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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혼쭐이 난 조병옥과 장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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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잠깐 혼쭐이 난 조병옥과 장택상

[해방일기] 1946년 11월 2일

1946년 11월 2일

10월 16일 결성된 각 정당 시국대책간담회에는 남로당준비위 쪽 좌익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제외한 주요 정당들이 모두 참가했다. (한국독립당(한독당)은 며칠 후부터 참가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소요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있는 '시국'에 대한 우려 때문에 대화와 협력의 필요성이 부각된 결과다.

같은 우려 때문에 예상 못했던 형태의 모임 하나가 또 생겼다. 10월 23일에 첫 회의를 가진 조미공동 소요대책위원회(조미공위)다. 조선인과 미국인이 대등하게 참여하는 고위 회의가 미군 진주 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제안을 하지 사령관이 받아들여 만들어진 이 회의는 확실한 제도적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었지만 미군정 최고위 인사들이 중도파 지도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진 모처럼의 계기였다. 김규식이 10월 25일 이런 담화를 발표한 것은 극우파가 촉각을 곤두세운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지난 23일 덕수궁에서 좌우합작위원회 대표와 미군정 요인과의 회동은 남조선 소요 사건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참극을 눈앞에 보고 이의 긴급한 해결책을 민족적 입장에서 미군정당국과 隔意없이 토의하기 위하여 나의 제안으로 모이게 된 회담이며 일정한 명칭 하에 된 조직체는 아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모든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수시로 이러한 회담을 할 것이다. 이것이 무슨 공동위원회 운운하여 고정적인 조직체를 결성한 것같이 보도된 것은 착오이므로 이를 해명하여 둔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26일자)

그 이튿날 조미공위의 성명서가 하지를 대리한 브라운 미소공위 수석대표와 합작위 주석 김규식 여운형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조미공위의 미국 측 대표가 대부분 미소공위 대표단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브라운이 미국 측 실질적 수석대표였던 셈이다.

합작위원회의 위원과 미군 측 대표들로 조직된 조선공동회담은 매일 덕수궁에서 개최 중인데 동 회의에서는 최근 남조선에서 야기한 소란의 원인을 구명함에 있어서 동 회담에서 토의할 개괄적 사항을 결정하였다고 금일 발표되었다. 즉 토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차등 문제를 합리적으로 속히 조사하기 위하여 동 회담에서는 이러한 원인을 삼대별로 구별하게 되었다.

1. 소란의 윈인 중 개인들을 사건에 유도한 원인
2. 경제 곤란 문제를 포함하는 사항
3. 정치 문제의 영향 (…)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10월 27일자)

'소요 대책'의 이름 아래 이 위원회는 광범위한 사안들을 토의 대상으로 삼았다. 인사, 경제, 정치의 세 방면으로 구분했는데 인사 문제에는 (1) 경찰 문제, (2) 군정청 내의 친일파 문제, (3) 통역관 문제, (4) 관리의 부패 문제, 그리고 (5) 선동자 문제가 제시되었다. 선동자 문제를 제하면 모두 미군정 측의 문제였다.

조선인의 민의가 공식적으로 폭넓게 제기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8개월 전에 만들어진 민주의원이 이런 역할을 전혀 맡지 못하고 있던 것과 비교하면, 합작위가 비록 선출된 기구는 아니라도 조선 인민을 실제로 대표한 측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도 식량 문제를 비롯한 의제들이 의욕적으로 설정되었다. 김규식을 앞세운 합작위원들은 '소요 대책'을 빌미로 '국정 감사'를 요구한 셈이었다. 미군정이 이 요구에 응한 것은 상황이 다급하기 때문이었다. 11월 초까지 거의 매일 회의가 열린 것으로 보이고, 조병옥과 장택상 그리고 미군정 고위 인사들까지 요구에 따라 출두했다. 이 조미공위가 조선인들의 어떤 여망을 모았는지 보여주는 기사 하나가 우연히 눈에 띄었다.

