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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좌경' 美 기자가 본 이북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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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좌경' 美 기자가 본 이북의 모습

[해방일기] 1946년 11월 14일

1946년 11월 14일

이 작업을 시작할 때는 38선 남북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한길사 펴냄)이 나올 때보다는 이북 지역에 관한 자료도 연구 성과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게 되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혀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한 동안 내 능력의 한계를 탓하고 있었는데, 1년 남짓 살펴오면서 한 가지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분명해졌다. 이남 지역의 상황 진행에 억지스러운 면이 더 많고, 따라서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문제다. 이북의 소련군에 비해 이남의 미군이 더 많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남에서 입법 의원 선거가 잘 됐느니 못 됐느니 시비가 일어나고 있던 1946년 11월 3일 이북에서는 인민위원회 선거가 있었다. 이 날 선거는 도-시-군 단위의 선거였고, 리-동 단위 선거는 1947년 2월 24~25일, 면 단위 선거는 3월 5일에 열리게 된다. 2월 17~20일에는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를 열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북의 인민위원회 선거에도 지금 우리 기준으로 보면 문제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보통선거와 비밀선거의 원칙이 대략 지켜졌다는 점에서는 이남 입법 의원 선거보다 월등한 성공이었다. 이 선거를 통해 인민위원회는 주민을 대표하는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북의 선거가 이남의 선거보다 잘 된 데는 선거 진행 방법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민심이 안정되어 있다는 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1947년 여름에 이북 지역을 방문한 한 미국 언론인의 기행문을 통해 당시 상황을 개관해 본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497~538쪽에 수록된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북한, 1947년 여름"(이종석 옮김)은 1947년 방문을 바탕으로 작성되어 1949년에 발행된 기행문이다. 스트롱은 당시 공산권에서 이례적으로 환영받는 미국 언론인이었는데, 이 북한 기행문을 봐도 그 이유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사회주의 운동을 미화하고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자세는 글머리에 마크 게인의 글을 인용해 놓은 데서부터 유감없이 드러난다(497쪽).

한국은 세계 열강으로서의 우리 미국이 자발적으로 떠맡은 주요한 부분이다. (…) 우리는 이곳에서 매우 심한 오류를 범해왔다. (…) 여론 조사에 의하면 64퍼센트의 한국인들이 우리를 혐오하고 있다. (마크 게인, <뉴욕 스타>, 1947년 11월)

스트롱의 글은 그의 '반미좌경' 성향을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감안할 것을 감안하더라도 분명한 사실들을 명확하게 정리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9월 미군의 진주에서부터 자신의 방문 때까지 약 2년간의 상황 진행을 그는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은 적이 아니라 일본 침략의 희생물이었다. 우리는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으로 가야 했다. 점령은 전쟁이 끝난 뒤 1년 이내에 종식되게 되어 있었고 그 뒤에는 미·영·중·소 4대국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5년간의 신탁 통치를 하게 되어 있었다.

계획은 그러했으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소련에 대항하는 점증하는 냉전은 한국을 하나의 기지가 되게 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들어간 두 지역은 두 개의 군사 점령지가 되었다. 마찰이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미군이 1945년 9월 7일 남한 지역에 상륙하였을 때 수많은 한국인들은 춤추고 기뻐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6개월도 안되어 뿌루퉁해진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언제 돌아갈 것인지를 캐묻게 되었다. 1년이 못 되어 미국 군대가 유지하고 있는 경찰 국가에 대항하여 80개 도시와 수백 군데 농촌 지역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 상륙 이틀 뒤 하지는 25년간 해방을 기다려온 한국인들에게 일본인 관리들이 잠정적으로 한국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미국인들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던 한국인 대표들은 일본 경찰의 총알 세례를 당했다.

