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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에 맞은 육영수 여사, DJ의 불길한 예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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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총에 맞은 육영수 여사, DJ의 불길한 예감은…

[김대중 평전 '새벽'·17] "아무래도 감옥에 가야겠습니다!"

"아무래도 감옥에 가야겠습니다!"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 갇혔다. 경찰은 납치 사건 범인을 잡겠다며 팔을 걷었다. 그러나 이내 수사의 과녁이 바뀌었다. 김대중의 해외 활동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대통령의 지시로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범죄를 누가 밝히겠는가. 집 주위에 경찰 초소가 일곱 군데나 설치되었다. 평소에는 200~300명, 비상시에는 3000명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누군가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집'이라고 했다.

정치인에게 연금은 잔인했다. 정치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인데 사람과의 접촉이 끊겼으니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훗날 김대중이 군부에 의해 가택 연금을 당하고 있던 버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누구보다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연금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날마다 침실에서 양복을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맨 다음 서재로 나왔다. 일종의 출근이었다. 그리고 줄곧 서재에 머물다 해질녘에는 다시 침실로 퇴근했다. 정신적 고통을 이겨보려는, 자꾸 가라앉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안간힘이었다.

해가 바뀌어도 연금은 풀리지 않았다. 누구도 찾아오지 못했고 누구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때로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해가 지기도 했다. 그때의 침묵은 너무도 무거웠다. 김대중을 자꾸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자택 연금 중에도 국가 기념일은 꼭 챙겼다. 식구들과 비서, 집 안의 일꾼들을 모아놓고 기념식을 가졌다. 국민의례를 하고 기념사를 했다. 의식은 진지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김대중은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에게 엄격했다. 집 안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기념일의 의미를 설명하며 세상에 합류했다. 그런 노력으로 김대중은 무너지지 않았다.

각계의 민주화 욕구가 거세게 분출하고 있었다. 야당은 '헌법 개정 청원 운동 본부'를 결성하고 서명 운동에 돌입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 긴급 조치 1, 2호를 선포했다. 장준하, 백기완 등 개헌 청원 운동의 주역들이 끌려갔다. 그들은 일반 법정이 아닌 비상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그해 2월 고향 하의도에서 부음이 올라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간 병환이 위중하여 몇 번이나 고향에 가려 했지만 연금이 풀리지 않았다. 저들은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게 막았다. 아버지는 끝내 김대중을 보지 못하고 땅에 묻혔다. 저들은 김대중이 나타나면 시위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었다. 아버지는 남녘 섬에 누워있고, 자식은 서울에서 통곡했다. 천추의 한이었다.

광복절 29돌 기념식이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행사였다. 박정희가 축사를 시작한지 5분쯤 지났을 때였다. 식장에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를 겨냥한 총탄은 연단을 벗어나 육영수 여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범인은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었다. 육 여사는 병원에서 숨졌다.

내가 보기에 당시 김대중은 육 여사를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박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 알게 모르게 육 여사의 덕을 많이 봤다'고 평가했다. 육영수의 부드러움이 있기에 박정희의 차가움이 엷어졌음을 지적한 말이다. 김대중은 '육 여사가 없는 청와대'를 떠올렸다. 불길하기만 했다.

연말에는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이 일어났다. 기자들이 자유 언론 실천을 다짐하고 반정부 시위 등을 보도하자 정부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광고를 해약토록 했다. <동아일보>는 광고 없이 신문을 발행했다. '백지 광고'였다. 백지 광고는 독재의 만행을 폭로하는 또 다른 광고였다. 그러자 시민들의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지는 격려 문귀로 채워졌다.

"자유 언론 만세" "민족의 새벽은 옵니다" "우리는 너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독자들은 기사보다 광고를 먼저 읽었다. 김대중은 백지 광고 사태가 발생하자 곧바로 격려 광고를 냈다. 연금 상태라서 비서 김옥두를 보냈다. 광고료와 함께 친필로 광고 문안을 써 보냈다. 격려 광고 1호였다. 1975년 1월 1일자 8면에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란 명의로 게재되었다.

'언론 자유는 우리의 생명이다. 그것 없이는 인권도 사회 정의도 학원과 종교의 자유도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국가 안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 자유는 민주주의의 혼이요 모든 소망의 근원이다. 이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절대적 의무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동아일보>의 백지 광고 란은 권력의 음모와 오만의 단적인 증거이며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활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학생들의 시위가 갈수록 거셌다. 그러자 박 정권은 1975년 5월 13일 긴급 조치 9호를 선포했다. 유신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거나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했다. 이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했다. 유언비어를 날조·유포시키거나 사실을 왜곡해 말하는 것도 처벌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유신헌법이 최악의 반민족적, 반시대적 악법이라고 내외에 선전한 셈이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를 제안했다. 그 결과를 자신의 신임과 연계했다. 유신 체제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사기극이었다. 정부는 국민 투표 결과 79.8퍼센트 투표율에 73.1퍼센트가 찬성했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는 이것이 국민의 뜻이니 다시는 체제에 도전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긴급 조치로 구속된 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했다. 김대중에게도 가택 연금을 풀었다.