"여의(女醫) 구타한 경관 탄핵 - 여의전 동창회서 각 방면에 항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동창회에서는 성모병원 김근선 여의가 지난 번 경무총감 장택상 씨 피격 당시 치료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경관에게 구금되었던 사건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김 여사의 잘못된 사실이 없음이 판명되었으므로 동회에서는 당시 구타한 경관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는 탄핵서를 22일 군정장관 경무부장 검사총장 조미공동위원회에 각각 제출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6년 11월 24일자)

장택상 피격이라 함은 11월 13일 아침 출근길 장택상의 승용차에 괴한이 수류탄 두 개를 던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14일자의 이 사건 기사 끝에 "장택상 총감이 상처를 받고 곧 부근 성모병원에 응급수단을 청하였을 때 동 병원 여의사 김모(30)는 '우리 병원은 내과라 외과는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거절하였으므로 의사로서의 사명을 몰각한 데 대하여 방금 수도청에 인치하고 취조 중이다" 한 대목이 있는데 잘못이 없다는 사실이 그 사이에 밝혀진 모양이다.

장택상 참 웃기는 사람이다. 이마에 찰과상을 입었다는데 의사가 치료 안 해준다고 두들겨 패고 경찰서에 끌고 가다니. 의사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회적 존경을 받던 시절인데…. 호위 오토바이까지 붙은 출근차 안에는 딸 둘이 함께 타고 있었다는데 그 애들은 무슨 공무가 있었던 것인지. 호위 오토바이를 몰다가 중상을 입은 순경과 범인을 체포한 순경은 당일 부로 각각 경위와 경사로 승진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46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도 참 대단하다. 14일자 위 기사에는 시민의 이런 목격담이 붙어 있었다. 장택상이 병원으로 뛰어가면서 권총을 빼어들고 있던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목격하였는데 張 총감은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도 태연한 태도로 부하들의 부상을 구급하기 위하여 권총을 빼어들고 부근 성모병원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황급한 가운데도 불구하고 부하를 생각하는 그 용감하고도 정중한 태도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격하였다."

11월 2일 수도경찰청 출입기자단이 장택상에게 항의서를 제출했다.

"(…) 이즈음 총감 휘하의 일부 경찰관은 그 표방하는 바 민주경찰이란 본분을 잊어버리고 이 선량한 민중의 검문 취재에 있어 함부로 구타와 폭언을 쓰고 그나마 같은 민중이자 민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지닌 신문기자에게 까지 횡포한 기색이 농후하여 앞서는 합동통신사 사원과 대동신문사 기자 3씨가 종로서원에게 애매한 구타를 당하였고 근자에는 조선일보사 기자 모씨가 영등포서원에게 불법한 타박상을 입어 급기야 진단 고소까지 제소케 된 사태에 이르러서는 실로 언어도단 오히려 개구아연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이즈음 총감 휘하의 경찰 행정면에 나타난 기이한 현상은 바로 왜정 경찰 때는 원래가 우리의 애국자란 애국자를 모조리 멸종시킬 악독한 식민 정책을 썼으니까 의례히 흉악스러운 음모의 기밀도 있었으려니와 정당적 색채와는 떠나서 중립을 엄수하여 오로지 치안 확보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오늘의 조선 경찰에야 특수 경찰 기밀 이외에 무슨 비밀인들 있겠기에 근래에 와서는 마치 극단의 기밀정책이나 세운 듯이 (…) 마치 경찰에 기자는 필요 없다는 양 매우 존대오만함이 날로 심해짐에는 오히려 타기할 바가 있습니다.

