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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과 현실주의자를 구분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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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과 현실주의자를 구분하는 방법

[해방일기] 1946년 11월 11일

1946년 11월 11일

며칠 전 일기 제목에 김규식을 '현실주의자'라고 했다. 이것을 의외로 받아들이는 독자들이 많다. 해방 공간의 중간파 정치인을 다룬 이재명의 <한국 현대사의 비극>(선인 펴냄)에는 김규식을 다룬 장에 "한 온건 지식인의 실패한 이상주의"란 제목을 붙여 김규식을 이상주의자로 규정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김규식이 현실의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현실주의자로 보기 힘들어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상주의자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주의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보는 통념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통념이 이 사회의 정치적 미숙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적-사회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생산적 정치 과정을 제대로 갖춘 사회에서는 현실주의가 이렇게 천대받을 수 없다.

올바른 정치인은 현실주의자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정치 이념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되 현실 조건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도파의 최대 공약수가 여기에 있다. 민족 사회 안에 오른쪽 이념도 있고 왼쪽 이념도 있다면 민족 사회가 쪼개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합의를 이루는 길을 찾는 것이다.

왼쪽으로 충분히 가지 못해 아쉬운 문제나 오른쪽으로 충분히 가지 못해 아쉬운 문제는 민족 사회가 쪼개지는 커다란 문제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임을 알아보는 것이 해방 공간의 현실주의였다.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어머니, 아기를 쪼개는 일을 피하기 위해 아기를 포기하겠다는 어머니가 현실주의자다. 아기를 쪼개서라도 내 권리를 우기겠다는 가짜 어머니는 현실주의자가 못 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는 현실주의자가 아니다. 이상주의자도 아니다. 사기꾼이고 선동가일 뿐이다. 욕심에 짓눌리지 않은 이념을 마음속에 품은 사람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해방 공간에서 민족 분단의 위험 앞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지 않은 자들은 아기를 쪼개서라도 내 것을 챙기겠다는 가짜 어머니였다.

김규식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는 인물이다. 냉소적인 인상을 풍기면서도 긴요한 대목에서는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하는 인물. 1946년 11월 6일 찾아간 미국 기자 마크 게인이 들었다는 이런 말에서는 그의 분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과도 입법 의원 선거에 관해서 얘기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힘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는 막 하지 장군에게 전체가 안 된다면 부분적으로라도 선거 결과가 무효가 되어야 하며, 45명이 아니라 과도 입법 의원 90명 의원 전원을 좌우합작위원회가 지명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선거가 사기이며, 모든 좌익 지도자들이 감옥에 있는 한 공정한 선거란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좌우합작위원회 공동 의장인 여운형과 의견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두 달 전에 러치 장군에게 공정한 선거를 위해 별도의 민간 조직을 만들도록 촉구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청원은 무시되었다. (<해방과 미군정>(마크 게인 지음, 까치 펴냄), 106-107쪽. <한국 현대사의 비극> 330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그는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지켰다. 무엇보다, 입법 의원을 추진하는 주체가 합작위원회가 아닌 미군정임을 분명히 했다. 합작위는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무리한 선거 일정 때문에, 그리고 합작위가 권한 선행 조건을 무시했기 때문에 실효성 없는 선거가 되고 말았지만, 미군정의 일이었다. 입법 의원이 만들어지는 것을 그는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선거에 대한 공식적 문제 제기에서는 냉소적인 태도를 느낀다. 그는 세 가지 옵션을 제시했다. 선거를 아예 취소하고 전원 관선으로 하는 길, 전면 재선거 그리고 부분 재선거. 앞의 두 가지 옵션을 하지가 택할 리 없다는 사실을 그는 빤히 알고 있었고, 빠져나갈 길로 세 번째 옵션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는 물론 부분 재선거를 택했다. 김규식은 이 선거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미군정이 인정하는 데 만족한 것이다.

실제로 선거는 어떻게 이뤄졌는가. 11월 7일 일기에 인용했던 기사 하나를 다시 본다.

"7할이 기권-전남 대의원 선거"

[광주 31일 발 합동] 입법 의원 선거 전남 당선자는 다음과 같으며 투표 성적은 약 3할인데 그중에도 무효가 약 1할이라 한다. (…) (<자유신문> 1946년 11월 2일자)

인민이 이(里) 대표를 뽑고, 이 대표들이 면 대표를, 면 대표들이 군 대표를, 그리고 군 대표들이 모여 도 대의원을 뽑는 4중 간접 선거였다. 그런데 인민의 투표율이라면 몰라도 군 대표들의 투표율이 3할이라니! 믿기 어려울 정도다. "무효가 약 1할"이란 말 때문에 군 대표 투표율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군 대표로 뽑힌 사람들조차 몇몇을 제외하고는 투표할 동기를 느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선거를 통해 전라남도에서는 한국민주당 후보 4명과 한국독립당 후보 2명이 입법 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날 같은 신문에 실린 담화문에서 한민당은 이 선거가 "대체로 민의를 반영했다 할 수 있"으며 "조선 민족은 확실히 금반 선거에 있어서 그 자치 능력을 확인하였다"고 주장했다. 4중 간접 선거의 최종 단계 투표 투표율 30퍼센트를 놓고 "자치 능력"이라니!

