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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지배하는 판·검사, 그 탄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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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한민국 지배하는 판·검사, 그 탄생의 비밀

[親Book] 문준영의 <법원과 검찰의 탄생>

네 죄는 하늘이 알고 네가 알고 있다

조선 시대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죄인을 문초할 때 늘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여봐라, 이실직고할 때까지 매우 쳐라!" 하는 호통 소리가 등장한다. 이것은 조선 시대 형벌이 자복(自服) 필수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범죄 사실에 대해 피고인이 범행을 스스로 진술하고 또 이를 스스로 승인하고 또 판결까지 스스로 승복해야 한다는 원칙을 조선 시대 재판 제도는 지키고자 했다. 자복이 없으면 판결도 형벌도 없었다.

자복이란 범죄를 저지른 어리석은 인민이 자신의 죄를 털어놓고 뉘우치며 판결에 승복하도록 하는 방편이었다. 범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데도 자복하지 않는다면 엄히 매로 다스려 도덕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밑에 깔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복을 받기 위한 고문이 당연히 뒤따르게 되었다.

이런 자복 필수주의는 19세기 말 서구의 사법 제도를 도입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폐기되고 오직 범죄의 증거를 토대로 한 증거 재판주의가 도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흔히 자복 필수주의는 미개한 것이고 증거 재판주의는 문명사회의 증거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실명 사회일 수밖에 없는 농업공동체 사회에서 범죄란 흔히 순간의 실수인 경우가 많았고, 그리고 대체로 범인도 누구라는 것이 명백했다.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의 양심이었고, 자복이란 개인의 존엄성을 최대로 살리는 방식이었다. 스스로 뉘우치는 절차를 통해 공동체는 인간의 실수를 수용하는 갈등 관리 공동체로서 지속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는 곧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했고, 공동체 추방은 사형과도 같은 형벌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면 범죄도 자연히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익명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범죄를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가를 생각하면 증거 재판주의를 문명국의 증거라고 보는 것은 과도한 서구 사대주의 가운데 하나일 수가 있다.

사실 서구에서도 중세에는 헌법과 법률로 구성된 오늘날과 같은 성문법 체계가 없었다. 법전을 뒤져 법조문을 따지는 그런 행위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오늘날 근대 국민 국가의 사법 체계와 사법 관료들도 없었다. 공동체의 황금 시대였던 중세에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관리했던 법과 원칙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관습과 도덕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일찍부터 농업 국가를 설립해 흥망성쇠를 거듭해오던 동양에서는 국가가 법을 편찬해 백성을 다스리는 체제가 발달해 있었다. 조선에서도 명나라의 대명률과는 다르게 조선의 실정에 맞는 경국대전을 제정하고 이후에도 세세한 법 개정 과정을 거쳐 매우 정교한 사법 절차를 시행해 오고 있었다.

사법 주권은 인민의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참으로 넓고도 많은 의미를 내포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 어떤 용례로 사용되건 민주주의의 핵심이 인민 주권이라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즉, 인민이 권력을 갖고 있다는 주권 재민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처럼 주의(이즘(ism))가 아니라 인민(데모스)의 통치(크라시), 즉 왕이나 대통령이나 기타 다른 권력자가 아니라 인민이 스스로 자신을 통치하는 체제를 말한다.

인민이 주인으로서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당연히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행사하고 입법, 사법, 행정의 일꾼들을 인민들이 직접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복종하고 눈치를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행정부 공무원과 경찰의 임면권이 대통령에게 있으면 당연히 이들은 대통령에게 충성하게 된다. 아무리 경찰을 '민중의 지팡이'라고 규정하고 공무원을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 헌법에 명시해 놓아도 말짱 헛것이다. 경찰과 검찰은 대통령의 몽둥이이고 인민들을 물어뜯는 대통령의 충견들이다.

그런데 현대 국민국가에서는 대체로 인민의 주권을 선거 절차를 통해 위임하는 위임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도 입법권은 국회와 지방자치단체 의원에게, 행정권은 대통령과 지방자치단체장에게 4년 내지 5년마다 한 번 치르는 선거를 통해 위임해 준다. 그리고 이들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 의원과 대통령, 도지사, 시장은 4, 5년 동안 입법권과 행정권의 전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법권은 위임 절차도 없이 사법 관료가 독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인민의 사법 주권은 인민도 모르게 강탈당한 채 사법 관료 독재의 상태가 반세기 넘게 지속돼 오고 있는 셈이다.

빼앗긴 사법 주권을 탈환하라

▲ <법원과 검찰의 탄생>(문준영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법전만 달달달 외워 고시에 합격하고 나면 그때부터 출세가 보장된 사법 관료로서 인민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한국의 사법 제도이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법 권력은 거의 제동 장치도 없어 수많은 민주주의 관련 판결도 사법 관료 개인의 성향에 따라 전혀 상반된 판결이 내려지기도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라는 말로 표현되는 사법 관료의 부패와 부정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이 모든 일이 인민 주권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사법 주권을 인민들이 강탈당한 결과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이 탄생할 때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인민들의 소중하고 소중한 사법 주권이 위임 절차조차 없이 사법 관료의 손아귀로 떨어지고 말았던가.

