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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과 아시아'라는 글이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능한 문명을 탐구한 글입니다.
그러나 다케우치는 아시아의 문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직접 주장하기보다 문명됨의 조건을 따져 묻습니다. 이를 위해 서양의 문명일원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서양의 문명일원론을 직접 겨냥하기보다 거기에 기대고 있는 일본의 문명관을 해부하러 나섭니다.
제가 다른 말로 풀어내기보다는 인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의 도입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문명일원론이란, 역사는 미개에서 문명으로의 일방통행이라는 역사관을 축으로 하여 세계를 해석하는 사상이다. 문명이란 어떤 본질적인 힘이고 정관사처럼 불리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 문명이 야만을 향해 침투해 들어가는 자기 운동의 궤적이 역사다."
여기서 '정관사'라고 표현한 까닭은 문명의 귀속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었겠죠. 즉 기존의 문명은 서양의 것입니다. 제 말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관계는 비대칭적입니다. 서양은 경계 지어진 영토상의 명칭이지만 비서양으로 뻗어나가며 운동합니다. 서양은 하나의 특수로서 다른 특수와 대립하지만, 다른 특수들(동양)이 자신을 인식할 때 보편적 준거점으로 기능합니다.
이 인식론적 구도에서 동양의 근대화는 서양화의 양상을 띠며,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는 문명적 격차로 번역됩니다. 그처럼 동양의 근대화는 다케우치가 말한 '문명일원론'으로 흡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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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자와 유키치. ⓒ프레시안 |
"후쿠자와 문명론의 특징은, 문명의 본질과 관련해 지를 덕의 상위에 놓았다는 점 그리고 지덕의 총화인 문명(그것은 단일하고 등질한 것이다)의 지역에 따른 발현의 차이를 인정한 뒤 그것을 정도의 차이로 파악하고 노력에 의해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는 후쿠자와를 단죄하려고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후쿠자와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자 후쿠자와의 문명관을 거론한 것입니다. 후쿠자와가 '사상가'로 살아갔던 시기는 일본이 식민화의 위기에 직면한 시대였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도모해야 할 절박한 상황 속에서 후쿠자와의 문명사관은 시대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문명은 수단으로 삼는다는 전제 아래 후쿠자와의 문명사관은 내적 긴장으로 충만했습니다. 즉, 사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케우치가 판단하기에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며 나라 독립의 기초가 다져진 후 후쿠자와의 내적 긴장은 사그라집니다. 다시 다케우치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인접국의 개명을 기다려서 함께 아시아를 부흥시킬 여유'가 없기 때문에 '아시아 동방의 악우를 사절한다'는 긴박한 요구가 소멸해 '악우를 사절하는' 것이 독립과 관계없이 목적화되고 '아시아를 일으키는' 쪽은 이 목적에 종속되게 되었다. 좀더 나아가서는 '악우를 사절'했던 것을 넘어서 아시아에 군림할 수 있고, 게다가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되는 것이 '아시아를 흥기시키는' 것과 하나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자신(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이 국가의 사상으로서 실현되고 정착되었으니 사상가는 사라진다."
그리고 이후의 역사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은 '탈아'를 거쳐 '흥아'로 되돌아왔지만 아시아를 인식하는 능력은 후쿠자와보다 감퇴되었다고도 진단합니다.
아울러 다케우치 요시미는 역설합니다.
"문명의 부정을 통한 문명의 재건이 아시아의 원리이며 이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아시아다."
아시아는 문명일원론에서 벗어나 스스로 가치 체계를 수립해 문명을 개척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케우치는 이를 위해 후쿠자와의 문제의식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후쿠자와가 후퇴한 지점에서 후쿠자와를 계승하는 것은 진정한 계승일 수 없으니 후쿠자와의 정신이 내적 긴장으로 충만했던 시기로 돌아가 그의 '문명론'을 다시 고찰하자고 제안하고는 글을 끝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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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의 편지에서 저는 사상의 가치를 지닌 동아시아론과 그렇지 못한 동아시아론을 가려내자고 제안하며, 그 작업의 사상사적 기준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담론의 추이를 생명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동아시아론의 생명력에 관해 위기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감각을 표현하기에 능력이 부족해 '일본과 아시아'를 길게 언급했습니다.
물론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한 사상가와 담론이라는 집단 지성의 산물을 같은 방식으로 대할 수 없으며, '문명'론과 '동아시아'론을 다룰 때는 다른 섬세함이 요청될 것입니다. 이 또한 "다를 것이다"라며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언젠가 탐구해봐야 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제가 '생명 과정'이라고 표현한 대목만을 좀 더 풀어놓고자 합니다.
기성의 정신세계가 균열된 자리에서 새로운 사상(집단적으로는 담론)이 출현합니다. 사상은 그 균열을 자신의 내적 모순으로 전환시켜 성장을 꾀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환경과 마찰하며 형체를 갖춰갑니다. 그러나 사상은 언젠가 쇠퇴합니다. 자기 안의 내적 모순이 시드는 때가 다가옵니다. 내적 모순이 가라앉으면 안정이 도래하고, 지속의 나날 속에서 사상은 굳어갑니다. 그것은 담론 역시 그러하며, 동아시아론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병한 님은 사상사적 가치에 값하는 동아시아론이라면 자기 쇄신을 통해 생명을 이어나갈 테니 지켜보자고 말씀하셨지만, 제게는 그런 긴 안목이 부족한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의식을 우리의 대화에서 한 축으로 가져가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론에 관한 내적 비평에 나설 계획입니다.