러시아인들은 미국인들과는 정반대 정책을 추구했다. 그들은 미국이 억압하였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였다. 러시아인들은 한국인들이 주도하여 일본의 앞잡이들을 내쫓고, 지주들의 땅을 나누어주고, 일인 소유 공장들을 '한인의 자산'으로 국유화하도록 고무하였다. 러시아인들은 농민조합, 노동조합, 여성동맹, 청년동맹 등 그들이 대중조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러시아인들이 들어간 북부 지역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신들의 조국을 정력적으로 만들어가는 그러한 조직들이 상당히 생겨났다.

미국과 소련은 한국의 장래를 결정하기 위해 가끔 회합을 가졌다. 2년간의 이런 대화의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적대감만 늘어갔다. 미국인들은 친일 매국노들과 쫓겨났던 자들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기를 고집하였고 소련은 반대하였다. 러시아인들은 노동조합-농민조합과 같은 조직의 대표들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했으며 미국은 이에 반대했다. (498~499쪽)

이북 지역의 취재에 소련군이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미군 점령 지역의 어떤 통신원보다도 자유롭고 가까이에서 소련 점령 지역의 한국인들과 접촉하였다"고 스트롱은 장담한다(502쪽). 자기네가 보여주고 싶은 면을 스트롱에게 보여주려 한 북로당 측의 노력은 더러 느낄 수 있지만, 소련인의 개입은 분명히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이북 지역에서 소련인이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북쪽의 한국인들은 자신들 스스로 상황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며, 그와 같은 사실은 내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심지어 순진하게조차 보였다. (…) 그들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은 미국과의 조약 때문에, 그리고 오직 자문을 하기 위해서만 북한 지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 러시아인들이 외교적인 관계를 담당하고 있고 북한의 국방을 지원하고 있다고 내가 지적하면 그들은 그런 것들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듯이 무시해버렸다. "선거, 경찰, 사법, 행정 등의 모든 나라 일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주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러시아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수도인 평양뿐이었는데, 그곳에서조차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실제로 러시아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해방 기념 경축일인 1947년 8월 15일뿐이었다. 소련의 장군들은 연단 위에서 김일성 위원장 옆에 서서 공장과 단체들의 행렬을 사열했고 행진하는 군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어 있은 연회에서 러시아인들은 한국인들과 섞여서 번갈아 축배를 들고 그들의 민요를 불렀고(러시아인들이 볼셰비키 선전가가 아닌 우크라이나의 옛 연가로 응대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상대방의 여성들과 춤을 추었다. 자연스럽고 흥겨운 승리의 축하연이었다. 미군이라면 그렇게 쉽게 아시아인들과 동등하게 어울릴 수 있을지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는 러시아인들이 아시아에서 갖는 강점들 중의 하나였다.

내가 본 바로는 러시아인들은 인기가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투를 하며 들어온 첫 부대는 독일 전선에서 온 거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1945년에는 그들에 대한 불평이 좀 있었다. (…) 처음에 충격을 주었던 부대들은 빠른 시일 동안에 농업, 공업, 기술, 행정 전문가로 대체되었고, 이들은 북한 곳곳에 흩어졌으며 그들의 기능은 아주 분명하게 제한되었다.

동해안의 한 농업감사관은 도청 소재지에 10명 내지 12명 정도의 러시아인이 있으며 그가 있는 군에는 3, 4명 정도만이 있고, 그들이 하는 일은 단지 자문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러시아인들의 점령에 대한 재미있으리만큼 순진한 이러한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새로이 해방된 인민의 허풍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러시아인들의 빈틈없는 수완 탓이기도 하다. 남쪽의 미국인들이 누구를 밀 것인가를 늘 논의하고 그들이 택했던 입법의원 의장 김규식의 말대로 "사소한 일에도 늘상 간섭하였던" 것과는 달리 러시아인들은 북한에서 단 한 명의 관리 임명에도 끼어들지 않았고 법률을 입안하는 데에 개입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그런 일은 한국인들 스스로의 일이라는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 러시아인들이 자기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국인을 나는 발견할 수 없었다.

