나빠진다. 챔피니 대령을 통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간다. 챔피니 대령은 3월 2일자 일기에 장택상에게 업혀 박흥식 석방에 끼어든 일이 나오는데, 당시 직책은 국방국장으로 보도되었었다. 미군 자료에 손댈 기회가 있으면 이 사람 한 번 조사해 봐야겠다.

조병옥과 '환상의 콤비'를 이루는 장택상이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장택상은 7일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세인의 이목을 어지럽게 하는 와중에 몸을 던져 시비와 좌우를 가리고 싶어 함이 처세술에는 현명치 못할런지 모르나 양심의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금번 경찰수뇌부 양인의 시비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하노라.

경무부장 조병옥 씨는 양심 있는 경찰이다. 10개월간 나의 체험으로 말하건대 그이는 사석이나 공석에서 편당적으로 언사를 한 번도 하여 본 적이 없다. 左를 억압하고 右를 옹호한다든지 右를 억압하고 左를 옹호하라는 등 언사는 이제끔 경무부 정책을 반영시키는 수도경찰책임자 나로서는 천지신명에 대하여 서슴지 않고 말하노니 그이로서는 한 번도 없었다. 그 반면에 최 씨는 종시일관토록 공적이나 사적으로 편당적 경찰 행정을 강행하여 왔다.

그이가 우리들을 비방하는 말이 '너희는 비애국자이다' 말살과 탄압과 억류와 체포를 좌익에 대하여는 주저치 말 것이라는 협박과 강요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근에 와서도 본인을 모 요정에 초치하여 협박적 언사로 공갈하는 말이 그대도 조 부장과 같은 운명에 닥쳤으나 오히려 살아나갈 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니 현 간부급을 전부 파면하고 중국서 건너온 애국자나 국내에 있는 단체 간부로 경찰 수뇌부를 조직하여 강력경찰을 이루라 하였다. 나는 이 말에 대하여 비장한 결심으로 단호히 거절하였다.

나는 천하인사에게 묻노니 우리 조선의 현 단계에 있어 좌익 사상을 발본색원할 수 있나 거듭 묻고자 한다. 우리의 노선은 아무쪼록 좌우익의 기본 정치사상은 당분간 덮어두고 민족적 국가 독립이라는 목표 아래로 모여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투쟁하는 정치목적인 줄로 믿는다.

최 씨가 조 씨에게 비행을 지적함에 관하여는 사문위원회에서 자연 규명될 터이니 아는 바 있다 하여도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재 축적이니 전과자 기용이니 하는 등에 대하여는 본인 최 씨에게 묻고자 하노니 자화자찬이 아닌가 하노라. 하나 조 부장의 풍류에 넘치는 일에 대하여 고금에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마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너나없이 자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찰관의 문호에 모리가 출입하든지 정치 브로커가 출입함은 오늘의 시기에 당하여는 절대 금물이다. 우리 민주 경찰 수뇌부로서는 반성할 시기가 왔다고 깊이 느끼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8일자)

장택상이 인정하는 조병옥의 유일한 허물이 "풍류에 넘치는 일"이란다. 세월 참 좋다. 최능진은 12월 12일에 또 한 차례 성명서를 발표했다.

"장 씨 성명서의 의하면 내가 사감으로 조 씨를 비방한 것이며 내가 좌익 진영을 탄압한 경찰관이었다고 지적하였으나 나는 사감이 조금도 없이 하였으며 좌익 탄압 운운의 성명은 장 씨가 주로 좌익 진영에 대한 추파에 불과하다. 오직 나는 재직시 민족을 분열케 하는 극좌, 극우를 극도로 탄압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나의 일제시대 전직자 퇴진 주장은 일본 황실의 번영을 위하던 소수의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건국도상의 민중 지도자가 될 수는 없으므로 간부급을 제거하고 하부 진영에만 전직 경찰기술자를 두어 민주경찰 진영 강화를 주장하였으나 조 씨는 끝끝내 나와 의견이 대립되었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경찰은 왜정 자체가 은연히 희망하던 친일경찰이 아니고 무엇일까." (<자유신문> 1946년 12월 14일자 "친일 경찰 진영 소탕하라")

장택상의 성명 중 "말살과 탄압과 억류와 체포를 좌익에 대하여는 주저치 말 것이라는 협박과 강요"라는 대목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했는데, 이 성명을 보니까 알겠다. 최능진은 월남한 평안도 기독교인답게 좌익 단속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다만, 극좌와 극우 양쪽 모두에서 민족 분열의 위험을 경계했다.

장택상은 극좌에 대한 최능진의 강경한 태도만을 뽑아내어 좌익과 최능진 사이를 이간하려 한 것이다. 출세에는 뭐든 재능이 필요한 모양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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