(…) 이상 말한 전자는 바야흐로 인권 유린의 위험신호이오 후자는 무서운 독선 행정의 전조임을 솔직히 지적합니다. (…) 비록 영남 사건에서 온 경찰관의 복잡한 심기는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총감께서 특히 인권을 존중할 것과 명랑한 경찰 행정을 기할 것을 누누이 언명 강조하여 온 데도 불구하고 전술한 바와 같이 별로 탓할 점도 없는 민중을 구박하고 행정에 대한 민중의 눈을 감기려는 비민주적 경찰 현상을 눈앞에 보고서는 민중과 더불어 총감의 지도정신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민중과 더불어 경찰 강기가 이완되었음을 통탄하는 동시 민중과 더불어 공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에 우리는 민중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근래의 비민주적 경찰현상을 즉시 시정하기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당면 조치 조건을 제의하오니 총감의 영단과 강력한 실천이 있기를 기대하며 엄숙히 항의합니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6년 11월 03일자)

장택상이 수도경찰청을 맡은 지는 1년이 넘었다. 전에 없던 이런 강경한 항의가 나온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편으로는 소요 사태로 인해 경찰의 태도가 더욱 악화된 면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을 견제할 주체로 조미공위가 나타난 까닭도 있었을 것 같다.

장택상은 납작 엎드렸다. 4일에는 휘하 경찰에게 "수도청 출입기자 제씨에 대한 각서 직원의 태도는 통탄할 바가 있다. 자금 이후로는 언제든지 출입 자유에 대한 보장을 청장 자신이 기약하였으니 각 직원은 지실(知悉)할 사"란 명령을 내리고(<동아일보> 1946년 11월 5일자) 5일에는 기자단 정례회견에서 개선을 약속했다.

이즈음 경찰관들이 민중의 검문 취체에 있어 함부로 폭행과 폭언을 하는 사례가 많아서 제1경무총감부 출입기자단이 앞서 항의한데 대하여 장 경무총감은 기보한 바와 같이 이에 관하여는 충분히 주의하여 일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게 하겠다고 성의 있는 답변을 한 바 있었거니와 5일 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는 다시 이것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떠한 민중에게든지 폭행 폭언을 한 경찰관이 있으면 어디서 누가 왜 그랬다는 사실을 민중이나 여러분 기자들이 자세히 알려주는 대로 엄중한 처벌을 하겠다. 다만 민중 측에서도 치안을 위하여 생사를 무릅쓰고 직무에 충실한 경찰관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태도를 삼가서 정당한 검문 취체에는 국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점잖게 응하여 주기 바란다. 그리고 고문을 한 사실이 있을 때에도 알려주는 대로 엄중히 처단할 터이다."

요즈음 경찰이 피검자에 대하여 물을 먹이고 곤봉으로 때리는 등 고문이 있다고 하는데 장 총감은 5일 다음과 같이 고문경관의 일소를 언명하였다.

"말단에 있어 4~5퍼센트의 고문이 있었고 다소간 폭행도 있었으나 이런 경관은 적발하는 대로 엄벌에 처하였다. 더구나 물을 먹이는 등의 횡포한 경관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자세히 성명을 통지하여 주기만 하면 조사하여 단호 엄벌에 처할 방침이니 일반은 그리 알기를 바란다." (<조선일보> 1946년 11월 6일자)


이 무렵의 신문 기사 하나를 보고 갸우뚱했던 것이 있다.

8일 경무부에서는 조 부장을 위시하여 무장경관 50여 명이 강원도 강릉 지방으로 향하여 떠났으므로 동 지방에 어떤 중대 사건이 발생된 것처럼 추상된다는 것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9일 경무당국의 말에 의하면 강릉 지방 산속에 많은 폭도가 잠복하고 있다는 말은 일종의 유언(流言)이었으므로 아무런 일도 없이 당일로 돌아왔다 하며 조 부장만은 기위 출장한 김에 강원도를 순시하고 4~5일 후에 돌아올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10일자)

그 전날 기사에 따르면 "완전히 무장한 경관 50명이 8일 오후 3시30분 김포비행장 발 공로로 급거 강릉으로 향하여 출발"했다고 한다. 산속에 폭도가 있다 해서 경관 50명이 비행기로 강릉에 가? 50명 출동하는 데 경찰 총수가 따라가? 헛소문으로 판명된 후에는 경무부장 혼자 간 김에 며칠 돌다가 온다고?