합작위는 11월 8일 각 도에 파견했던 감시원들을 모아 보고회를 열고 서울시와 강원도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하지가 택할 부분 재선거의 대상을 정해준 셈이다.

1. 세대주를 주로 하여 1세대에 5인이나 10인이나 불문하고(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 자로서 동거 가족)세대주만이 투표하여 반(班)의 대표자를 선거한 것.
2. 명륜동에서는 세대주도 나오지 않고 반장이 인장만을 가지고 가서 집행한 것.
3. 선전 삐라 살포에 "서울시 갑 구 선거 대표자 유지 또는 유권자 일동"의 명칭으로서 투표 선전을 한 것.
4. 서울시 총선거일에 선거 장소 내에 선전 포스터를 첩부치 않고 선거장 외에 첩부한 것. 이것을 감시하여야 할 서울시 시장이 이를 감시치 못한 것은 시장의 책임이다.
이상이 서울시 선거에 있어서의 비합법적 요건으로 지적된 바이며 다음 강원도에 있어서는 도의 방침에 의하여 지방 관리가 도내의 각 지구 선거를 관리하기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촉 각 지구 지부장이 입법 의원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이것이 주동이 되어서 선거를 관리하였다. 그러므로 도지사도 이를 관리치 못하게 되었던 관계로 강원도 내무부장 강치봉을 10월 27일에 상경시켜서 하지 중장과 이를 상의하고 귀환하였는데 벌써 선거는 종료되었다고 한다. 강원도에서는 선거의 비합법적인 보고서를 하지 중장에게 제출하였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9일자)

앞에 옮겨놓은 마크 게인에게 한 말을 보면 김규식은 선거 관리 기구를 만들 것을 권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고 군정청 조직이 선거 관리를 맡았다. 그런데 강원도에서는 독촉이 선거관리를 가로맡아 독촉 후보자 세 명만을 당선시킨 것이다. 도저히 선거라고 부를 수 없는 선거였다.

서울에서 제기된 문제는 강원도보다 덜했다. 사실 그 정도 문제는 다른 어느 지방에서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서울 경우에는 한민당 후보 장덕수와 김성수의 친일 문제가 있었고 특히 장덕수 문제가 심각했다. 일제 말기 장덕수의 친일 행위가 너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일파 배제의 기준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앞세우지 못하고 투표의 기술적 문제를 대신 내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울 시장 김형민은 11월 11일 기자단 회견에서 장덕수의 의원 자격에 대한 기자단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서울시에서 피선된 의원 중에는 법령 118호 7항에 저촉되는 자도 있다는 비난이 있는 모양이다. 법률보다 최종 선거에 앞서 모 의원이 학병 권유를 한 사실 같은 것도 자기의 의사로 한 것이 아니고 강제로 부득이한 것이니 참작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제한된 시간과 불충분한 조건 아래 실시한 선거로서는 성과를 얻었다고 믿는 바이며 나는 전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니고 사소한 일도 전부를 미인과 사의해서 결정하는 절름발이 시장에 불과하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는 이 회견을 보도하면서도 장덕수 문제는 싣지 않았다. 한민당에 불리한 내용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나 김형민의 "절름발이 시장" 주장에는 조롱을 아끼지 않았다. 입법 의원과 관계없는 내용이지만 "넘쳐흐르는 분뇨는 누가 치우나?-'나는 책임질 수 없다.'-김 시장의 무성(無誠)한 답변"이란 이 기사가 너무 재미있어서 옮겨놓는다.

"본래 금년 2월에 예산을 세울 때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을 15원으로 정한 것이 인플레로 말미암아 현재는 도저히 예산액으로서는 노동자를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앞서 청소 사무를 각 구정으로 이관하는 동시에 각 동회장의 협력을 안아 동민과 더불어 자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결국은 이 안이 미군 관계자에게 부결되고 말았다. 시장인 나는 절름발이 시장이다. 부결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그 책임도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제2안을 고려하고는 있으나 나는 책임을 질 수 없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12일자)

이 선거는 결국 한민당과 독촉 후보자,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무소속 후보들이 휩쓸었다. 김규식은 서울과 강원도의 상징적 재선거 외에는 이 상황을 묵인했다. 김규식의 이 정도 너그러운 협조가 하지에게는 고맙고 미더웠을 것이다. 그래서 김규식이 주도하는 조미공위가 한 달 남짓 기간 동안 경찰, 친일파, 통역 정치 등 기반 문제들을 해결은 못했을지언정 제기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입법 의원의 관선 의원 선출에도 한민당과 이승만의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합작위 의견을 존중해서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가능했다.

남한 신문 읽기에 바쁘다 보니 11월 3일 있었던 이북의 인민위원회 선거를 놓쳤다. 다음 주에는 그 얘기를 좀 해야겠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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