실제로 나는 '한국 인민의 힘'에 대한 거의 신비할 만큼의 신념을 볼 수 있었다. 한 농부는 지주들이 토지 몰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것은 붉은 군대 때문이 아니라 '정당한 법과 조선 인민의 의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공장 노동자는 '친일 반역자들이 남쪽으로 달아난 것'은 러시아인들 때문이 아니라 '인민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 사람들은 정치에 있어서는 국제사회의 현실에 대해 좀 배워야 할 것이 있는 희망에 찬 젊은이들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스스로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자각된 의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502~504쪽)

이북 당국의 선전에 넘어간 냄새가 좀 나기는 한다. 하지만 스스로 믿지 않는 것을 남에게 믿으라고 하는 우격다짐 선전이 아니라 스스로 믿는 것을 외부인에게 권하는 고급 선전이다. 스트롱 본인은 그 선전자들을 "현실에 대해 좀 배워야 할 것이 있는" 순진한(원문을 안 봐도 'naive'란 말을 썼을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로 보며 냉철한 시각을 지키고 있다.

이남의 미군이 열차 전용 칸을 운영하며 군정청 발행의 차표 가진 사람들까지 (젊은 여성 빼고) 쫓아내는 데서부터 민중 시위에 탱크 동원을 주장하는 데까지, 모든 법령을 자기네 손으로 만들다가 법령 만들 입법 의원까지 자기네 손으로 만드는 온갖 행태와 극도로 대비되는 자세를 이북의 소련군이 취한 것은 분명한 일이다. 미국인들이 자기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 한국인이 이남에 있었을까?

스트롱은 1946년 11월 3일의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들은 (단일 후보를 놓고 찬반을 투표하는) 자신들의 방식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99퍼센트가 투표하였는데 나와 대화를 했던 모든 사람들은 강요받은 바 없이 투표하고 싶어서 투표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문제를 한 여성 광부와 같이 의논해보았다.
"총선에 투표했나요?"
"물론이지요. 후보는 우리 광산 사람이고 아주 훌륭한 노동자이지요. 광산에서 그를 후보로 추대했습니다"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서구의 선거에 대해 설명하였다. 후보가 한 사람뿐이라면 투표해보아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텐데 선거가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내가 주장하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 후보에게 찬성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그 후보는 큰 창피를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 후보는 최소한 반 이상의 득표를 못하게 될 경우 선거에서 지는 것이 된다. "물론 제가 없어도 그 후보는 선출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녀는 겸손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왜냐하면 그는 인기가 대단하고 나의 표 없이도 충분한 표를 얻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그가 더 많은 표를 얻기를 바라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찬성한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요. 왜냐하면 그는 우리 광산 출신의 훌륭한 노동자이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이것은 우리 최초의 선거이고 아무도 지체시킬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후보자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를 좋아하고 그에 대해서 이야기한답니다."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정당은 우리 광산과 공장에서 모임을 주최하였고 인민들의 기호를 알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함께 가장 적절한 사람을 추천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미국인들이 왜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도전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어쨌든 미국인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투표 방법은 단순했다. '반대'용 검은 상자와 '찬성'용 흰 상자가 있었다. 투표자는 선거구의 도장이 찍힌 카드를 받아 장막 뒤에 가서 그가 선택한 상자 속에 카드를 넣었다. 카드는 똑같은 것이어서 아무도 그가 어떻게 투표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510~511쪽)

후보가 몇 명이든 마음대로 출마하게 하고 투표자 한사람이 후보 한 사람을 고르게 하여 1등을 당선시키는 우리의 '미국식' 선거와 분명히 다른 방식의 선거다. 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개념이 다른 선거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의 차이일까? 어떤 방식, 어떤 개념의 선거가 나은 것인지 나는 잘라 말하지 못하겠다. 적어도 당시의 조선 상황에서는.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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