이해되지 않는 점이 여러 가지였다. 그런데 조미공위의 흐름을 살피다 보니 이해가 간다. 조병옥은 조미공위 출두를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미공동회담에서 경찰 인사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이때 김규식은 5일 미인(美人) 경찰부장 맥그린과 장시간 경찰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하였다 하는데 동 씨는 금후 조병옥 장택상과도 회견할 예정이라 한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7일자)

피한다고 피해질 수 없는 출두였다. 11월 18일 군정청 공보부를 통한 조미공위의 발표가 이렇게 나왔다.

지난 주일에 개최된 조미공동회담은 주로 경찰 행정 문제에 관한 토의로 시종하였다. 이 회담에 출석한 사람은 경찰부장의 미국인 고문관 맥그린 대좌 경찰부장 조병옥 박사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씨 수사국장 최능진 씨 등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시작된 지 겨우 1년 만에 조선 전부를 통할하고 있는 조선의 신경찰의 건설, 조직 및 확충 등에 관하여 토의한 바 있었다.

이 회담에서 경찰력의 약점과 역량을 알게 되었다. 이 토의에서는 경찰력 확충에 있어서 봉착한 제1 난문제의 하나는 신입 경찰관들로 하여금 공평하고 위신 있게 인민을 취급하도록 교육시키는 것이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맥그린 대좌는 경찰로 하여금 대외적으로서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정의와 공평을 엄수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책임이라고 말하였다.

대좌는 자기가 전 경상북도경찰부장의 파면을 명령하였는데 그것은 해 경찰부장이 직원채용에 있어서 우익 사람만으로 국한한 까닭이었다고 한다. (…) 예비 검속 문제에 관하여는 출석자들은 심심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표명하였으며 국가 안전이 보장되는 한 인민의 자유에 대하여도 좀 더 강력한 보호 방침을 실시하여 주기를 희망하였다.

경찰부장 조병옥 박사는 민주주의 경찰 제도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봉착하는 여러 가지 난점을 들어 설명하였으며 민주주의 경찰 제도 수립에 있어서의 자기의 책임은 대부분이 집단 교육의 특성을 살려 나가는데 있다고 설명하였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씨는 경찰력의 운용과 원리에 관한 여러 질문에 답변을 하였는데 동씨는 단언하기를 자기는 경찰 내에서의 당파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며 따라서 경찰력 행사에 있어 정당 단체를 이용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또 그러한 것을 허가한 일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씨는 경찰에서 고문을 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부언하였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6년 11월 19일자)

조미공위의 활동은 입법의원 개원 전까지 계속되었다. 조미공위의 건의에 대한 하지의 성명이 12월 5일 발표되었으니, 아마 그 며칠 전 건의서를 제출함으로써 본격적 활동을 마감한 것 같다. 10월 26일 성명서에서 지적한 인사 문제 5개항이 12월 초의 건의서에도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문제가 무엇인지는 애초부터 분명한 것이었다. 그 문제들을 확인하고 미군정 측을 설득한 것이 조미공위가 한 일이었다.

"조미공위의 건의에 최대 개선과 대책 강구 - 하 중장 성명"

조미공동위원회에서는 남조선 사건 급 기타 문제에 대한 토의가 있어서 그 결과로 구체적 안이 작성되어 이를 하지 중장에게 건의한 바 이에 대하여 하지 중장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가 작일 공보부로부터 발표되었다.