문준영의 <법원과 경찰의 탄생>(역사비평사)을 보면 이런 사법 주권의 강탈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범인은 미군정이었다. 해방 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일제 총독부를 이어받아 미군정을 실시했고, 이 때 남한을 점령 통치하는 데 일제 식민지 관료를 그대로 재등용했다.

미군은 조선인을 자치 능력이 없는 미개한 민족으로 적대시하고,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일본인을 문명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한 인민을 강력하게 통치하려고 사법 주권을 남한 인민에게 주는 제도는 배제하고 강력한 경찰과 검찰을 통한 통치 체제를 만들었다. 다시 권력을 쥐게 된 친일 민족 반역자는, 특히 사법 권력을 인민에게 돌려주는 따위의 헌법 절차는 아예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바이마르 헌법을 전범으로 미국의 사법 체계를 도입해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이 인민의 사법 주권을 위임 절차조차 없이 사법 관료에게 넘겨준 것은 이처럼 당시 미군정이라는 해방 이후의 정치경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준영은 헌법 제정 과정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이래 지금까지의 사법 제도 역사를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그 출생의 비밀과 성장 과정까지 자세히 조사 분석하고, 검찰과 경찰, 사법부의 평전이라고 할 만한 책을 썼다. 사법고시 합격과 출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한국의 법학 대학 풍토에서 흔치 않은 학문하는 자의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법부와 경찰, 검찰도 선거로 뽑아야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중앙 정부 권력은 비대할 대로 비대해져 권력이 인민에게 있다는 것을 망각한 암세포 권력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한국에서 선거는 요식 행위일 뿐이고 대통령이 누가 되든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소비에트연방의 특권 지배 계급이었던 노멘클라투라와 똑같이 임기가 보장된 특권 관료 계급이다.

입법부 권력은 그나마 4년에 한 번씩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교체되기라도 하고 적어도 4년에 하루는 인민들을 상전으로 모셔야 한다. 그러나 막강한 권력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한국의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세무서 등을 보면 이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대통령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아니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레임덕이 다가오면 얼마든지 대통령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이들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이다.

결국 이들이 퇴임한 대통령을 비극의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과정을 우리는 참담하고도 똑똑히 목격하고 말았다. 인민의 권력을 탈취해 간 이들 권력 찬탈자에게서 인민의 권력을 되찾아 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실현의 첫걸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 주권의 실현은 직접 민주주의!

국가가 주권 재민의 민주주의 국가냐 아니면 인민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국가냐 하는 기준은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하는 협소한 제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지방 자치, 지역 공동체의 자치가 과연 존재하느냐에 있다.

국가는 지방의 연합, 즉 연방으로서 필요한 만큼만 권력이 주어지면 되고 기초 공동체의 권력은 가능한 만큼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민의 직접 정치, 직접 민주주의가 실천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절대로 3권 분립, 선거, 대의제 같은 몇 가지 제도가 아니다. 4년마다 한 번 주인이 되는, 그것도 제대로 된 주인이 아니라 대규모 언론 매체의 조작된 이미지에 따라 수동의 객체로서 참여하는 선거 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실상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며 민주주의라는 환상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인민 주권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와 이를 가능케 하는 지역 공동체이다.

민주주의의 근거지는 성숙한 시민 의식 같은 추상의 정신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근거지는 또한 좋은 대통령이나 좋은 정부, 즉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확실한 근거지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자립 자치의 공동체이다.

공동체를 강조하다 보면 흔히 집단주의, 전체주의를 용인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지 않느냐는 지적을 한다. 사실 공동체가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고 전체주의 질서나 엘리트 독재 질서에 갇히게 될 위험성은 늘 있다.

그러나 지역 자치 공동체와 국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역 공동체는 철저한 자유인의 연합체이다. 에너지-식량을 자립하는 자치 공동체는 국가와 달리 그 규모가 지역으로 국한되며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는 공동체란 국가의 신분제나 계급제의 강한 억압 아래 있을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등이 없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자치 공동체도 아니다. 자유가 없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며 자치 공동체도 아니다. 평등과 자유가 없다면 공동체는 감옥일 뿐이다.

국가는 자치 공동체의 견제와 감시가 없으면 늘 파시즘으로 치닫는 충동이 있다. 국가는 국가 교육 기관을 통해 국가주의를 어릴 적부터 인민들에게 세뇌시킨다. 국사와 국가주의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공무원은 인민의 공복이고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고 군대는 나라를 지키는 애국자라는 환상과 망상을 심어놓는다.

그러나 경찰과 군대, 공무원은 적으면 적을수록, 없으면 없을수록 그만큼 세금이 적어지고 인민의 생활은 더 나아진다. 사실 경찰, 군대, 공무원 같은 제도보다 더 좋은 것은 인민 스스로의 지역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여기로부터 비롯된 애국심 그리고 인민 스스로의 질서와 통제, 자립 자치이다. 스위스의 예를 들 것도 없이 입법과 사법과 행정은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공동체 자체의 자원봉사로 충분히 가능하다.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은 민주주의의 실현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투철한 민주주의자들이라고 해서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민주주의의 실현 주체는 인민이며, 민주주의 실현의 핵심은 인민들의 자치가 실현되는 지역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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