긴급 조치 정국에서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 박정희와 신민당 당수 김영삼이 단독 회담을 했다. 그 악명 높은 긴급 조치 9호가 발동한 지 1주일 만이었다. 두 사람은 배석자 없이 만났고 회담 내용은 일체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비밀 회담이라 불렸다. 회담 이후 김영삼은 대정부 투쟁 수위를 현저히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시중에 온갖 의혹이 나돌았다. 김영삼이 박정희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았다는 설, 차기 대권을 약속 받았다는 설 등이 그것이었다. 이런 의혹에도 김영삼은 말이 없었다. 당수가 이럴 정도이니 야당의 존재가 참으로 하찮았다.

박정희의 긴급 조치는 이 땅에서 희망을 거세해 버렸다. 모든 분야에 살기(殺氣)가 스며들었다. 지식인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자기 검열에 걸린 자신을 발견하고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긴조(긴급조치) 세대' '유신 세대'라 비하했다. 머리카락이 길어도, 치마가 짧아도 잡혀갔다. 노랫말이 조금만 이상해도 금지곡이란 딱지를 붙였다. 학생들은 고개를 숙였고, 부모들은 먼 산을 보았다. 허무와 체념 그리고 탄식이 번졌다. 서로의 눈치를 보며 비굴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박정희 이름 뒤에 존칭을 생략하면 국가 원수 모독죄로 끌려갔다. 공권력은 거대한 폭력에 불과했다. 눈을 부릅뜬 채 국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민 모두가 병영 국가의 병사가 되어갈 뿐이었다. 그런데도 야당은 보이지 않았다.

김대중은 깊이 고민했다.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었다. 시대의 양심을 깨울 방법을 모색했다. 다시 일어나 외치고, 다시 감옥에 가기로 했다.

ⓒ프레시안(손문상)

김대중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살아있음을 알리기로 했다. 3·1절을 택해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김수환, 정일형과 긴밀히 상의했다. 그때 정일형의 부인 이태영으로부터 재야 인사들도 모종의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문익환 목사가 주도하고 있었다. 문익환은 성명서 초안을 만들어 안병무 등 재야 인사들과 협의했다. 문익환은 사람들을 만나고 종일 문안을 구상하며 그 일에 매달렸다. 그걸 지켜보며 부인 박용길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우리 문 목사를 보면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발이 땅에 붙지 않고 떨어져 다닌다."

문익환은 국내 처음 신구교가 참여하는 공동성서번역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 만주 용정에서부터 친구였던 장준하의 의문사 소식을 접하고 통곡했다. 문익환은 타살을 확신하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군 장교 박정희가 광복군 간부 장준하를 살해했다."

문익환은 성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예수의 말씀은 거리에 있었다. 이후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벌였다. 3·1 구국 선언문 사건은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문익환은 제자이며 선교교육원 수석연구원인 김성재를 불러 자신의 결심을 밝히고 도와 달라 했다. 김성재는 김대중과 문익환 간의 연락을 맡았다. 두 사람은 정보 당국에 의해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었다.

김대중과 문익환의 성명서 초안을 받아든 김성재는 깜짝 놀랐다. 내용이 거의 같았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군사 독재의 반민주, 반민중, 반통일을 통렬하게 질타하고 있었다. 다만 재야 쪽 성명서 초안에 일부 표현이 과격하고, 이는 탄압의 빌미를 줄 수 있으니 조정하자고 했다. 김성재는 거인들의 교감을 지켜보며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역사의 맥박이었다.

선언문은 '한복'이라는 암호로 서로에게 건네졌다. 김대중이 목동 이모집(이희호의 동생)에 한복을 맡기면 김성재가 그것을 찾아와 재야 인사들에게 전했다. 재야에서 수선을 마친 한복은 다시 이모집에 전달했다. 그러면 동교동 비서 김옥두가 찾아갔다. 마침내 한복이 완성되었다. 민주주의 회복, 자주적 경제 정의 실현, 민족 통일을 골자로 한 구국 선언문이 탄생했다.

김대중은 명동성당을 찾아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제가 감옥에 가겠습니다."

추기경은 말이 없었다. 김대중의 손을 잡았다. 현실은 절망이었지만 맞잡은 손이 희망이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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