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제반 여건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어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충분한 동력이 유지될 수 있을지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기후 변화, 환경·에너지 문제는 여전히 우리가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과제."
누가 보면 전혀 다른 입장을 가진 두 세력이 격렬하게 말다툼을 하는지 알겠다. 그러나 두개 모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입장이다. 산업용 전기 요금을 올리면 그만큼 상품 가격으로 전가시켜버리겠다며 흡사 온 국민을 대상으로 협박을 하는 듯한 전자의 글은 9월 22일에 나온'산업용 전기 요금은 필수 생산 요소,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비싸'라는 긴 이름의 보도 자료다.
그리고 후자는 아시아 비즈니스 서미트에서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발표한 내용을 묶어 9월 29일에 발표한 "녹색 성장, 아시아가 선도해야"라는 보도 자료에 나온 내용이다. 불과 1주일 간격을 두고 발표된 두 내용은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니 자신들이 뭘 얘기하고 있는지 알기는 알까.
정부가 지난 9월 15일 일어난 전국적 정전 사태 이후 전기 요금 인상안을 뼈대로 한 대책을 발표하자 전경련이 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물론 자신들의 무능력과 안일함을 국민과 기업의 탓으로 돌리고 얼버무리려는 정부의 태도는 탐탁지 않다. 그래도 전경련의 이율배반은 정말 가당치도 않다. 차라리 '환경 파괴나 지구 온난화 따위 우리는 관심 없어요'라며 커밍아웃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기가 막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가 온실 기체 배출량의 31퍼센트를 차지하는 발전 부문에서 수요 관리를 하지 않으면 도대체 자신들이 최우선 가치라고 얘기하는 기후 변화를 어떻게 막아보겠단 말인가.
전경련이 산업용 전기 요금 인상안을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2000년 이후 11차례의 전기 요금 조정으로 평균 26.6퍼센트 인상되었는데, 산업용 요금은 그 두 배에 가까운 51.2퍼센트나 인상"되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주택용은 4.1퍼센트, 일반용은 6.6퍼센트 올랐으니 불평이 나올법하다.
그런데 이 수치는 어떨까? 2000년도에 주택용과 일반용 전기 요금이 각각 킬로와트당 94.2원, 106.04원이었던 데 반해 산업용은 고작 58.3원에 불과했다. 당연히 원가 회수율은 그 만큼 낮았다. 2010년 현재 주택용이 103.3원, 일반용이 98.9원이지만 산업용 요금은 여전히 76.6원밖에 되지 않는다. 주택용과 일반용이 애당초 높이 책정됐었기 때문이지 전기 요금 간 격차는 이제 정상화되고 있는 과정에 불과하다.
정부가 정말 수요 관리에 관심이 있다면 산업용 요금은 오히려 더 빡세게(!) 올려야 할 판이다. 주택용 전기 요금의 총괄원가 미달액은 -4,623억 원인 반면, 산업용은 -2조 1,157억 원에 이른다. 왜 자꾸 산업용 요금만 올리냐는 핏대 세운 불평은 그간 싸게 받은 수십조 원 다 토해낸 다음 하시도록.
▲ 2000년 이후 전기 요금 변화 추이. ⓒ국가에너지통계종합정보시스템 |
두 번째 이유는 산업용 전기 요금은 생산 필수 요소기 때문에 어쨌든 싸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경련 분석 자료를 보면 "국내 주택용 대비 산업용 전기 요금 비율은 75.3퍼센트로 일본 69.3퍼센트, 미국 59.2퍼센트, 영국 65.5퍼센트 등에 비해 비싸다"고 주장한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수치는 어떨까? 한국전력의 자료에 따르면 전체 전력 판매량 중 주택용은 14.6퍼센트인데 반해 판매 수입은 20.1퍼센트로 6.5퍼센트나 높다. 반면 산업용 판매량은 53.6퍼센트고 판매수입은 47.3퍼센트로 6.3퍼센트 낮다. 주택용에서 걷은 요금으로 산업체를 지원해주고 있다는 의미다. 또, 2010년 말 현재 우리나라 산업용 전기 가격을 1킬로와트시당 100원으로 놓았을 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184원이고, 일본은 266원에 달한다. 기후 변화 시대 "악의 축"이라고 불리는 미국조차 117원이다.