"朝美共同會談에서는 최근 남조선에서 발생한 소요사건의 발생 원인에 관하여 조사하여 오던 바 이번 회의안중 최초 5조목에 관하여 결정된 바 있어 본관에게 건의되었는데 (1) 경찰에 대한 원한, (2) 군정청 내 전 친일파의 잔류, (3) 군정청 내 통역의 영향, (4) 어떤 조선인 관리의 부패, (5) 조선의 복리에 반대하는 선동자 등인데, 나는 여사한 조사를 수행한 성의와 열의에 대하여 기뻐하는 바이며 또한 최근 남조선에서 발생한 소요사건에 내포된 근본 요인을 잘 구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장시간에 걸쳐 각 방면의 관계자를 초청하여 보고를 듣고 토의한 공동회담 위원 제씨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현재 본관은 동 회담에서 제출한 일부적 결정과 건의를 검토 중이나 기중에 대부분은 벌써 조치를 강구한 件들이다. (…) 본관은 아직도 공동 회담의 기타 제안을 심의중이며 그 제안을 기초로 하여 대체로 조선인의 복리에 있어서 최대의 개선 대책을 강구할 것이다.

본관은 우리가 모두 바라며 또 가까운 장래에 수립을 독립된 통일 조선의 장래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 측 대표들과 애국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일하고 있는 합작위원회 위원 제씨에게 거듭 감사의 의(意)를 표하는 바이다." (<자유신문> 1946년 12월 6일자)

6단에 큰 기사의 모퉁이에 수사국장 최능진을 면직시키는 "군정청 발령"이 붙어 있다. 1946년 2월 11일자 기사에서 소개했던 최능진은 조병옥에 당당히 맞서고 있던 인물이다. 조병옥, 장택상과 함께 조미공위에 출두해서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다 했던 모양이고, 그 결과가 면직이었다. 조미공위 건의에 대한 하지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조치다.

최능진의 면직 발령 옆에는 경무부 고문 매글린 대령의 해명이 붙어 있다.

최 수사국장의 면관은 별항 하지 중장 성명과 여(如)히 친일 경관 숙청과는 전연 별개의 것이고 그간 조 경무부장과 경찰 운영에 대한 의견의 상위(相違)로 어느 정도 감정문제에까지 파급된 일도 없지 않아 조 부장은 지난 5월부터 그의 사직을 권고하였으나 나 자신은 경찰 운영의 초창기인 것을 생각하여 피차 협조하기를 지시하였으나 지난 번 10-1사건에 또 다시 충돌이 있어 다시 그의 사직설이 대두되었으며 그의 태도는 경찰당국의 명령체계상 용납되지 않아 드디어 그의 면관을 보게 된 것이다.

서중석은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461쪽에 최능진의 면직에 관한 주를 붙였다.

조미위원회 회의 종료 후 조병옥은 최능진에게 사임을 요청하였고, 이것이 거부되자 바로 파면하였다. 최는 조-장 두 사람이 경찰행정을 한민당의 책동에 의하여 자행하여 왔으며, 그들이 매야(每夜) 요정 향략에 탐닉했고, 부정 경찰관의 도량을 조장하였다고 주장하고, 조병옥 이하 부정 경찰관의 총 퇴진을 요구하였다. 그는 일제 때 고등계 주임이었던 최운하 사찰과장 같은 자들에게 검거 투옥된 애국자가 많다고 개탄하였다. (주 168)

조미공위의 조선인 위원들이 조병옥과 장택상의 숙청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은 같은 책 같은 쪽의 다른 주에서 알아볼 수 있다.

조 경무부장 인책 파면 요구에 미국 측은 조병옥 대신 장 수도청장의 인책을 대안으로 제기하여 표결 결과 10(한국인 측) : 10(미군정 측)이 되어 그 결정은 하지의 최종 결단으로 미루어졌다고 한다. (주 166)

이듬해 5월 미소공위 재개를 앞둔 시점까지도 김규식과 안재홍은 조병옥과 장택상의 해임을 미군정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중도 좌, 우파는 전반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한 계기로써 미소공위 재개를 크게 환영하였지만, 미국 입장을 지지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브라운은 김규식과 안재홍에게 협조를 부탁했지만, 김규식과 안재홍은 먼저 미군정에서 조병옥과 장택상을 해임할 것을 요청했다. 미군정으로부터 번번이 정치-사회적 개혁 요청을 거부당했던 김규식과 안재홍은 정계 은퇴 의사를 내비치며 브라운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정용욱 지음, 중심 펴냄), 215쪽)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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