이때 비평이란 가치를 평가하거나, 상이한 관점이 충돌할 때 판단하는 역할을 맡는 비평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가치들과 상이한 관점들이 성립할 수 있는 지평 자체를 되묻는 비평을 뜻합니다. 동아시아론에 스며들어 있는 담론의 의지를 밝혀내고 담론공간의 구조를 해부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위해 이병한님과 저 사이에서 강한 시차(視差)가 만들어지는 것도 좋은 일이겠죠. 보내주신 글을 읽고 좋은 대화 상대자를 얻었구나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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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관점의 차이로부터 논점이 빚어지는 동시에 서로의 문제의식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지금 이병한 님은 미국에 있는데, 한국에서 만난 적은 몇 차례 되지 않으며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잘 모른다는 조건을 논의의 자원으로 삼아야 하겠지요.
이병한 님이 물어본 동아시아에 관한 저의 실감과 체험은 이 맥락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당장은 동아시아론을 처음 접했던 시기에 있었던 세 차례의 연구 모임 경험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체험이라면 2004년에 연구 공간 '수유+너머'에서 사흘간 이어졌던 '동아시아 지식인 회의' 워크숍의 광경이었습니다. 광경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까닭은 당시 문외한인 저로서는 그 회합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언어가 뒤섞이는 묘한 분위기 탓이 컸겠지요.
그때 오고간 내용은 지식이 부족해 말로서 정리하지는 못하겠지만, 저로서는 언어화 이전의 문제, 문화와 국적의 간섭이라는 문제 영역을 접한 계기였습니다. 열띠고도 무거운 토론 가운데 서로 다른 발화 위치가 드러났고 현장에서 발언하려면 자신의 무언가를 걸어야 했습니다. 호기심이나 지적 욕구에서 출발하는 공부와는 질감이 전혀 달랐습니다. 상황 속으로 내던져져 자기 지식의 감도를 끊임없이 시험해야 했습니다.
그 회합 이후로 저로서는 동아시아라는 말에 입체감을 안긴 두 차례의 연구 모임이 있었습니다. 두 모임은 시기적으로 연속해 있어서인지 제게는 둘이 하나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2005년 11월 서울대에서 '계속되는 동아시아의 전쟁과 전후-오키나와전, 제주 4·3 사건, 한국 전쟁'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오키나와 전투, 제주 4·3 사건, 한국 전쟁의 연속성을 짚어나가면서 태평양 전쟁과 식민지 해방의 전후(前後)로 이어져 있는 폭력의 연쇄를 탐색했습니다. 전전과 전후(戰後)의 연속성을 주장하고, 그것을 한국과 일본의 주변부인 제주와 오키나와의 경험을 통해 조명하는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이 심포지엄에는 주로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참가했는데, 말은 잘 섞이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저 세 가지 사건에 모두 관여했던 '미국'의 존재감이 뚜렷했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이쪽에는 이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제주를 포함한 한반도와 오키나와에 안긴 상흔은, 그날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서로를 마주볼 수 있는 매개로 작용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동아시아론의 한 면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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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있었던 도쿄의 워크숍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2006년 1월에 세이케이 대학에서는 '동아시아의 역사와 주체를 생각한다'라는 워크숍이 열렸습니다. 논의는 사흘간 이어졌죠. 첫째 날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인식론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둘째 날은 중국 혁명의 경험을 어떻게 동아시아 공동의 유산으로 받아 안을 것인지가 주제로 놓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자이니치 문제가 다뤄졌습니다.
여러 사건이 있었고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을 안겼던 워크숍이었지만, 마지막 날만을 가지고서 말하자면 그때의 분위기는 서울에서 열렸던 자리와는 몹시 달라서 격정적인 논의가 오갔으며 일본 측 연구자들과 한국 측 연구자들은 각기 다른 난처함에 처했습니다(이는 또한 개인마다 달랐겠죠). 서울의 화기애애한 자리와는 달리 이날 자이니치의 존재는 일본과 한국이 그렇게 쉽사리 마주볼 수 없음을, 마주보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응시의 시선에서는 누락되어 그늘진 자리로 남는 영역이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앞서의 한국-일본-미국의 삼 항이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에게 연대의 여지를 넓혀주었다면, 자이니치-한국인-일본인의 삼 항은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에게 국경을 넘는 행위란 절실히 요청되는 동시에 간단히 성사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든 생각입니다만, 셋째 날의 격정과 비교하건대 둘째 날의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도 오히려 무언가 함의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둘째 날 발표자의 문제의식은 어쩌면 셋째 날 토론된 내용과 그다지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처럼 다른 반응이 나왔던 까닭은, 아마도 중국을 이해한다는 버거움 때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것은 이제야 제게는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앞으로 곰곰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무튼 그 두 차례의 연구회에서 지역과 국가, 그리고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지역>국가>사회>개인으로(사회는 개인보다 크고 개인은 사회에 속해있다) 이해하기란 어려우며, 동아시아는 단지 지역의 위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로 섞여 들어가느냐에 따라 다른 문제의식들을 환기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라는 말에서 제가 느낀 실감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저렇듯 다른 삼 항(한국-일본-미국, 한국-일본-자이니치)의 쉽사리 포개질 수 없는 관계. 연대가 외쳐지는 상황 속에서 늘 잠재하는 균열. 지식에 기대어 결코 말끔히 정리해낼 수 없는 유동적인 정체성과 감정의 틈새. 사실 제게는 여전히 동아시아 연대보다는 동아시아의 균열이 더욱 진실한 말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를 입에 담는 까닭도 무언가 공동의 요소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쉽게 가시지 않을 균열과 적대감으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동아시아에 관한 제 실감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미 너무 긴 분량을 할애했으니 못 다한 말은 다음에 전해도 될까요. 그리고 제게 준 질문을 돌려 이병한 님께 동아시아는 어떤 실감으로 다가왔는지를 물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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