절대 가격은 지나치게 낮고, 서민들에게 돈을 뽑아 기업들에게 지원하는 교차 보조가 문제인 것이다. 물가나 생산 능력, 전기 요금의 외부적 비용 등을 다 제외하고 단순 계산한 국가 간 비교치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적자폭이 훨씬 큰 게 더 문제라는 건 초등학교에서 산수를 착실히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일인데, 왜 경영학까지 하신 분들이 그걸 모르시나. 날림 공사 때문에 기둥이 흔들리고 있는데 다른 집에 비하면 비싼 자재로 공사했단 얘기가 변명이 되나.
세 번째는 이미 원가 보상률이 높다는 주장이다. 전경련은 지식경제부 자료를 인용해 "산업용 전기 요금의 원가 회수율은 92.1퍼센트로 주택용(89.7퍼센트)이나 평균(90.3퍼센트) 수준을 상회하고 있다"며, 이미 가장 높은 수준의 전기 요금을 내고 있다고 밝혔다. 음~ 그렇다면 주택용 전기 요금을 올리는 게 맞겠다. 그러나 이 자료는 어떨까?
지난 8월 1일 전에는 주택용 전기 요금 원가 회수율이 87.9퍼센트였고, 산업용은 86.8퍼센트였다. 작년만 해도 주택용은 94.2퍼센트인데 반해 산업용은 89.4퍼센트였다. 심지어는 2006년까지만 해도 주택용 전기 요금 원가 회수율은 103.8퍼센트, 일반용은 112.3퍼센트인 반면 산업용은 89.3퍼센트이었다. 기업 특혜를 위해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었다는 이야기다.
지난 8월 전기 요금이 인상되기 전까지 주택용과 일반용 전기 요금 원가 회수율이 산업용 전기 요금의 원가 회수율보다 훨씬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원가 회수 비용 격차가 줄어들기 시작한지 채 2달도 안됐다는 의미다. 정부가 원가 연동제를 도입한다니 이제 주택용도 곧 원가 회수율이 100퍼센트로 올라갈 것이다. 게다가 주택용엔 누진제 등 수요 관리 요소가 강하지만 산업용은 심야 경부하요금제 등 혜택이 더 많다.
그런데도 정전 사태를 막으려면 주택용 전기 요금을 먼저 올리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비만증 성인이 사과 10개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후, 3개 정도 먹은 어린이한테 몸무게 대비 네가 더 많이 먹었으니까 돈 네가 내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되나. 애플이나 벤츠와 맞짱 뜨는 글로벌 기업들이 쪼잔하게 왜 이러시나.
▲ 전력 수요 관리의 핵심은 대기업 전기 요금의 인상이다. ⓒ연합뉴스 |
전경련이 전기 요금 인상에 반대한 네 번째 이유는 중소기업들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전경련의 산업용 전기 요금을 올리면 "인상으로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이 가중"된다고 강조하며 상생 경영에 관한 인도주의적 면모를 과시했다. 그런데 이거 왜 이러실까. 작년 한 해 상위 200대 기업이 낮은 전기 요금으로 받은 혜택은 1조원에 가까운 9,832억 원에 달한다. 전체 혜택의 50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전기 요금이 오르면 대기업 손해가 더 크다는 얘긴데 왜 이리 솔직하지 못하실까. 그래서 지난 8월 중소기업을 위한 정책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현 정부마저 중소기업 전력 요금은 따로 배려하지 않았나.
전경련이 거의 현실 조작에 가까운 수치들을 동원해 전기 요금 인상안을 반대하고선 1주일 만에 기후 변화와 에너지가 최우선 가치라며 국제회의에서 떠들어댄 건 정말 파렴치한 일이다. 이쯤 되면 말 바꾸기를 밥 먹기보다 자주하는 정치인들마저 한 수 배우고 가야겠다. 발표 말미에 "원전이 여러 논란이 있지만, 국제 공조를 통한 안전성을 확보한다면 저탄소 녹색 에너지원으로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전기 요금 인상과 값싸고 안정적인 전기시스템에 관한 자신들의 시각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라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 이후 방사능 때문에 수천만 명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일본까지 찾아가 녹색 운운하며 핵 발전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낸다는 수준 자체가 슬프다. 기업들에게 '버핏세' 같은 착한 심성은 바라지도 않는다. 우선 제발 자신들이 쓴 만큼의 전기 요금은 내겠다는 '상식'이라도 지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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